제목: 반전(反轉) 뒤에
본문: 고린도후서 7:13-16
서론)
한자 단어로 반전(反轉)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사전에 찾아보니 풀이가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반대 방향으로 구르거나 돎”, “위치, 방향, 순서 따위가 반대로 됨.”, “일의 형세가 뒤바뀜.”
이 단어를 근거로 할 때 반전의 모양새를 가장 잘 보여준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지 않을까 싶습니다.멘로파크 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인 존 오트버그는 그의 걸작인 ‘Who is the this man?’에서 예수님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① 품위라고는 없는 인생을 살았지만 가장 가치 있고 고귀한 사람
② 여자의 마음을 안 완벽한 남자.
③ 거짓된 사랑 때문에 분노한 긍휼의 사람
④ 세상의 교육을 바꾼 목수
⑤ 스스로 노예라는 수건을 두른 윗사람
⑥ 원수를 이웃으로 삼은 용서의 사람
⑦ 열두 명으로 세상을 영원히 바꾸어 놓은 한 사람
⑧ 황제의 세계를 허문 식민지인
⑨ 결혼에 신성을 부여한 독신남
⑩ 온 세상에 영감을 불어넣은 유대인
⑪ 스스로 사형선고를 내린 유대인의 왕
⑫ 무덤과 사망과 지옥 속에 누었다가 약속대로 죽음을 이기고 돌아온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왜 제가 오트버그 목사의 글에 나오는 예수님의 정체성을 언급했는지 눈치 빠른 교우들은 이해하셨을 것입니다.12가지로 열거한 예수님에 대한 정체성에서 보이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입니까?
반전입니다.
전부를 다 설명할 수 없으니까 오트버그가 역설한 ‘품위라고는 없는 인생을 살았지만 가장 가치 있고 고귀한 사람’이라는 이 정체성만 나누어 보고 싶습니다.
주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품위라는 것과는 담 쌓은 삶을 사셨습니다.
주님은 왕이셨지만 단 한 번도 왕의 자리에 앉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가장 낮은 자들과 함께 하신 갈릴리에서 전 생애를 보내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가장 낮은 자의 본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메시지가 무엇이었습니까?
5번째로 소개한 바로 이것입니다.“스스로 노예라는 수건을 두른 윗사람”
요한복음 13:12-15절입니다.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특히 13절에 기록된 ‘주’와 ‘선생’이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합니다.
‘큐리오스’ 즉 ‘주’는 당시 정치적 주군(황제)에게 유일하게 붙여야 하는 단어였습니다.
‘디다스칼로스’ 즉 ‘선생’은 사회적 관점에서 ‘나를 가르쳐주는 자’에게 붙이는 단어였습니다.
그렇다면 전자는 말할 것도 없이 후자까지 포함하여 이 두 단어는 나보다 위에 있는 윗사람을 지칭하는 단어일 것입니다.
이 맥락으로 접근할 때 주님은 ‘디다스칼로스’요, ‘큐리오스’라는 제자들이 불렀던 정의는 100% 정답입니다.
그런데도 주께서는 당신을 노예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자리를 고수하시는 삶을 사셨습니다.
주요 선생인 품위는 전혀 내세우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그 분은 오늘 인류 역사상 가장 가치 있는 존재로 남아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반전의 삶이요, 위상을 보여주신 셈입니다.
그렇다면 꼭 주님처럼은 아니더라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양새도 주님이 걸으셨던 영적 반전의 길을 걸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본론)
저는 우리 교우들과 지난 강해를 통해 고린도후서 1-9장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4번째 편지에 해당하는 서신이라고 말씀드렸던 적이 있습니다.
이 설명을 하면서 배경에 대해서도 상세히 소개하였습니다.
바울은 ‘분노의 편지’이자 애타게 호소하는 ‘눈물의 편지’였던 소위 말해 ‘서신 B’라고 지칭하는 세 번째 편지를 디도에게 맡겨 고린도교회에 전달했다고 했습니다.
이후 바울은 고린도교회 지체들의 반응이 궁금하여 애타게 디도를 기다렸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우여곡절 끝에 마케도냐에서 디도를 만나서 세 번째 편지에 대한 고린도교회 공동체의 반응을 들을 수 있었다고도 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성도들 중에 바울의 적대자들로 인해 넘어갔던 지체 중에 상당수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세 번째 편지를 받고서 회복되었다는 보고였습니다.
이런 반응을 접한 바울이 오늘 본문을 쓴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공동변역 성서로 교우들에게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위로를 받을 뿐만 아니라 디도가 기뻐하는 것을 보고 우리는 더욱 기뻤습니다. 디도는 이제 여러분 모두의 덕택으로 마음의 안정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내가 디도에게 여러분을 자랑한 일이 있었는데 여러분은 과연 내 체면을 세워주었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한 말이 모두 진실이었듯이 우리가 디도에게 여러분을 자랑한 것도 이제 허황된 말이 아니었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디도는 여러분이 모두 자기 말을 순종하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맞아준 일을 회상하며 여러분에게 더 큰 애정을 품고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조금도 거리낌 없이 신뢰할 수 있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글의 내용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① 불편한 편지를 전해야 하는 영적 부담을 가지고 갔던 디도의 상태.
② 세 번째 편지를 가지고 가도록 했던 바울의 현 상태.
바울이 전자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디도가 신앙의 반전을 경험했다는 보고였습니다.
고린도교회에 바울의 서신을 가지고 갔던 디도는 그곳에서 반전의 상황을 경험한 것입니다.
바울을 내쳤던 자들이기에 디도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자기쯤이야 발톱의 때 정도로 여겨 문전박대를 하고, 내쫓김을 당하고, 심지어는 육체적인 린치를 당할 각오까지 했는데 너무 놀라운 반전을 경험한 것에 대하여 그는 실로 무척이나 고무되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본문 15절에 기록된 반전은 디도에게 너무나 큰 감격과 감동의 경험이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가 너희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과 떪으로 자기를 영접하여 순종한 것을 생각하고 너희를 향하여 그의 심정이 더욱 깊었으니”
다시 공동번역으로 봅니다.
“디도는 여러분이 모두 자기 말을 순종하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맞아준 일을 회상하며 여러분에게 더 큰 애정을 품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적대자들에게 받은 예상하지 못했던 호의를 받고 너무나 큰 기쁨을 경험했다고 바울에게 보고한 것입니다.
본문에 기록된 반전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본문 13-14절을 음미해 보십시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우리가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그의 마음이 너희 무리로 말미암아 안심함을 얻었음이라 내가 그에게 너희를 위하여 자랑한 것이 있더라도 부끄럽지 아니하니 우리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다 참된 것 같이 디도 앞에서 우리가 자랑한 것도 참되게 되었도다”
바울은 디도를 고린도교회라는 적지에 보내면서 그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이렇게 말했을 가능성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디도에게 아마도 고린도교회 공동체의 장점을 부각시켰던 것 같습니다.
해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에는 적대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지하는 세력들도 있다는 것을 강조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일갈한 바울의 심정이 얼마나 비장했을까는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헌데 결과적으로 어떤 일이 벌어진 것입니까?
바울이 디도에게 말한 대로의 결과가 그대로 일어난 것입니다.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내가 디도에게 여러분을 자랑한 일이 있었는데 여러분은 과연 내 체면을 세워주었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한 말이 모두 진실이었듯이 우리가 디도에게 여러분을 자랑한 것도 이제 허황된 말이 아니었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공동번역 본문 14절)
그렇다면 이것 역시 분명한 팩트가 있어 보이는 본문 구절입니다.
무엇입니까?
역시 반전(反轉)입니다.
이런 반전의 반전을 거듭한 결과, 바울이 본문 마지막 16절에서 도무지 상상할 수 없을 것 같은 반전의 메시지를 내놓기에 이릅니다.
“내가 범사에 너희를 신뢰하게 된 것을 기뻐하노라”
격세지감으로 여겨지는 선포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지체들, 이 지체들 중에는 그를 끝까지 반대하는 적대자의 무리들까지 포함한 지체들인데 그들을 향하여 바울이 이렇게 선포하기에 이릅니다.
“고린도교회 형제들아, 내가 너희들을 기쁨으로 신뢰한다.”
어마어마한 반전입니다.
자, 우리는 지금까지 오늘 본문을 주석했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의 제목을 ‘반전 뒤에’ 라는 제목으로 설정했습니다.
설교를 듣는 교우들 중에 오늘 바울의 심정적 변화에 대하여 고개를 갸우뚱하는 지체들이 있을 줄 압니다.
오늘 설교가 담임목사의 너무 터무니없는 상상의 결과가 아닐까 감히 생각하는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저 역시, 바울의 심정적인 변화를 목도하는 본문을 준비하다가 여러 번 본문 이해에 대한 여타 주석서를 참고하며 조심스럽게 돌다리를 두드리며 건넜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거친 후에 오늘 설교의 결과물을 이렇게 정리해도 괜찮겠다는 지지를 고린도후서를 연구한 학자들로부터 받았습니다.
바울의 변신은 무죄입니다.
바울의 정서적 태도 변화도 무죄입니다.
물론 다음 주부터 다시 살피겠지만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피력한 고린도교회 지체들에 대한 강한 긍정적인 변화의 멘트가 고린도교회가 다시 완벽한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변화되었기 때문에 선포한 선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오늘 우리가 살펴본 내용은 역사적 진실이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디도에게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을 자랑했던 것, 그리고 바울이 말한 대로 된 일 즉 디도를 맞이한 고린도교회 지체들의 선대한 일은 만들어낸 허구의 메시지가 아니라 역사적 실제이지, 사실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렇게 아슬아슬한 살얼음판을 걸었던 바울과 고린도교회 공동체의 관계가 이렇게 급반전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오늘 본문에 나타난 급반전의 양태를 어떻게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것이 오늘 설교의 레마입니다.
※ ‘하나님의 만들어 가심’이라는 은혜의 결정판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추적할 수 있었던 바울과 디도와 고린도교회와의 연결고리에서 해피엔딩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던 것은 반전 뒤에 하나님이 만드셨다는 엄청난 은혜가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에스더 1-10장에서 가장 뜨거운 본문을 하나 들라면 6:1절을 들 것입니다.대체적으로 신앙인들은 에스더라는 역사서의 압권을 4:16절에 두는 것에 별 이견을 붙이지 않습니다.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에스더의 일사각오의 기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구절 말입니다.
그러나 제게 있어서 전율하는 감동을 주는 에스더 내증 안에 있는 구절은 이 구절보다 앞에서 언급한 6:1절이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그 날 밤에 왕이 잠이 오지 아니하므로 명령하여 역대 일기를 가져다가 자기 앞에서 읽히더니”
이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 잠시 이 구절의 배경을 설명하겠습니다.
아각 출신의 하만은 아하수에로의 총애를 받던 대신이었습니다.
마치 2인자와 같은 권세를 누린 자였습니다.
해서 바사에 있는 모든 자들이 그에게 머리를 숙였는데 오직 유다 출신의 모르드개만이 그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는 것을 알고 이에 분개한 하만은 자기의 주군인 아하수에로에게 뇌물을 바쳐 유다인들을 진멸할 수 있는 위임을 받습니다.
이 위기를 알게 된 모르드개는 사촌동생인 에스더 왕비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민족을 위해 왕에게 진실을 알릴 것을 종용하기에 이릅니다.
오빠의 종용을 받은 에스더는 그 유명한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왕께 나아가 진실을 알릴 터이니 바사에 살고 있는 유다인들에게 나를 위해 금식하며 중보를 해달라는 부탁을 한 뒤에 일어난 배경이 바로 앞에서 언급한 6:1절입니다.
다시 에스더 6:1절을 읽습니다.
"그 날 밤에 왕이 잠이 오지 아니하므로 명령하여 역대 일기를 가져다가 자기 앞에서 읽히더니"
우연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바사의 절대 군주였던 왕 아하수에로가 유독히 그 날 따라 잠이 오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잠이 오지 않는 아하수에로는 왕궁 내시에게 역대 일기를 가져올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그리고 가져온 역대일기를 읽기 시작을 합니다.
왕이 읽은 일기에는 불과 5년 전에 있었던 자신을 모살하려던 반역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공교롭게도 바로 그 잠이 오지 않던 밤에 아하수에로는 5년 전의 역대일기를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날 밤에는 5년 전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던 하나의 일이 왕에게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모반 계획을 알려주었던 모르드개에 대한 대우에 관한 일이었습니다.
적어도 반역의 무리를 일망타진하게 도와준 모르드개를 어떻게 대접했는지에 대하여 왕이 궁금해진 것입니다.
그 동안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던 부분을 에스더 6장에 기록된 바로 그 긴박한 상황에 대해 왕이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5년 전의 일을 왕이 신하에게 물어보니 모르드개에게 아무런 대우도 하지 않았음을 알게 된 아하수에로는 드디어 자신에게 있어서 어찌 보면 생명의 은인이라고 할 수 있는 모르드개에게 늦었지만 상을 내리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직접 주관하여 시행하는 실무자로 하만을 세우는 기가 막힌 반전을 세웠음을 에스더 6장 이하는 보고합니다.
유다인과 모르드개를 멸절시킴으로 조상 때부터 묵혀왔던 치욕을 갚으려는 하만의 흉계는 도리어 그가 죽이려는 장본인인 모르드개를 높여 상을 내려야 하는 역전과 반전의 드라마를 쓰게 함으로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여지없이 보여줍니다.
저는 지금까지 드라마틱한 반전을 기록한 에스더의 보고를 일부분 설명했습니다.
지금 무엇을 교우들에게 말씀드리기 위해 에스더를 인용했습니까?
반전 뒤에는 하나님의 일을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철저한 일하심이 있었음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아주 오래 전에, 이동원 목사가 쓴 책에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에스더 기자는 하나님의 이름을 숨기면서 하나님의 섭리를 드러내려는 의도를 가지고 이 책을 기록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다가 거의 하나님의 이름을 쓸 뻔했던 적이 한 번 있다. 그것이 언제냐 하면 4:14절이다.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 (이동원, “기막힌 하나님의 간섭”, 나침판출판사,p,14.)
설교자 켐벨 몰간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고 에스더의 단 한 줄로 계속해서 읽어내려 갈 수 없다.”(위의 책, 같은 페이지)
정답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일하시는 주군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를 따라 당신의 백성들을 위한 간섭과 일하심이라는 도구를 통해 나와 당신에게 반전의 은혜를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열왕기상 17장에 등장하는 사르밧 과부를 아십니까?
3년 6개월 동안 가뭄이 지속되는 최악의 심판이 북쪽 이스라엘에게 임할 때 사르밧에 살고 있는 과부에게로 가라고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명령합니다.
명령에 순종한 엘리야는 그곳에서 한 과부를 만나게 됩니다.
민심이 흉흉한 이 시기에 엘리야는 겁도 없는 명령을 그녀에게 내립니다.
물 조금과 네 손에 들고 있는 떡 한 조각을 달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이 명령을 받은 여인은 시큰둥하게 통에 가루 한 움큼이 있고, 병에 약간의 기름이 남아 있는데 이것을 이용하여 마지막 음식을 먹고 죽으려한다는 암담한 대꾸를 받은 엘리야는 다시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떡을 만들어달라고 철없는 것 같은 명령을 다시 또 내립니다.
그녀가 마지못해 명령에 순종하자 일어난 반전을 열왕기상 17:15-16절에서 이렇게 보고합니다.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이 구절을 근거로 하여 흔히 하고 싶어 하는 메시지는 주의 종에 말대로 순종했더니 복이 임했다는 것으로 국한시키는 아쉬움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사르밧 과부의 메시지에 담긴 더 중요한 영적 메시지는 하나님의 만드심이라는 반전의 메시지입니다.
엘리야가 행한 기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미 작품으로 만들어 가시기 위한 일하심의 결과가 사르밧 과부에게 일어난 기적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의 백성들의 무대 뒤편에서 일하고 계시는 주군이십니다.
우리는 신앙의 경주 즉 천로역정이라는 노정을 걷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이 길을 현재 생방송으로 가고 있는 우리를 다른 사람들은 예수쟁이 혹은 점잖은 말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러줍니다.
그런데 이런 호칭을 받았다고 해서 그리스도인 되는 것입니까?
천부당만부당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 오늘 살아가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직접 내 무대의 정면에서 나를 견인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 무대의 뒤편에서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기 위해 어느 때는 직접 조연으로, 또 어느 때는 직접 연출자가 되셔서 나를 만들어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느 때는 안고 만들어 가십니다.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신명기 1:31)
어느 때는 불성곽이 되셔서 우리들을 보호하시며 만들어 가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불로 둘러싼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에서 영광이 되리라” (스가랴 2:5)
어느 때는 말할 수 없는 탄식의 우심으로 우리들을 만들어 가십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히브리서 5:7)
어느 때는 매서운 회초리를 드시고 우리들을 만들어 가십니다.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 (잠언 3:11-12)
이런 면에서 우리가 부르는 다음 찬송의 가사는 적확한 가사입니다.
“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만 오오/채찍 맞아 아파도 주님의 손으로/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 해주시는/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어서 돌아오오 어서” (찬송가 527장 3절)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오늘은 503년이 되는 종교개혁주일입니다.
2020년만큼 교회 개혁이라는 말이 빈번하게 나온 해가 있었을까를 흔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만큼 오늘은 교회가 새롭게 되어야 하는 시점에 몰려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코로나 19는 이 일을 더 한 층 불붙인 꼴이 되었습니다.
해서 목회의 최전선에 나와 있는 저를 비롯한 일체의 사역자들이 백척간두의 위기에 있는 교회를 바라보며 다시 교회를 살리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동서남북이 맞혀 있는 것 같은 답답함이 제게 있습니다.
어디를 보아도 숨 쉬기가 불편한 교회이기에 마치 산소호흡기에 연명하고 있는 듯한 교회의 자화상을 봅니다.
그런데 근래 들어 제게 스멀대고 꿈틀거리는 소망의 내용이 하나 있습니다.
오히려 지금은 교회다운 교회를 만들 최적의 시기라는 영적 반전의 조명입니다.
오히려 지금은 진짜 그리스도인들을 고르는 반전의 시기라는 조명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인생의 끝이라고 생각이 될 때, 도리어 힘을 내십시오.
여러분의 길에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낙심할 때, 절망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뒤편에서 일하시며, 여러분을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은 쉬지 않고 계속해서 나를 돕고 인도하시는 반전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낙심과 절망이라는 단어는 사전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예레미야 33:2-3)
그렇습니다.
오늘도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성취하는 여호와께서 저와 여러분의 뒤편에서 반전의 승리를 주시기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명심하고 분연히 그 은혜를 경험하는 503번째 종교개혁주일을 맞으시는 세인 지체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지 마세요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신 축복
미리 보면서 감사하세요
너무 견디기 힘든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이 일하고 계시잖아요
남들은 지쳐 앉아 있을 지라도
당신만은 일어서세요
왜 이런 슬픔 찾아왔는지 원망하지 마세요
당신이 잃은 것 보다 주님께 받은 은혜
더욱 많음에 감사하세요
너무 견디기 힘든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이 일하고 계시잖아요
남들은 지쳐 앉아 있을지라도
당신만은 일어서세요
후렴)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주님이 손잡고 계시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함을 믿는다면
어떤 역경(고난)도 견딜 수 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