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ad fontes (4)
본문: 갈라디아서 2:20-21
서론)
워싱톤 사귐의 교회 공동체를 담임하는 김영봉 목사가 쓴 ‘팔레스타인을 가다’를 보면 이런 글이 담겨 있습니다.
“파리에 가는 것은 여행하는 것이고, 예루살렘에 가는 것은 순례라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어디에 가느냐?’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가느냐? 입니다.”(김영봉, “팔레스타인을 가다”,p,13. IVP.)
김 목사께서 이렇게 말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반드시 어느 목적을 설정하고 빈틈없이 거기에 도착해야 하는 한다는 신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가는 곳이 믿음의 주체를 만나는 현장이 될 것이라는 신앙을 갖고 갈 때, 어느 곳이 되든지 그곳이 바로 순례지가 된다는 것을 교훈하기 위해서 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신념이 아닌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한 셈입니다.
이제 제법 나이가 들어가면서 느끼는 소회가 하나 있습니다.
‘깊이’이라는 단어입니다.
젊은 나이에는 이 단어가 그리 절절하지 않았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읽은 글 중에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십자가 위에 달린 예수’다.”(김두식,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p,120.)
‘예수의 십자가’는 넓이입니다.
이 넓이는 신념을 가진 자도 어느 경우에는 동의할 수 있습니다.
대다수의 종교인들이 이렇게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를 생각하는 것은 신앙입니다.
또 이 신앙을 가진 자가 믿음의 깊이가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적어도 종교개혁자들이 갖고 있었던 ad fontes' 즉 초심의 마음은 넓이가 아니라 깊이에 천착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프로테스탄트 즉 개신교는 이렇게 시작은 깊이에 포커스를 두었습니다.
하지만 개신교는 시간이 갈수록 깊이가 아닌 넓이라는 물리적인 확장성으로 관심이 옮겨가면서 반기를 들었던 대상인 로마가톨릭의 체제를 너무나도 흡사하게 닮아가고 있는 것 같아 대단히 아프고 유감스럽습니다.
오늘 주일에는 가장 개신교적이어야 하는 종교 개혁의 4 번째의 슬로건을 나누려고 합니다.
이 슬로건은 가장 개신교적이어야 내용입니다.
헌데 다시 강조하지만 대단히 유감스럽게 다시 이 슬로건이 가톨릭적인 테제로 회귀하고 있는 것 같아 주목해서 공부해 보고자 합니다.
본론)
바로 ‘오직 은총만으로 (sola gratia)’의 해석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이 구절은 우리들이 너무 잘 알고 있는 갈라디아교회에 침투한 율법주의자들을 향하여 바울이 선포한 기독교 복음의 정수라는 영적 핵폭탄 탄두의 메시지입니다.
바울은 이 구절을 통해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는 유대 거짓 율법주의자에게 복음의 한 수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못 박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마치 쐐기를 박는 듯한 천둥소리를 냅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믿음이 바로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바울의 선언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이 믿음을 부인하는 자는 결국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헛되게 죽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 되는 것이라고 강력하게 천명하면서 유대 율법주의자들에게 맹폭을 가합니다. 더불어 이 복음의 진수에서 떠난 자들인 갈라디아 교회의 지체들에게 쓸데없는 거짓 복음에 현혹되지 말고 정신을 온전히 차리라고 경종하고 있는 메시지가 본문입니다.
이렇게 바울이 강하게 천명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믿음을 중세 가톨릭에서는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라 행위가 전제될 때 받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 행위 때문에 면죄부도 나온 것이고, 소위 말하는 7대 성사도 탄생한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이런 가톨릭의 가르침에 대하여 정면으로 도전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자, 은혜로 주어진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임을 정직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등장한 슬로건이 바로 ‘오직 은총만으로’ 즉 ‘sola gratia’인 것입니다.
자, 바로 이 즈음에서 우리 세인교회의 지체들과 분명히 해야 하는 첫 과정을 나누고자 합니다.
그것은 저와 여러분이 오늘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살 수 있게 된 것은 0,1%의 가감 없이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결의하고 또 결의하는 것입니다.
만에 하나,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 내가 구원을 받았다는 명제에 토를 달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우리 세인 지체들과 지난 주일에 ‘오직 믿음만으로(sola fide)’ 라는 제하의 설교를 전할 때 본문으로 보았던 에베소서 2:8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복기하겠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렇습니다.
이강덕 목사와 세인 지체들이 구원이라는 감격을 받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선물로 주어진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교우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기까지는 개신교회에 속해 있는 모든 상식의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되는 공통의 복음입니다.
문제는 이제부터입니다.
이렇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인간이 받느냐 마느냐에 대한 첨예한 대립구도입니다.
오늘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은총론에 대한 도서로 조직신학적인 여러 책들을 연휴 기간 동안 두루 섭렵했습니다.
그러다가 두란노 서원에서 출간한 목회와 신학의 부록 도서인 2014년 10월호 ‘은혜’ 편에 수록된 다음의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오직 은혜를 그릇되게 가르치고 행하는 초기 인물로 야코푸스 아르미니우스를 들 수 있다. (중략) 구원이 은혜가 아니라 인간의 협력을 전제해 선택이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은 거짓 진리다. 아르미니우스주의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모든 자를 위함이고, 인간이 은혜를 수용하든지, 거절하든지 할 수 있고, 인간 자신의 행동에 따라 구원을 받는지, 그렇지 않는지를 말한다. 간단히 말하면 구원은 인간 사역에 의존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오직 은혜로 구원을 부인한다.” (라은성, “종교개혁의 모토 ‘오직 은혜’의 의미”, 목회와 신학 부록 ‘그 말씀’ 2014,10월호,pp,92-93)
이 글을 쓴 총신대 신학대학교 역사신학 교수인 라은성 박사는 이 글 후에 아주 친절히 웨슬리 신학을 하는 사람들도 별 다를 바 없음을 밝혀주기까지 합니다.
글을 읽다가 두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① 학술 박사도 무식할 수 있구나.
⓶ 예의까지 없는 사람이구나.
저는 개인적으로 알미니우스 파에 속한 목사는 아니지만 웨슬리안 목회자입니다.
저는 웨슬리안 목회자이기에 개인적으로 캘빈주의에 대하여 반대합니다.
특히 제가 아주 강하게 반대하는 캘빈사상은 이중예정론 때문입니다.
이중예정론이란 말 그대로 하나님께서 한편에는 구원을 받을 사람의 그룹으로, 또 그 반대편에는 구원받지 못할 자의 그룹으로 당신의 주권적인 선택을 기준으로 구분하신다는 교리이자 사상입니다.
제가 이중예정론에 극도로 반대하는 이유는 대단히 많습니다.
그러나 제 이야기를 생략하고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조직신학 석학인 홀스트 푈만 교수의 글로 이중예정론을 반대하는 글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이중예정론의 표상은 비성서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보편적 은총에만 배치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에도 배치되기 때문이며, 그리고 그것은 비인간적인 방자한 신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 이론은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려고 하지만, 하나님의 인간됨으로 인하여 바로 영광을 받아야 할 인간의 명예를 박탈한다. 로마서 9:13,15-18,21절 이하의 어디에도 영원부터 작정된 버림에 관한 말은 없다.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롬 9:13)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롬 9:15-18)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롬 9:21) (중략) 바울은 결코 궁극적이고 불변적인 유기에 관하여 말하지 않았다. 예정은 결코 이중예정이 아니라 단지 구원을 위한 예정일뿐이다.” (홀스트. 푈만, “교의학”,한국신학연구소,p,331.2010년)
서울신학대학교 대학원에서 MA과정을 하고 있을 때, 이 글을 만났습니다.
제가 공부했던 신학교의 신학인 웨슬리 신학이 주는 2%의 부족함을 느끼고 있었던 때가 제가 본대학원을 할 때였습니다.
이유는 존 웨슬리가 경험한 초기 성결의 증거인 1738년 5월 24일 올더스케이트의 회심 이후에도 여러 차례 영적 목마름을 경험했다는 그의 일기 보고가 있는데도 학교에서 완전하지 않은 웨슬리신학을 너무 성경 위에 올려놓는 경향을 보았기에 그것에 대한 반발 심리로 그 반대급부인 캘빈신학에 대해서 열심히 공부했었던 바로 그 시기에 푈만 교수의 이 글을 만나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다. 캘빈이 갖고 있었던 인간의 한계가 바로 이중예정론으로 드러났다. 그러므로 완전한 신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서로 보완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가까운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무슨 말입니까?
캘빈신학도, 웨슬리신학도, 성경을 연구하며 발전시켜나간 사람이 만든 하나의 교리이기에 역시 완전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후 저는 웨슬리와 캘빈을 넘나들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은혜를 보완하며 목회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 태도가 신학을 공부한 사람의 태도요, 자세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저는 조금도 물러서고 싶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언급한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장로교회에서 역사신학을 전공한 교수가 캘빈신학 이외에 그 어떤 신학도 이단적 사상으로 몰고 가는 행태는 교만함과 건방짐의 극치요 무식의 소치입니다.
캘빈주의에 빠져 그 캘빈주의를 성경보다 위에 놓고 있는 어설픈 장로교신학주의자들이 이 땅에 비일비재합니다.
웨슬리신학을 공부한 목사들은 ‘오직 은총만으로’ 라는 구원의 과정을 부인한다는 망발을 주저 없이 행하는 그 당돌함이 어디에 기인하고 있는지 두렵기까지 합니다.
다시 본래의 설교 취지로 돌아가겠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은총만으로 (sola gratia)’라는 기치에서 한발자국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로마 가톨릭이 전승해 오고 있는 펠라기우스적이며, 반(半)펠라기우스적인 사상이 신학적이지도, 성서적이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조금 쉽게 설명을 드린다면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교부시대의 이단자였던 펠라기우스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심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거부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해서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은 스스로 멸망할 수도 있고, 스스로 구원을 받을 수도 있다고 가르침으로 스스로를 비성서적, 반신학적 길을 선택하였던 이단자입니다.
여러분은 들으시면서 담임목사도 자유의지를 대단히 강조했는데 그렇다면 당신도 펠라기우스주의자가 아니냐고 질문하실 수 있습니다.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할 것이 있습니다.
웨슬리가 말한 선행적 은총인 자유의지는 전적인 타락을 한 인간이 자력적으로 구원을 이룰 수 있는 자유의지라고 해석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웨슬리가 말하고, 저 또한 믿는 구원의 도는 이렇습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홀로 구원을 이룰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것을 아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드디어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펠라기우스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속죄의 본질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단자입니다.
스스로가 갖고 있는 자유의지를 선용해서 얼마든지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한 이단자입니다.
그러나 제가 믿고 따르는 존 웨슬리신학의 구원관은 인간이 갖고 있는 선행적 은총인 자유의지를 통해 예수를 거부할 수도 있고, 따를 수도 있기에 이점에 있어서 자유의지 선택론을 말한 것이지, 결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부인하는 도구로 자유의지를 악용하고 있다고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재론하지만 구원은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밝힌 대로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조건은 인간이 무엇을 행하려는 그 무언가가 아님을 저 역시 분명히 합니다.
이렇듯 성서적, 신학적 동기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단지 교리적인 불편함이 있다고 해서 한국에서 제일 선교의 점유율이 많다는 이유로 전 세계 기독교 신자의 60%를 점하고 있는 웨슬리안들을 ‘오직 구원만으로’ 라는 슬로건을 부인하는 자로 몰아가고 있는 캘빈주의자들의 편협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여기까지 'sola gratia' 에 대한 신학적 불편함을 담론으로 제시했으니 이제 저는 명확한 오직 은총만으로에 대한 신학적 입장 정리를 하고 설교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 하나님의 은총은 수직적 선물이기도 하지만 반드시 수평적으로 역사하는 선물임을 분명히 합니다.
문자적인 의미로 해석하자면 캘빈주의자들의 말이 전적으로 강하게 다가옵니다.
은총이 어떻게 은총 받는 자의 반응을 통해서 좌우되는가에 대한 직설 때문입니다.
은총을 베푸는 자의 권한이라는 점에 천착하기 때문입니다.
문자적으로 분명히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의 치명적 위험성은 하나님의 속성을 전혀 배려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스위스가 낳은 걸출한 신학자 에밀 브룬너의 말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존재하며, 이런 은총을 통해서만이 기독교 믿음은 세상을 위한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에밀 브룬너, “십자가, 결코 억울한 죽음이 아니라는 희망”, 공감마을, p,171,2014년)
브룬너의 갈파에 감히 대적할 반론이 있겠습니까?
원론적으로 너무 타당한 통찰입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이 은총은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 안에서 주어진다는 것을 전제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을 배제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앞에서 인용한 푈만은 진보적인 조직신학자이지만 그의 은총론 해석은 대단히 은혜롭습니다.
“구원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총만으로 일어나지만, 인간이 없이는 일어나진 않는다. 구원은 인간을 배제하지 않은 채 오로지 은총만으로 일어나지, 인간이 없이 오로지 은총만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은총은 인간의 의지를 대신하지 않고 전제한다.”(푈만, “교의학”, p,331.)
폴 틸리히라는 신학자의 말은 ‘오직 은총만으로’라는 캘빈주의자들의 오만불손한 태도에 대하여 쐐기를 박습니다.
“은총은 인간의 공로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그래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준비태세와 상관되어 있다.” (앞에 책,p,333.)
사정이 이러하기에 이강덕 목사도 담대히 이렇게 세인 지체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수직적으로 제 멋대로 우리에게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평적으로 동료인 인간과 대면하시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일하심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선포합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자가 성결교회의 신자들입니다.
이것을 믿는 성결교회의 신자들은 그렇다면 대단히 중요한 결론에 도달합니다.
하나님의 인격적인 수평적인 일하심으로 인해 구원이라는 은총을 받은 자는 반드시 그 다음 책임적으로 반응하는 삶을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앞에서 인용한 무례하기 짝이 없는 캘빈주의자는 저를 비롯한 웨슬리안들을 향하여 구원은 그것을 받기 위해 인간의 그 무언가를 행하는 것에 따라 주어지는 것을 믿는 자라고 호도하고 몰고 가려고 하지만, 그건 무식의 소치입니다.
올바른 성서적 구원론을 믿는 웨슬리안들은 구원이 하나님의 은총만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결코 부인하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그 감격을 받는 자들이기에 그 구원받은 자의 증거와 결과물로 구원 받은 자들은 책임적 반응을 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구원을 받기 위해 강도 만난 자를 도운 것이 아닙니다.
마땅히 하나님의 선민으로 선택받은 자였기에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을 실천하는 책임적 반응을 나타낸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등장하는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흔히 범하는 오류가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돌본 행함을 실천한 자는 영생에 들어가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영벌에 들어간다고 가르치는 펠라기우스적인 거짓 가르침입니다.
속지 마십시다.
가난한 자, 춥고 헐벗은 자을 돕는 것은 영생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 구원을 받은 감격의 경험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책임적 반응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책임적 반응이 구원의 조건이라고 가르치는 거짓 복음에 속지 않기를 바랍니다.
은총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전적인 선물이지만, 그 은총을 받은 자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값비싼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 가지고 있는 자유의지를 선용하여 반드시 그리스도인답게 주의 뜻에 합당한 책임적 반응을 보이며 사는 자들입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어려운 설교를 잘 따라와 주신 교우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수직적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은총은 인간을 식물인간으로 만들거나, 감성이 존재하지 않는 로봇 상태로 만든 뒤에 벼락처럼 내리 꽂는 잔인한 현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동반자로 여기셔서 동료적인 관계를 설정하시면서 주시는 동시의 수평적 선물입니다.
‘오직 은총만으로’ 변하지 않는 개신교신앙의 모토입니다.
이 은총을 받은 자는 반드시 책임적인 반응을 하는 그리스도인이어야 합니다.
왜?
그것이 은총을 받은 자라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간에 친구 목사가 제게 노래 선물 하나를 SNS를 통해 했습니다.
요즈음 트로트 전성시대라서 그런지 그 친구는 전혀 대중가요에 관심이 없을 것 같은 성령 충만한 친구인데 제게 보내준 노래는 이미자님의 노래였습니다.
목양터 이야기 마당에서 밝힌 것처럼 그 노래의 제목과 가사는 이렇습니다.
“내 삶의 이유 있음은”
나 이제 노을 길 밟으며 나 홀로 걷다가 뒤돌아보니/인생길 구비마다 그리움만 고였더라/외롭고 고달픈 인생길이었지만 쓰라린 아픔 속에서도/산새는 울고 추운겨울 눈밭 속에서도 동백꽃은 피었더라/나 슬픔 속에서도 살아갈 이유 있음은/내안에 가득 사랑이/내안에 가득 노래가 있음이라
친구는 SNS에 이러게 적었습니다.
“이미자님의 노래를 들으면서 진정한 고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깨닫게 된다. 우리 함께 멋진 목회자로 살아가자.”
저를 아끼는 친구 목사의 글을 읽다가 저는 생뚱맞게 다른 가사가 생각났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 향한 내 비웃음/나를 향해 돌아오고/어리석고 미련한 그 백성들/나의 모습과 같네/찢기고 상한 나의 영혼을/끝까지 사랑한 아버지의/그 은혜를 무엇으로 다 갚으리요/내 생명 다해 주 노래하리라/내 생명의 근원 되신/나의 삶의 이유 되신/내 모든 것 나의 전부/아버지 나 다시 일어섭니다/어리석고 미련한 나/믿음 없어 실패한 나/그런 나를 안아주시는/아버지 나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내 삶의 이유는 주군 때문입니다.
왜?
그 분은 도무지 자격 없는 제게 은총을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믿음을 선물로 주신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은총만으로는 이런 감격이 내포되어 있는 신앙 선배들의 고백입니다,
우리 ‘다시 일어섭니다.’를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