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6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제목 : 진짜로 이기려면 본문 : 요한복음 16:30-33 서론) 지난 달, 29일은 우리나라가 1910년에 처음으로 국권을 일본에게 빼앗긴 치욕의 날인 110번째 맞는 국치일이었습니다. 지워버리고 싶은 날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대로 잊으면 안 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정치하는 지도자들의 무기력함과 무능력함으로 인해 나라를 빼앗겼던 말 그대로 죽음보다 더 치욕스러운 날인 국치일입니다. 지난해부터 일본과의 사이에서 벌어진 경제 전쟁으로 인해 지금 한일관계는 1910년에 버금가는 살벌한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일본 상품 불매 운동이 불일 듯 일어났고, 상당수 많은 일본 기업들이 한국에서 철수하는 그야말로 통쾌한 일이 벌어진 것도 사실입니다. 동시에 이런 운동은 앞으로도 영원히 지속해야 한다는 제 2의 국채 보상운동의 성격으로 들끓고 있는 것은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어려서 많이 들었던 이야기 중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일본하고는 가위바위보 게임도 지면 안 된다.” 물론입니다. 일본이라는 나라한테는 그래야 합니다. 이 정신은 두 가지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① 일본이라는 나라한테 36년간이나 나라를 빼앗긴 경험에서 나오는 정신무장입니다. ② 아직도 우리는 일본이라는 나라한테 여러 분야에서 뒤처지고 있다는 것에 대한 분발의 의미일 것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경제전쟁의 극점에 있을 때, 반도체 공정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 재료인 불화수소 국산화가 90% 이루어졌다는 보고를 받고 문재인 대통령이 대 일본을 향해 했던 말은 대단한 국가적 자존감을 올리는 명언이 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다시는 일본한테 지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지금부터 15년 전 즈음에 일본 교토에서 사역하는 신학교 후배 선교사를 돕기 위해 처음으로 일본이라는 나라에 발을 디뎠습니다. 당시 왠지 모를 자존감 충만이라는 정서를 갖고 일본이라는 나라에 입국했습니다. 나리타공항에 도착하여 입국 수속을 하고 일본이라는 나라에 첫 발을 디디면서 이런 기도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이 나라가 우리나라를 점령한 적이 있습니다. 일본이 다시는 우리나라를 넘보지 못하도록 10-20년 안에 일본을 추월하게 하옵소서! 다른 나라에 갔을 때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애국자가 되는 순간을 뼈저리게 느끼며 일본이라는 땅을 밟은 것 같습니다. 그 마음은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전혀 바뀌지 않았습니다. 일본에서 일주일을 머무는 동안 일본이라는 나라의 나쁜 점을 찾으려고 정신을 집중했고, 그런 내용이 보이면 곧 메모하는 유치한 일도 행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원수들이자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원흉들이 합사되어 있는 도쿄에 있는 야스쿠니 신사를 후배 목사가 한 번 볼 필요가 있다고 해서 다녀올 때도 이렇게 읊조리면서 들어간 기억이 생생합니다. “하나님, 야스쿠니 신사가 지진으로 형체도 알아보지 못하게 무너지게 하옵소서!” 지금 생각해 보면 웃픈 일이었고, 열등감의 소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여하튼 일본하고는 묵찌빠도 이겨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일본이라는 나라와 갖고 있는 정서적 대립각이 크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우리가 일본이라는 나라에게 이기는 것이 묵찌빠에서 이긴다고 이기는 것이겠습니까? 를 묻는다면 그건 오기이지 정답은 아닐 것입니다. 진짜로 일본을 이긴다는 것은 그들이 갖고 있는 정신의 우월함일 것이고, 윤리적 태도나 도덕적 자세에서 앞서 나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짜로 이기는 것은 물리력의 승리가 아니라, 정신적인 승리일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적인 신앙이라는 관점에서도 맥을 같이 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은 16장이 텍스트이지만 본문을 이해하려면 요한복음 13장이라는 텍스트부터 이해를 해야 합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에 들어오셔서 공생애 중에 마지막 주간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주간 목요일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가지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시고, 소위 말하는 다락방 강화를 통해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설교를 통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제일 중요한 다락방 설교의 내용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고 죽게 될 것이라는 수난 고지였습니다. 아마도 집과 전토를 버리고 주님을 따랐던 제자들에게 주님의 수난고지는 적지 않은 충격과 데미지를 주었을 것입니다. 이 고지 중에 베드로가 부인할 것과 제자들도 배신할 것을 예고하셨고, 특히 가롯 유다의 배신은 다락방 강화의 압권이었습니다. 더불어 제자들에게 이해불가의 메시지 즉 성령의 도래를 말씀하셨습니다. 내 시대는 끝이 나고 보혜사 성령이 와서 너희들을 도울 것이라는 예수님의 설교는 제자들에게 그리 마음에 와 닿는 메시지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자들의 능력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단지 철썩 같이 믿었던 예수가 죽는다는 것은 멘붕이었고, 본인들의 입지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때문에 혼돈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을 아셨던 주님이 제자들에게 오늘 본문 33절에서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위로의 메시지입니다. 물론 이 메시지는 요한복음 16장 전체를 배경으로 하는 메시지인 것이 분명하지만, 오늘 설교는 외연을 좁혀보려고 합니다. 단지 본문 30-33절만 갖고도 충분히 주님의 메시지를 나눌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아주 선명하게 전하신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내가 세상을 이겼다는 메시지입니다. 여기에 ‘세상’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가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코스모스’입니다. 대체적으로 성경이 말하는 코스모스는 칼 세이건 말했던 코스모스의 과학적 해석의 의미보다 부정적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코스모스는 상징적인 의미로는 무신론적 군중을 의미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모든 인간의 총체를 의미하는 단어로도 사용됩니다. 결국 본문에서 언급된 코스모스는 세속적인 필드 전체를 의미한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주님은 바로 이 세속적인 필드의 총체와의 싸움에서 이겼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아주 조심스럽게 접근하도록 하겠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속해 있는 필드가 어디입니까? 부인하고 싶지만 인정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코스모스입니다. 오늘 우리가 처해 있는 주변을 돌아보면 거의 정신병적인 집단적 광기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필드로 보아도 무리가 아닙니다. 교회가 무엇을 하든지, 그 일이 대사회적으로 긍정적인 일이라고 하더라도 코스모스에 속해 있는 일체의 소속자들은 그 반대편에 서려고하고 또 서 있습니다. 한교총(우리 교회가 속해 있는 기독교 연합체)에서 사랑제일교회 사태를 맞이해서 총체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는 교회가 더 이상 이대로 나가다가는 걷잡을 수 없는 수렁에 빠질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갖고 두 가지를 천명했습니다. ① ‘한국교회가 잘못했습니다. 한국교회가 죄송합니다.’ 운동입니다. ② 전광훈씨를 이단으로 선포하려는 운동입니다. 해서 한교총의 이름으로 이 일들을 위한 실천적인 강령들을 세부적으로 진행했고, 또 진행하려고 했습니다. 헌데 이런 교회의 자구노력에 대하여 코스모스는 대단히 싸늘합니다. 이미 늦었으니 헛수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자정 능력의 차원에서 솔직히 접근하자면 늦은 감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자구의 노력은 교회적인 차원에서도 대단히 많은 것을 양보하고, 국가가 요구하는 시책에 교회가 협력하는 단체이며, 공동체이기에 대국가적으로, 대사회적으로 보폭을 맞추겠다는 대승적 차원에서의 교회의 결단입니다. 그런데도 ‘코스모스’는 이런 교회의 행동에 전혀 호감을 표하지 않고 싸늘한 공격만이 난무한 상태입니다. 왜 이렇게 세속적 필드가 교회에 대하여 호전적일까? 분명히 언급했습니다. 교회의 잘못이 크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은 코스모스는 그 자체가 교회와는 함께 공동의 선을 이룰 수 없는 태생적 한계가 있기 집단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코스모스는 그게 생리이기 때문입니다. 해서 코스모스의 공격이 매우 위험스럽고, 무자비함에 대해 우리는 민감해야 합니다. 또 한 가지 언급할 것은 코스모스의 위력입니다. 지금의 코스모스는 마치 바벨탑을 방불합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고 있고, 조지오웰이 ‘1984’에서 예언한 빅브라더라는 괴력을 갖고 있고, 심지어는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옛 뱀이요, 큰 용과 같기에 아무짝에 쓸모없이 보이고 훅 하고 콧바람 불면 쉬 꺼질 것 같은 나약하기 짝이 없는 교회 정도는 안중에도 없는 것이 사실이기에 교회의 소리를 묵살하는 정도야 식은 죽 먹기입니다. 사정이 이 지경이다 보니 기실, 교회가 운신할 수 있는 폭이 그리 넓어 보이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면 마치 욥기에 등장하는 베레못과 리워야단과 같은 이 무시무시한 코스모스의 무자비함 안에 갇혀 있는 저와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 좋겠는가? 가 오늘 9월 첫 주 메시지의 질문입니다. 오늘 교우들과 두 가지의 레마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래도 1) 믿음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본문 마지막 부분에서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여기에 기록된 ‘이기었다’는 헬라어 단어 ‘네니케카’의 시제가 완료형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영어성경 역시 그래서 일체의 성경에서도 ‘I have overcome the world.’ 라고 완료시제로 번역한 것입니다. 영적인 교훈으로 적용하자면 주님의 승리는 일회적 승리가 아니고, 연속적 승리라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한 번 이기신 것이 아니라, 어제도 주님은 이기셨고, 오늘도 이기고 계시며, 내일도 이기실 것이라는 교훈입니다. 오늘 본문 30-32절을 봅시다.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이 말씀을 잘 묵상하십시다. 무슨 말씀입니까? 주님께서 이제 십자가에 죽으실 때가 임하였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죽음을 앞두고 있는 주님의 심정을 말입니다. 사람이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은 자기가 언제 죽을 지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세상 사람들이 자가의 죽음에 대한 시기를 다 알고 있다면 세상은 천지가 개벽을 하게 될 것입니다. 정말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서야 할 날이 언제인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 인간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행복일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자기의 죽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얼마나 그 고통이 심각했겠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주님이 이런 고통을 이길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주님이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서 세상을 먼저 이기셨고 죽음 이후의 부활을 약속하셨고, 죽음을 통하여 인류 구원의 구속사를 완성할 것이라는 믿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의연하게 받아들이실 수 있었고 십자가의 승리를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아버지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아들이신 예수님에 대하여 절대로 변치 않는 신뢰와 확신과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대단히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주님도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주신 절대적인 믿음으로 고난을 받으셨고, 십자가도 지셨다면 하물며 그 주님을 따라가는 우리들이야 말로 주님이 가지신 이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작금,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 순교적 영성이 필요한 때임을 압니다. 지난 주간, 서울에서 목회하는 친구에게서 간단한 SNS 문자가 도착했습니다. “어제, 폐암 4기 집사가 담임목사가 너무 보고 싶다고 해서 검단에 있는 탑 병원에 오후 7시에 폭우를 뚫고 면회시간 맞춰 갔는데 가족 아니면 안 된단다. 당연한 말이다. 그런데 교회에서 왔다고 하니까 더 더욱 안 된다는 말에 화가 난 것이 아니라 너무 부끄러워 혼났다. 이전에는 담임목사라고 하면 중환자실 면회도 거의 통과였는데. 씁쓸하고 부끄러웠다.” 목사로 살아야 하는 저는 더 더욱 비장한 심정입니다 하지만 이런 코스모스 안에 있지만, 날마다 더 새롭게 다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목회에 필요한 것은, 오늘 신앙생활에 필요한 것은 방법론도 아니요, 프로그램은 더 더욱 아니요, 스킬도 아니고, 믿음이라는 생각에 침잠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이기신 이유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주님을 따르던 주님의 사랑하시던 제자란 애칭을 받았던 요한은 후에 이렇게 자기의 서신서에서 이렇게 밝힐 수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요한일서 5:4절입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주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누가복음 18:8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인자가 다시 올 때에 그처럼 끈질긴 믿음을 이 땅에서 얼마나 찾을 수 있겠느냐?” 오늘, 믿음을 잃지 않는 우리 세인 지체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환난이 올 때 담대해야 합니다. 본문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게 될 것이다.’ 명약관화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이 말씀하신 포커스는 환난이 온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주님이 선언하신 이 메시지의 핵심은 내가 세상을 이겨놓았으니까 담대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번역 성경 중에 헬라어 원문에 가깝게 의역해 놓은 성경이 있는데 우리 말 성경본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런 것들을 말하는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가 이 세상에서는 고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미 이겼다.” 이 번역이 참 위로가 되지 않습니까? 대체적으로 어떤 싸움이든 전쟁이든 불안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불확실성 때문이 아닙니까? 이길지 질지를 모르는 그 불안함 때문이 아닙니까? 그런데 본문에서 주님이 이렇게 제자들에게 권한 것입니다. 너희들은 담대해라 내가 너희들이 당하는 일체의 환난을 이기도록 그 현장에 가서 먼저 싸워 이미 이겨놓았다는 말입니다. 왜 우리가 담대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미 먼저 싸워 이겨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에훗과 삼갈 사사가 죽은 이후 80년 동안 평화를 맛보던 가나안 초기 이스라엘 공동체는 사사기의 역사 순환구조에 따라 또 하나님을 배신합니다. 해서 하나님은 가나안 왕 야빈을 들어 이스라엘을 징계합니다. 야빈은 그의 군대 장관이었던 시스라에게 가나안 지역을 철권 통치할 수 있는 권력을 위임했고, 20년 동안 이스라엘은 식민통치하에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이렇게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죄를 통회하고 구원을 요청합니다.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셔서 여 사사 드보라를 부르셔서 구원의 중재자로 쓰십니다. 헌데 드보라는 가나안과의 전투를 앞두고 혼자 싸우지 않고 동역자 한 명을 세웁니다. 아비노암의 아들이었던 바락이었습니다. 문제는 바락이 드보라에게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통해 구원하신다는 신탁을 받지만 긍정적으로 반응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해서 우유부단하게 미적대는 바락이 드보라에게 내민 카드가 이것이었습니다. 드보라가 앞장을 서면 동참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시스라와의 전투에 나가지 않겠다는 카드였습니다. 결국 드보라의 동참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한 바락은 가나안 야빈의 군대 장관이었던 시스라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 전쟁의 주인공은 바락이 아니라 드보라였습니다. 이 분명한 차이를 보여주는 사사기 기자의 한 보고를 들어보십시다. 사사기 4:7-9절입니다.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의 병거들과 그의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넘겨주리라 하셨느니라 바락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도 가지 아니하겠노라 하니 이르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그러나 네가 이번에 가는 길에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 하고 드보라가 일어나 바락과 함께 게데스로 가니라” 마지못해 가나안 전투에 참여한 바락에게 드보라가 예언한 말씀입니다. 사사기 역사를 통해 우리는 이 싸움의 결과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군사력으로는 절대로 이길 수 없는 가나안 야빈의 군대 장관인 시스라와의 싸움을 이길 수 있도록 주님이 먼저 그 싸움의 현장을 진두지휘하셨고, 그렇게 이미 하나님이 이겨놓으신 전쟁의 현장에 나간 드보라와 바락은 손쉽게 승리하였음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너무나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이 전쟁 승리의 주인공은 드보라였고, 엑스트라는 바락이었다는 점입니다. 같이 전쟁에 나갔는데 누구는 주연이 되고, 누구든 조연이 되게 했습니까?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드보라는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었지만, 바락은 사람인 드보라를 보았다는 차이입니다. 이기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지, 드보라가 아니었다는데도 말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코스모스에서 코스모스에 속한 사람들과의 영적 전투에서 이길 수 있는 것입니까? 주님이 우리가 당한 환난을 이기도록 먼저 이겨주시기 때문에 이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이겨주신다는 믿음을 갖고 담대하게 싸우면 되는 것입니다. 근래 운동을 나가지 못해서 아내와 함께 10,000보 걷기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토요일에 세 식구가 함께 걸었습니다. 반대 편 쪽에서 개를 끌고 나온 한 무리가 보이자 개라면 질색 팔색을 하는 아내가 거리두기를 하고 피했습니다. 그 광경을 본 아들이 웃으며 농을 던졌습니다. “엄마, 개가 생각할 때 엄마가 더 무섭다고 생각할 거예요. 등치 싸움에서 게임이 안 되잖아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었습니다. 우리가 명심할 것은 이미 마음속으로 질 것이라는 생각을 갖는 것은 패배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각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싸우면 지지만 하나님이 이겨주신 싸움이라고 생각하면 그 어느 누구와의 싸움에서도 주눅 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겨주신 싸움이라고 확신하면 담대해 집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결론) 이제 저는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오늘은 보면, 교회가 그로기 상태로 코스모스에게 강펀치를 맞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거의 교회가 다운 직전에 몰려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제가 갖고 있는 믿음은 그래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코스모스를 향한 카운터펀치는 교회를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이 날리실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말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담대하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 ‘달세이테’를 아주 의미 있게 번역한 ‘KJV’의 단어를 보다가 신났습니다. ‘be of good cheer’ 기뻐하라는 뜻이지만 조금 의역해 보았기 때문입니다. “잘했다고 박수치자”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오늘 목양터 이야기마당에 쓴 칼럼의 글처럼 작금은 잘 웃을 수 없는 시기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과 교회가 잘했다고 박수를 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오늘 우리 함께 달려가십시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영원토록 누리게 하려 함이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사랑을 영원토록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축복을 영원토록 누리게 하려 함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