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붙들어야 하는 것들2024-02-28 18:07
작성자 Level 10

2020년 7월 19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후서 열아홉 번째 강해)

 

제목붙들어야 하는 것

본문고린도후서 5:1-5

 

서론)

 

친구 목사 한명이 지난 주간에 외과적 수술을 했습니다.

옆구리와 팔뚝에 흔히 말하는 큰 비계 덩어리가 점차 커지고 있어서 제거하는 수술을 했습니다.

수술을 위해 중보 했는데 옆구리에 있는 덩어리가 깊게 그리고 크게 퍼져 있어서 제거하는데 많이 고생했다는 전언을 받았습니다.

또 한 명의 친구는 몇 달 전응급실 신세를 졌습니다.

곧잘 말하는 이명 증세가 너무 심해 고개를 옆으로 돌릴 수 없을 정도로 어지럼 증세가 심해 응급실에 끌려갔습니다.

진단 결과 달팽이관에 대한 이상 증세가 있는데 다른 치료 방법이 없어 일단 약물 치료를 통해 어지럼 증상을 완화하는 시도를 해보자고 의사가 처방을 내렸는데 특히 스트레스를 받거나 신경 자체를 긴장하게 하는 일을 만들지 말라는 진단을 받고 난처해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스트레스 받지 않고긴장하지 않고 사는 유일한 존재는 공동묘지에 있는 시신들 말고는 없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친구 역시 병원 신세를 졌는데 요통이 너무 심해 더 이상은 참지 못해 병원에서 진료를 받았고디스크 파열이라는 진단을 받고 급히 수술을 받았습니다.

이후 급격히 호전되지 않아 복대를 차고 많이 불편해 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았습니다.

저 역시, 7월 말이나, 8월 초에 안과 치료를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비문증이 조금 더 심해져서 활동에 불편함이 있기에 일단은 진단을 받아야 할 것 같고처방에 따라서 안과적인 시술을 받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교우들의 중보를 부탁드립니다.

지금 말씀드린 제 친구들은 공히 1961년생 들입니다.

그러니까 금년 우리나라 나이로 육순을 맞이한 친구들입니다.

몇 달 전넷이 모여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허리 수술을 한 친구가 이렇게 자조 섞인 한 마디를 던졌습니다.

차를 육십년 탔다고 생각해 보자폐차를 했어도 몇 번을 했을 텐데우리가 육십년을 살았으니 고장이 나는 게 정상이다그러니 스트레스 받지 말고 고장 날 때마다 수리하며 살자그러다가 정녕 못 고칠 때가 되면 폐차시키고 하나님께 가자.”

듣다가 친구들이 같이 웃었지만많이 생각하게 하는 친구의 말이었습니다.

기막힌 정답이지 않습니까?

시편 90:1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모세의 시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시에서 시인은 분명히 우리 인간 육체는 한시적만 이 땅에서 머물게 되는 존재임을 분명히 합니다.

잘 살면 70더 잘 살면 80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이상은 시인이 말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에노스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반드시 죽는 존재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 바울이 말한 단어로 대신한다면 우리 인간은 땅에 있는 우리들의 장막 집이 무너질 때가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본론)

 

본문 1절 전반절을 읽겠습니다.

만일 땅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저는 바울의 이 표현이 대단히 리얼한 표현이라고 해석하기에 주저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인용한 장막’ 이라는 단어 때문입니다.

헬라어 단어 스케노스’ 의 번역인데 이 단어는 임시 막사와 같은 허술한 가건물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왜 바울이 이 스케노스라는 단어를 본문에서 인용했을까요?

바울의 직업이 바로 이 스케노스를 만드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8:3)

바울이 이 단어를 왜 본문에서 썼을까요?

바울의 의도가 무엇일까요?

 

1) 썩을 것을 붙들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단어로 다시 제시합니다.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을 붙들지 말라는 말입니다.

왜 붙들지 말아야 합니까?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제가 왜 이런 근거를 제시할까요?

우리가 보고 있는 한글 성경 본문 1절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은 단어 하나가 헬라어 원문에는 기록되어 있는데 바로 그것을 근거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종속접속사 가르’ 즉 왜냐하면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를 삽입하여 고린도후서 4:16-5:1절을 해석하면 이런 해석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겉 사람은 낡아지고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진다우리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왜냐하면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질 날이 오기 때문이다.”

즉 반드시 썩어지는 것들(무너지는 장막)을 붙들지 말라는 교훈이 담겨 있다는 말입니다.

구약성경의 기록된 글을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서의 담화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레갑 족속의 집으로 가서 그들을 여호와의 집에 있는 한 방으로 초청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명령의 이유가 대단히 난처한 이유였습니다.

그들을 데리고 와서 술을 먹이라는 명령이었습니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명령을 받든 예레미야는 레갑 사람들을 익다랴의 아들 하난이 거주하고 있던 성전의 방으로 초청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레갑 사람들에게 포도주와 각종 술을 권하며 마시라고 종용하기에 이릅니다.

그러자 레갑 사람들이 단호하게 거절을 합니다.

그 이유가 예레미야 35: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집도 짓지 말며 파종도 하지 말며 포도원을 소유하지도 말고 너희는 평생 동안 장막에 살아라 그리하면 너희가 머물러 사는 땅에서 너희 생명이 길리라 하였으므로

여기에 기록된 장막이라는 히브리어 오헬인데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성경인 70인 역에서 이 단어를 스케노스라고 번역했습니다.

오늘 설교와 관련하여 대단히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구절에 대한 부연 설명을 하겠습니다.

레갑 자손들이 예레미야가 제의한 술을 먹지 않겠다는 이유를 이렇게 달았습니다.

우리들의 조상 요나답이 우리들 후손에 이렇게 명령했다는 것입니다.

집을 짓고 살지 말라파종도 하지 말라포도원을 소유하지 말라그리고 주목할 것장막에서 살아야 한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리하면 너희가 머물러 사는 땅에서 너희 생명이 길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추적할 때레갑의 선조 요나답이 후손에게 준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이 땅에서 만들어 놓은 일체의 것들은 반드시 썩을 것이고무너질 것이기에 그것들에 혈안이 되어 살지 말라는 교훈이었습니다.

선조께서 이렇게 가르쳤기 때문에 우리는 진짜로 그런 삶을 살고 있어서 당신이 제의한 술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술뿐만이 아니라 집을 짓지 않고 장막에 거주하며 산다는 충격적인 메시지를 예레미야에게 전한 것입니다.

이렇듯 구약에서도신약에서도 장막은 대단히 중요한 영적 언어입니다.
무엇을 오늘 우리에게 시사합니까?

잠시 후에 사라질 것들에 대하여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겉 사람의 모습을 붙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에 혈안이 되어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 교우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기실오늘 주일을 맞이하여 일회적으로 전하는 메시지가 아닙니다.

목회의 여정 중에 수없이수차례 전하는 것입니다.

이유는 어찌 보면 간단합니다.

성경의 주된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메시지를 전할 때마다 제 뇌리에 떠오르는 인물이 하나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불교의 거목이었던 법정 스님입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법정이 쓴 무소유라는 책을 본 뒤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법정의 무소유만큼은 소유하고 싶다.”

저 역시 아주 오래 전법정이 쓴 무소유를 읽으면서 불교의 대표적인 이판승인 법정의 글에 매료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무소유에 이런 글이 담겨 있습니다.

비가 올 듯한 무더운 날에는 돌담 밖에 있는 정랑(淨廊)- 변소에서 역겨움 냄새가 풍겨 왔다그런 때는 내 몸 안에도 있지 않느냐사람의 양심이 썩는 냄새보다는 그래도 낫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하면 아무렇지도 않았다.” (법정, “무소유”, 범우사,p,68,2010)

저는 이 글을 읽다가 불교계를 정치적으로 말아먹고 있는 사판승들의 난장판 중에도 불교가 건재할 수 있는 이유가 어렴풋하게 느껴져 부럽기 그지없었습니다.

법정과 같은 이판승들이 목숨 걸고 지키고 있는 불교적 영성의 가치가 얼마나 높은지를 타종교의 성직자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진짜로 썩어질 것이 무엇이고썩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불교계 거목의 영성 때문에 말입니다.

야고보서를 기록한 기자의 말을 들어 보십시다.

4:13-14절을 읽어드립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이 구절을 읽다보면 그러면 일하지 말고 살라는 것이냐고 발끈하는 성도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말씀드립니다.

야고보기자가 말한 것 역시 일하는 삶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내 생명(조에즉 영적으로 완전한 생명)을 좀 먹는 일체의 일에 천착하지 말라는 메시지입니다.

일 년 정도의 가치에 목숨 걸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다는 야고보의 외침은 큰 울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목숨 걸지 말아야 할 내용을 가장 원시적으로 표현한 구절이 있다면 분명 창세기 3:6절일 것입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먹음직(육신의 정욕), 보암직(안목의 정욕),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이생의 자랑것에 붙들려 있다면 그것은 정말로 재앙일 것입니다.

사람의 양심과 육체가 썩어가도록 하는 일에 붙들려 살면서도 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떠벌이고 있다면 그것은 논할 가치가 없는 자기착각입니다.

본문 3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많은 신약학자들이 논쟁하고 있는 이 본문의 단어는 벗은 자입니다.

논쟁의 내용이 너무 많아 벗은 자가 누구인지에 대하여 학문적으로 밝히는 것은 여러분에게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기에 논하지 않고 그냥 가장 많이 해석되는 본문에 국한하여 전하겠습니다.

벗은 자는 이 땅에서의 장막이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산 자들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썩을 것을 붙들고 산 자들입니다.

육신의 정욕안목의 정욕이생의 자랑에만 몰두하며 산 자들입니다.

이들은 그 날이 되면 벗은 자의 모습으로 주님께 서야 하는 치욕을 감수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경계하였기에 본문 4절에서 이렇게 역설합니다.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기막힌 통찰입니다.

벗지 말고 입어야 한다는 바울의 직설은 오늘 우리 세인 교회 교우들에게 아주 나이브하게 다가오는 감동입니다.

그렇다면 입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메시지일까요?

두 번째의 교훈에 도착했습니다.

 

2) 썩지 않는 것을 붙들고 살라는 권면입니다.

 

다시 1절을 봅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예비해 놓으신 하늘에 있는 집을 앙망하고 살아야 함을 바울은 역설합니다.

주목할 것은 땅에 있는 처소를 장막이라고 바울이 표현했지만 하늘에 예비 되어 있는 처소는 집이라고 표현한 점입니다.

헬라어 오이키아는 임시방편의 가건물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라 오래도록 영주하는 완벽한 건물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우리들이 붙들어야 하는 것은 오이키아입니다.

영원한 집무너지지 않는 집말입니다.

이 집을 사모하는 자는 결코 썩는 것을 붙들지 않을 것이 자명합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구절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사도행전 18:5절을 읽습니다.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우리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고린도 사역을 증언하고 있는 사도행전의 증언입니다.

너무나 힘들고 외로웠던 고린도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바울의 원동력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감동의 메시지입니다.

죽을 수 있었던 환경 고린도에서 그 죽음을 앞당기게 한 불온하기 그지없는 메시지를 바울은 거침없이 전했다고 누가가 역설합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였다.”

밝히’(solemnly) 라는 단어에서 저는 전율하는 감동을 느낍니다.

바울이 주저하지 않고 엄숙하고 근엄하게 유대인들에게 전한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죽기를 각오한 메시지라는 점이 저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바울이 어떻게 이렇게 엄청난 담대함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전슬한 구절 5절의 또 다른 한 문장에 그 답을 명쾌하게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필립 얀시가 쓴 산문에서 그가 이렇게 해석한 것을 기억합니다.

“under the control of the Word.” (말씀 밑으로 들어가 통제를 받음으로)

영어성경 BBE는 이렇게 이 부분을 번역했습니다.

Paul was completely given up to the word.(바울이 말씀에 완전히 항복했다. 항복당했다.)

어떤 선택을 하든지 감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말씀에 완전히 항복을 하든지말씀 밑으로 들어가 통제를 받든지 공통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둘 다썩지 않을 것을 붙들고 사는 자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 5:12절을 마지막으로 읽습니다.

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

이 성경구절의 의미심장함을 오늘 주일에 새기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말씀이라는 만나가 지속해서 내리는 은혜의 시기입니다.

다시 말해 썩지 않을 것이 내리고 있는 시대를 지나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때가 되면 말씀의 만나가 그칠 날이 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막는 자를 이주시키는 그 때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6-7절을 봅니다.

너희는 지금 그로 하여금 그의 때에 나타나게 하려 하여 막는 것이 있는 것을 아나니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은 그것을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겨질 때까지 하리라

막는 자는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들로 하여금 벗는 자가 아닌 옷을 입은 자로 덧입게 하시는 보혜사가 있음을 본문 마지막 5절에서 언급하고 있음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썩지 않게 하시는 역할을 해 주십니다.

우리들로 하여금 옷을 입게 하십니다.

그래서 지금 저와 여러분은 불완전한 것이 다반사이지만 성령을 의지하면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명심하십시오.

썩지 않을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 사는 것도 성령 하나님이 이주하시기 전까지입니다.

그러므로 세월을 아끼라는 바울의 권면의 비장함을 알아야 하고(에베소서 5:15), 시대를 분별하여 은혜를 지금 받으라(고후 6:2)는 메시지에 침잠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미국 영적 부흥의 초석을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가 이렇게 설교에서 선포했습니다.

즐거움이 광선이라면하나님은 태양이다즐거움이 그림자라면하나님의 사랑은 실체다즐거움이 시내라면하나님은 바다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썩는 것과 썩지 않는 것을 비교하는 것은 시작부터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썩지 않을 것과 그 외의 것을 비교하는 것은 사실상 출발이 잘못 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합니다.

개혁신학자 존 파이퍼 목사의 일성이 그래서 크게 들려 설교를 맺으며 읽어 드립니다.

여기에는 다함이 없다세상이 주는 것보다하나님이 더 낫고 더 영원하다비교할 수 없다언제나 하나님은 이기신다.”

썩지 않을 것을 붙들고 살아가는 세인 지체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찬송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저 멀리 뵈는 나의 시온성 오 거룩한 곳 아버지 집

내 사모하는 집에 가고자 한밤을 새웠네

저 망망한 바다 위에 이 몸이 상할지라도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 곳 주 복음전하리

 

아득한 나의 갈길 다가고 저 동산에서 편히 쉴 때

내 고생하는 모든 일들을 주께서 아시리

빈들이나 사막에서 이 몸이 곤할지라도

오 내 주 예수 날 사랑하사 날 지켜주시리

오 내 주 예수 날 사랑하사 날 지켜주시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