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당신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3)
본문: 고린도후서 4:16-18
서론)
인도를 복음으로 사랑했던 스탠리 존스 선교사에게 유대인 여성 방송인이 이렇게 질문을 던졌답니다.
“당신은 세계에 무엇을 전하려고 합니까? 당신은 세계를 돌아다니며 설교를 하고 계신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없는 것 중에 당신에게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러자 스탠리 존스 선교사가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나는 그리스도 예수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스탠리 존스, “순례자의 노래”, 복 있는 사람,p,183.)
제가 아주 빈번하게 인용하며 소개하는 뉴욕 리디머 커뮤니티 담임목사였던 팀 켈러 목사가 췌장암 투병 중입니다.
그는 본인이 췌장암에 걸렸다는 것을 알고 지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중보를 요청했습니다.
첫 번째, 하나님께서 의학적 수단이나 직접적인 개입을 통해 암을 치료하시고 점차 소멸될 수 있도록.
두 번째, 그와 사모가 이 세상의 기쁨에서 멀어지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임재를 바라고 원하기 위해 이 기회를 사용할 수 있도록.
세 번째, 가족의 평안과 위로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네 번째 기도제목은 치료 과정 중 부작용이 있더라도 글쓰기와 강연을 계속할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고.
그러면서 그는 성경을 한 구절을 인용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 12:1-2)
이 성경 말씀을 언급한 팀 켈러는 이렇게 중보 요청 글을 마무리했습니다.
“예수께서 저를 위해 기쁨으로 십자가를 참으신 것처럼 기쁨으로 우리 앞에 당한 경주에 임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무엇이 떠오릅니까?
가장 먼저 어떤 말을 입에서 내뱉습니까?
그 말과 그 떠오름이 오늘의 당신의 정체성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당신이 가장 잘 알 것입니다.
그러면 묻겠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
본론)
오늘은 바울이 고린도교회 지체들에게 고변(考變)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에 대한 4,5번째 내용의 답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5) 껍데기 신앙을 벗어내는 자입니다.
본문 16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지금 이 본문을 바울이 기록한 배경은 사도권에 대하여 집요하게 시비를 걸고 트집을 잡는 반대자들에 대한 사도권 변호가 배경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에게 취약했던 추천서를 빌미 삼아 바울을 공격하는 자들을 향한 방어적인 성격이 농후한 메시지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향하여 이렇게 선전포고합니다.
겉 사람은 낡아진다고. 그러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진다고.
이곳에 기록한 ‘낡아지다’라는 의미의 헬라어 단어 ‘디아프쎄이로’는 여러 영어성경의 버전에는 ‘닳아 없어지다.’(wast away)라고 번역했습니다.
바울은 우리들이 갖추고 있는 외형적인 것들은 반드시 낡고, 닳아 없어진다고 말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의 첫 번째 서신에서 핍박을 받고 있는 마케도냐 지역의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면서 했던 말이 생각나게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베드로전서 1:24)
우리들의 육체가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외형이 그렇습니다.
아무리 견고한 틀을 갖추었고, 튼튼한 구조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나를 포장한 외형적인 껍데기라면 반드시 닳아 없어진다고 바울은 경고한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너무 피상적인 것 같아 조금은 피부에 와 닿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합니다.
고 옥한흠 목사의 큰아들로 더 잘 알려진 옥성호 집사가 쓴 ‘갑각류 크리스천 레드 편’을 보다가 목사인 나 역시 너무나 공감했던 글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손에 성경을 들고 다니지만, 갑각류 크리스천들에게 정작 중요한 것은 말씀의 ‘의미’(meaning)가 아니라 말씀의 ‘효과’(effect)다.” (옥성호, “갑각류 크리스천”, 도서출판 테리토스,p,9)
정말로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드는 기막힌 성찰입니다.
한국교회가 이렇게 엄청난 부흥을 하게 된 이유를 추출해 본다면 단순히 한 가지로 말할 수 없는 여러 가지의 요소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제 선배 목사님들이 헌신적으로 뿌린 노고와 희생이라는 씨앗의 결과를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부흥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성경이 말하는 신학적인 의미가 가차 없이 효과제일주의에 의해 묵살된 아픔이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한국교회가 이렇게 내려앉게 된 또 한편의 다른 추한 몰골이자 치명타였습니다.
예건대 이런 것입니다.
교회가 부흥하고, 성도가 잘 살면 된다는 이유로 삼박자 축복이 성서적, 신학적인 치명적인 오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는 무시되고 효과만 부각된 경우입니다.
이 일로 인해 본회퍼의 말대로 복음을 싸구려로 전락시키는데 일익을 제공한 것이 바로 삼박자 축복입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비신학적, 비성서적 엇박자 내기가 어디 삼박자 축복뿐이겠습니까?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은 불난 집에 부채질을 했습니다.
조엘 오스틴은 한국교회가 건강한 교회로 성장하는 것을 막아버린 최대의 원흉입니다.
그의 책에 아무 것도 모르고 열광하던 자들은 불편한 복음을 들으면 조금도 못 이겨 하는 못된 버릇들이 생겼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진리를 1도 모르는 자가 쓴 책으로 인해 복음의 진정성, 그리고 십자가의 도가 폐기처분되는 아찔한 상황에 한국교회가 직면하는 위기일발의 때가 있었습니다.
거의 같은 맥인 기형적 번영신학도 껍데기 신앙으로 교회를 타각시키는 공범 중의 공범입니다.
정말로 놀란 기사를 지난주에 국민일보 신문에서 보았습니다.
삼박자 축복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은 모 교회의 담임목사가 신문에 등장하여 이런 멘트를 했습니다.
“예수 잘 믿으면 부자 된다고 말하는 것은 사기다. 부자가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말씀하신 삶을 살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너무 놀라 다른 사람인가하고 눈을 크게 뜨고 다시 그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개과천선을 한 것인지, 아니면 신문이니까 여론 플레이를 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현역 시절에는 그토록 예수 믿으면 부자가 된다고 말했던 그가 이렇게 말한 기사를 보니 적응이 잘 안 되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존 맥아더의 걸작인 ‘무질서한 은사주의“ 보면 그가 했던 정말로 중요한 교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은사주의자들의 가장 치명적인 실수는 개인의 경험을 성경보다 위에 자리에 놓고 있다는 점이다.” (존 맥아더, “무질서한 은사주의”,부흥과 개혁사, p,26.)
그도 그럴 것이 한국에서 재림 예수라고 자칭하는 자들 약 30여 명의 공통점을 이단연구소에서 조사한 발표가 있었는데 모두가 신비한 체험을 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문제는 신앙인에게 얼마든지 가능한 신비한 영적 체험 이후에 그들은 성경을 버렸다는 점입니다.
재앙이 임한 자들이요, 저주받은 인생들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은사제일주의자들은 신앙을 빌미로 자기의 삶을 위장하는 껍데기 신앙인이라는 것을 지금 저는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들이 한때 한국교회를 잠식했습니까?
성경이 주는 의미에 대하여 철저히 외면 무시한 반면, 효과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효과를 주목하는 종교인들은 주군이신 하나님에 대하여는 전혀 관심이 없는 자들입니다.
다만 본인의 위치, 자리, 계급, 눈에 보이는 혜택, 이득에 눈이 먼 자들입니다.
성경을 꿩 잡는 게 매라는 식으로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기막힌 행태의 비극적 결말은 신자들이 껍데기와 같은 비본질적인 내용들을 마치 복음처럼 받아들였다는 데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말한 말씀으로 적용한다면 겉모습이 진짜의 모습이라고 여겨 그것을 주저 없이 붙들었다는 점에 그 심각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아모스 7장을 보면 그 유명한 흉 예언자 아모스와 길 예언자 아마샤의 한판 승부가 드라마틱하게 벌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로보암 2세의 북쪽 이스라엘의 영적 황폐함이 더 이상 묵과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른 것을 아시고 너무 급한 나머지 남쪽 드고아의 농부 출신인 아모스를 예언자로 부르셔서 북쪽으로 파송하여 활동하게 하셨습니다.
아모스는 북쪽의 패역함을 엄히 경고하고 흉 예언을 거침없이 쏟아내게 하셨습니다.
이런 예언이 당시 패역의 장본인이었던 여로보암 2세를 불편하게 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더 불편해 했던 인물은 당시 벧엘의 궁정 예언자, 다시 말해 관변 예언자인 아마샤를 비롯하여 상당수 많은 예언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유감스럽게도 하나님의 예언의 소리가 끊어진 전형적인 껍데기 거짓 예언자들이었습니다.
직업 예언자들이었다는 말입니다.
이들은 아모스가 적지 않게 불편했고, 눈엣 가시였을 것입니다.
더 이상 아모스를 내버려두었다가는 자신들의 편안하고 안락한 자리가 위태로울 것이라는 긴장감과 두려움 때문에 그 거짓 선지자들의 수장 격이었던 아마샤가 아모스에게 한판 대결을 벌입니다.
제일 먼저 아마샤가 한 일은 아모스를 반역자로 모함하여 여로보암 2세에게 고발한 일입니다.(아모스 7:10)
그런 뒤에 막강한 국가 권력을 배경으로 한 아마샤는 아모스에게 다음과 같은 선전포고를 합니다.
아모스 7:12-1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아마샤가 또 아모스에게 이르되 선견자야 너는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가서 거기에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에서나 예언하고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 이는 왕의 성소요 나라의 궁궐임이니라”
이 구절을 자세히 보면 아마샤가 목을 걸었던 아주 의미 있는 효과가 보입니다.
아마샤가 보고 있는 것은 땅(유다 땅으로 도망하라)이었습니다.
아마샤가 보고 있던 것은 떡이었습니다.
아마샤가 보고 있었던 것은 왕의 성소와 궁궐이었습니다.
종합하면 무엇입니까?
아마샤에게 유익이 되는 효과들입니다.
반면 아모스가 보았던 의미를 살피겠습니다.
이렇게 선전포고를 받은 아모스가 어떻게 아마샤에게 대응합니까?
이어지는 아모스 7:14-1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 양 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 이제 너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니라 네가 이르기를 이스라엘에 대하여 예언하지 말며 이삭의 집을 향하여 경고하지 말라 하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네 아내는 성읍 가운데서 창녀가 될 것이요 네 자녀들은 칼에 엎드러지며 네 땅은 측량하여 나누어질 것이며 너는 더러운 땅에서 죽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반드시 사로잡혀 그의 땅에서 떠나리라 하셨느니라”
아모스가 붙든 것은 여호와의 말씀이었습니다.
껍데기가 아닌 영적 본질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누구입니까?
땅, 떡, 왕의 궁궐이라는 껍데기는 반드시 낡아 없어지는 것이기에 거기에 천착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아니라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본질인 말씀을 붙드는 자들입니다.
내가 나를 포장하기 위하여 덮어쓴 껍데기를 벗어버리지 않는 한 나는 그리스도인 아니며 그리스도인이 될 수도 없습니다.
착각은 자유지만 그 착각은 정답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때가 되면 반드시 사라져버리는 껍데기 신앙을 과감하게 벗어버리는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나는 세인 지체들이 이런 정체성이 분명한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6) 미시적 신앙인이 아니라 거시적 신앙인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본문 17-18절을 읽겠습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바울은 본문에서 미시적 신앙과 거시적 신앙을 아주 선명하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미시적인 신앙은 잠시 받는 환란의 가벼움에 놀라는 신앙이고, 보이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는 신앙임을 지적합니다.
반면 거시적 신앙은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이 위대함을 믿는 신앙이며, 더불어 보이지 않는 것에 더 민감하게 천착하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제가 가끔 쓰는 단어 중에 천박(淺薄)함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淺(’가벼울 천)과 ‘薄’(엷을 박)의 합성어입니다.
다시 말해 가볍고 깊지 않은 상태를 천박함이라고 표현합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깊이와 넓이와 높이가 비신자들에게 넘사벽이 되어야 하는 수준까지 자라 있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울이 에베소교회에 편지하는 글에서 무엇이라고 역설했습니까?
에베소서 3:18-19절을 읽어드립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이런 자가 그리스도인이니 신앙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가 비신자들에게 넘사벽이 되어야 하는 것은 너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영원하신 생명의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눈에 보이는 이익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자 가볍고 엷은 신자가 어찌 그리스도인일 수 있습니까?
너희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지만 담대해라 내가 세상을 먼저 이겨놓았다는 주군의 말씀을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인들인데 잠시 나에게 임한 환란 때문에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설레발을 쳐서야 되겠습니까?
아들이 우리 교회에 부교역자로 내려와서 몇 개월을 경험한 뒤에 아주 진지하게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성향이 정말로 보수 중의 보수라고.”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아들이 공부하는 학교는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거의 대부분의 교수들이 시쳇말로 빨간색으로 물든 자들이 즐비하니 제게 그렇게 말할 만합니다.
하지만 저는 색깔이 이렇습니다.
제 목회적인 성향은 아들의 말대로 철저하게 보수적입니다.
친구 목사들이 사석에서 제게 이런 농을 던질 때가 많습니다.
“이강덕 목사가 목회를 하는 내용을 보면 도무지 해석이 안 된다고. 사상이 전혀 보수적이지 않은데 어떻게 저렇게 철저하게 보수적인 목회를 하는지 모르겠다.”고.
그러나 저의 신학적 성향은 진보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포장하지 않는 솔직한 표현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저는 신학적으로 진보적 성향을 갖고 있는 자들이 초지일관으로 주장하는 이미 온 하나님의 나라와 갈릴리에서 가난한 자들과 함께 살았던 역사적 예수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지지하는 편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진보주의 신학에세 말하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앎이 없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삶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때문입니다.
갈릴리에서 있는 자들, 기득권주의자들에게 핍박을 받았던 힘없는 자들을 위해 사셨던 갈릴리 예수를 알지 못하고, 접근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운운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 이 땅에 살면서 제자도를 실천하며 삶에 진한 예수의 향기를 발하기 위해서는 이미 온 하나님의 나라에서 낮은 자들과 함께 하는 이타주의적인 삶의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는 지극히 정상적인 논리에 적극적으로 동의합니다.
문제는 이렇게 삶의 내용에 대한 진솔함에 비해 진보주의자들은 대단히 위험스러운 비 신앙적인 요소가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대단히 치명적인 오류이자 위험 요소입니다.
갈릴리 예수의 반대편에 계셨던 또 하나의 주군의 본질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진보주의자들이 억! 하고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하는 선언을 하나 하겠습니다.
주군이신 예수님은 갈릴리에 있는 민중과 함께 사셨지만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 주이십니다.
설교를 듣고 있는 여러분은 잘 모르겠지만 제가 이렇게 표현하면 진보주의자들은 저에게 회색주의자라고 벌 떼처럼 공격합니다.
어디에서 걸렸는가 하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과 그리스도 예수에서 걸렸습니다.
갈릴리 예수는 역사적 예수로서 혁명가였지 그리스도 예수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그들의 오기에 저는 이미 자격미달입니다.
그러나 저는 아무리 그래도 그들의 이런 주장에 대하여 단호하게 반대합니다.
만에 하나, 예수가 혁명가에 지나지 않았다면 나는 결코 예수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은 물론, 목사는 더 더욱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의 신학적 기반이 되는 존 웨슬리 신학입니다.
신학자이자 목회자이고 설교자였던 웨슬리는 1738년 5월 24일, 영국의 올더스케이트라는 조그마한 농촌에서 열린 모라비안 교도들의 집회에 우연히 참석했는데 그곳에서 그 누군가가 읽는 로마서 서문을 듣는 순간 마음이 뜨거워지는(WARMED) 경험을 했고 그 이후, 그는 첫 번째 회심을 경험함으로서 엄청난 주의 사역을 감당한 전도자로 변화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철저한 그리스도인의 완전 즉 성결을 주장하며 영국을 변화시크는 주인공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매일반으로 저 역시 1981년 8월의 여름 어느 날, 섬기던 고향 교회 지하기도실에서 히브리서 9장을 읽다가 웨슬리의 그 뜨거움을 경험했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신하는 거듭남을 경험한 뒤에 목사까지 되었습니다.
1738년에 웨슬리 찾아오신 분, 1981년에 이강덕 목사를 찾아오신 분은 혁명가 예수가 아니었습니다.
그 분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 주이셨던 예수였습니다.
이렇게 나를 찾아오신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나에게 역사하셨지, 역사적인 인물이자 혁명가인 예수로 나에게 역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나의 주가 되신 이후 저에게 줄곧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롬 8:18)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딤후 4:7-8)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벧전 1:6-7)
그리고 오늘 그 분은 저에게 또 여전히 본문 17-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신앙인은 미시적인 천박함을 갖고 사는 자가 아닙니다.
신앙인은 주님을 향한 거시적인 깊음과 높음과 넓음의 믿음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나는 주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며 삽니다.
나는 주군이 다시 오셔서 만드실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삽니다.
이렇게 사는 자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사는 자입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독일출신의 사상가이자 철학자인 피히테(Johann Gottieb Fichte)가 있습니다.
저는 근래 국가가 교회에 강제하는 일련의 일들을 보면서 아주 빈번하게 피히테의 망령이 떠오르는 것 같아 섬뜩섬뜩하기까지 합니다.
제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눈과 귀가 완전히 멀었던 철저한 군사독재시절이었습니다.
국민교육헌장을 지금 되 뇌이면 피히테의 ‘독일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선동문이 떠오릅니다.
고등학교 때는 몰랐습니다.
피히테가 얼마나 인간의 인권과 자유를 말살한 전체주의자였는지를.
피히테가 국가를 신으로 떠받드는 애국자였고, 게르만 민족 우월 숭배자였는지를.
그의 이런 게르만 우월주의 사상이 결국은 제 1,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원인을 제공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피히테는 이 땅에 태어나서는 안 될 가롯 유다 같은 존재였습니다.
왜 설교의 말미에 이 사람을 역사의 무대로 다시 끄집어냈을까요?
국가주의, 전체주의, 게르만 민족 우월주의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었던 그는 부정적이지만 독일을 위해 그 무언가를 행한 자로 기억에 남아 있다는 것을 복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독일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흑암을 몰고 온 선동가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주지하며 가다듬어 보십시다.
사탄적인 사상의 정체성을 갖고 있는 자도 뭔가 큰일을 저지르며, 부정적이지만 어찌하든 역사의 획을 긋는 일까지도 행하지 않았습니까?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그렇다면 여러분과 제가 지난 3주 동안 살펴본 대로 철저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산다면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통해 위대한 일을 시행하시지 않겠습니까?
한 줌도 안 되는 비 신앙적 껍데기를 벗어 버리십시다.
영원한 생명과 나라를 주시는 주군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잡히는 영적인 거시의 안목을 갖고 사십시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용하셔서 위대한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이 땅의 황무함을 보소서
하늘의 하나님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우리의 죄악 용서하소서 이 땅 고쳐 주소서
이제 우리 모두 하나 되어
이 땅의 무너진 기초를 다시 쌓을
우리의 우상들을 태우실 성령의 불 임하소서
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
진리의 말씀 이 땅 새롭게 하소서
은혜의 강물 흐르게 하소서
성령의 바람 이제 불어와
오, 주의 영광 가득한 새 날 주소서
오, 주님 나라 이 땅에 임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