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당신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1)2024-02-28 18:06
작성자 Level 10

2020년 6월 28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후서 열여섯 번째 강해)


제목: 당신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1)
본문: 고린도후서 4:7-12


서론)


김기석 목사가 쓴 “욕망의 페르소나”에 이런 글이 실려 있습니다.
“복음의 권위가 손상되는 것은 교회가 가난해서가 아니다. 유력자가 없어서도 아니다. 예수의 정신을 꼭 붙들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가 풍요를 지향하는 순간 예수 정신에서 멀어지게 마련이다. 십자가 신학이 아닌 영광의 신학에 취할 때 복음의 능력은 사라진다.” (p,170)
언젠가 까마득한 신학교 후배들이 김 목사를 찾아왔다고 합니다.
인지도가 높아지고,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목사로 알려지다 보니 뭔가 선배에게서 건져 갈 것이 있을까를 염두하고 찾아온 후배들이 김 목사에게 질문한 내용은 약간 방향을 틀었지만 이것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큰 교회에서 목회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목회에 성공할 수 있습니까?”
김 목사는 후배들의 이 질문을 받고 무언가를 대답해야 한다는 부담감보다 더 큰 아픔은 이들이 이런 마음을 갖고 목회를 한다는 절망감이었다고 소회를 밝혔던 글을 저 역시 공감하며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덧붙여 그들이 무서웠다고 전언해 주었습니다.
베이직 교회를 담임하는 조정민 목사는 ‘WHY JESUS’의 끝부분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콘스탄티우스 황제 이후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기독교 급속히 타락했습니다. 그래서 로마 가톨릭이라는 괴물을 탄생시켰습니다.” (p,294)
마가복음 10:35절 이하를 보면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주님께 나아가서 주님이 영광의 나라에 임하게 될 때 우리 형제를 우청용좌백호로 삼아줄 것을 청탁하는 어처구니없는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분명히 이들이 행위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로서 극히 유감스러운 행동이었고 신앙의 기본도 안 된 자의 모습입니다.
헌데 오십보백보의 주인공들이 이 기사에 함께 실려 있습니다.
마가복음 10:41절입니다.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이 기사가 마가복음 10장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상정할 때, 이 말도 안 되는 제자들의 행태가 시빗거리로 무대에 등장한 시기는 공생애 3년째 즈음으로 가늠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제자들 모두가 이미 주군이 주신 은혜를 다 받았고, 보았을 기적 다 보았으며, 들을 수 있었던 가르침을 다 들었던 때였다는 점은 가히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게 훈련의 극점을 경험한 제자들이 갖고 있었던 생각이 제자도가 아닌 권력욕이었습니다.
이 기막힌 성경의 텍스트는 마치 오늘 21세기 현장에서 치열하게 경쟁적 구도에서 살아남기 위해 제자도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떻게 하든 성공해야 하며, 부흥해야 한다는 번영신학에 물들어져 있는 교회와 목사 그리고 성도들을 향하여 반면교사를 삼으라고 던지는 영적 비수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공통점이 보입니다.
주님을 따른다고 말을 하지만 진정한 제자도의 의미를 모르는 자, 그리고 별로 관심이 없는 자들의 일구월심의 목적은 크게 되는 것, 성공하는 것, 번영하는 것 등으로 귀결된다는 점입니다.
그 이하를 절대로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마치 이런 종류의 메시지를 들으면 포장해서 이해하는 것처럼 행동할지는 모르겠지만 앞에서 언급한 크게 됨, 성공, 번영이라는 유혹의 함수에서 벗어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려는 것이 세속적 가치에 함몰된 종교인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자신들의 갑각류적인 정체를 숨기고 있는 것뿐이지 전혀 그리스도와는 상관없는 아류의 종교인 그 자체인 셈입니다.
반면 오늘 본문에 들어가 보면 진짜 은혜를 사모하며, 진짜 예수를 따라는 자의 제자도가 무엇이며, 진짜 그리스도인이라는 존재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보란 듯이 알려주는 바울을 만나게 됩니다.


본론)


오늘 본문 구절구절은 너무 큰 영적 감동을 줍니다.
우리에게 너무 익숙히 알려진 본문 7절을 먼저 읽겠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말하고 있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하는 대단히 중요한 정체성이 먼저 이 구절에서 소개됩니다.


1) 그리스도인은 질그릇에 담긴 보배라는 정체성입니다.


바울이 제시한 그리스도인을 비유한 ‘보배’를 먼저 해석하겠습니다.
본문에서 비유어로 제시된 ‘보배’가 의미하는 것은 앞에서 피력한 바울의 언급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지칭어는 4절에서 바울이 언급한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 혹은 6절에서 언급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에 속한 자입니다.
이렇게 해석할 때 ‘보배’라는 단어의 의미는 바울이 언급한 대단히 중요한 영적 가치입니다.
왜요?
그 가치는 지난 주일에 설교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주이심을 확신하는 성도의 가치이기 때문이고, 그 예수의 노예 즉 종 되기를 선언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성도의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대단한 가치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전제한 아이러니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이렇게 가치가 있는 보배라면 그 보배를 담은 그릇은 금으로 만든 그릇이든 아니면 양보하여 은으로 만든 그릇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본문에서 이 보배가 담긴 그릇을 아주 값싼 질그릇이라는 묘사한 점은 주목해야 하는 대목입니다.
다시 말해 아주 보잘 것이 없는 도구라는 점입니다.
본문에 기록된 ‘오스트라키노이스 스큐에신’ 즉 ‘질그릇’을 직역하면 ‘흙으로 만든 토기 항아리’, 혹은 등잔’ 등을 의미합니다.
주후 1세기에는 흙으로 만든 그릇들은 서민들이 사용하던 주방 도구였습니다.
이유는 저렴하여 깨지기 쉬운 그릇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보배라는 단어와 질그릇은 서로 매치가 되지 않는다는 모순이 있습니다.
존귀한 물건을 깨지기 쉬운 그릇에 담는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런데도 바울이 이렇게 표현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의도적 증언이 됩니다.
‘오스트라키노이스 스큐에신’ 즉 ‘질그릇’에 담긴 것이 무엇이냐는 반어법적인 강조 때문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바울은 그 보배로운 존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라고 선포하고, 그 분의 노예로 살고자 선언한 진짜 가치 있는 그리스도인들인데 이렇게 선포하고 사는 마케도냐 지역과 아가야(고린도)에 살고 있었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위험천만임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대로 로마 황제가 주라는 것 외의 그 어떤 정치적인 내용이 허용되지 않는 살벌한 지역에서 살고 있는 고린도교회 공동체의 지체들은 깨지기 쉬운 위험천만의 핍박의 현실 속에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렇게 깨지기 쉬운 그들이 가장 존귀한 보배 같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강조함으로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안에 있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오늘을 사는 저와 여러분이 깊이 성찰하고 공유해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바로 질그릇에 담겨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여정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메시지를 듣는 교우들 중에 이런 억지춘향이 어디에 있느냐고 항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요?
조금 구체화시켜 보겠습니다.
지금 설교하고 있는 담임목사가 교우들에게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이 이런 것입니다.
교우들은 어려움이 있기에 감사하라는 말이고, 기도제목이 있으니 감사하라는 말이며, 지금 일이 잘 안 풀리니까 감사하라는 말이고, 지금 육체적으로 병들어 있으니 감사하라는 말이며, 지금 경제적인 곤란함을 당하고 있으니 감사하라는 말이고, 지금 자녀들이 내 맘대로 하지 않고 속을 썩이고 있으니 감사하라는 말임을 아는 눈치 빠른 성도들은 알기에 말입니다.
마치 제자들이 예수님께 항의 섞인 마음으로 토해 냈던 이 구절과 일맥상통합니다.
마태복음 19:2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부자 청년에게 이르신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마태복음 10:23-24)라는 말씀을 하신 예수님께 베드로가 충격을 받고 내배었던 이 토로에서 우리 교우들도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목사님, 예수를 믿으며 시간도 드리고, 물질도 드리며 헌신하고 있고, 세상에서 억울한 일도 당하지만 예수 믿는다는 이유 하나로 참고 있는데 그러면 거기에 상응하는 보답이 있어야 예수 믿을 맛이 나지, 예수를 믿는데도 세상적인 가치에 함몰되어 막 살아가는 자와 별로 다르지 않은 고통과 재앙이 임하면 도대체 왜 예수를 믿겠느냐”고 항변할 수 있습니다.
그 항변에 표면적으로 저도 고개를 끄떡이며 이해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해는 하지만 동의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설교자가 말하고 있는 메시지의 핵심은 이런 인간적인 이성을 토대로 한 해석의 내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오늘 전하고 싶은 메시지의 핵심은 표면이 아니라 이면적인 핵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을 바꾼다면 영적인 교훈이라는 양보할 수 없는 진짜 은혜를 전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다시 본문 7절을 읽겠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그렇습니다.
오늘 담임목사가 집중하려는 영적 핵심은 7절 본문의 후반절입니다.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엄청난 감동입니다.
2020년 6월 28일을 살아가는 세인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성결인 여러분!
진짜 그리스도인의 정체는 내가 질그릇에 담겨 있는 존재임을 인정할 때 비로소 나를 돕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에게 임한다는 것을 아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성공주의에 혈안이 되어 있는 성도, 번영신학에 함몰된 교회를 메머드 교회로 만들고 싶어 하는 목사, 수많은 자본주의적인 시장 논리에 빠져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그 분의 노예로 살아가기를 거부하는 무늬만 기독교 신앙이라는 이름만 갖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이 어마어마한 영적 감동이 진짜 은혜임을 알 리 없습니다.
이 은혜는 분명한 신앙 정체성을 갖고 있는 그리스도인만이 알 수 있습니다.
이 은혜를 먼저 알았던 본 편지의 자자인 바울은 후에 이렇게 담대하게 고린도교회 지체들에게 선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9-10절입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그렇습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은 내가 질그릇에 담겨 있는 대단히 연약하고 깨지기 쉬운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런 신실한 정체성을 갖고 있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영적인 강복을 본문 8-10절을 통해 살피고 오늘 설교를 정리하겠습니다.
본문 8-9절입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본문을 이 잡듯이 분석해 보십시다.
① 우겨쌈(틀리보): 무거운 압력이 있어 몹시 괴로운 상태
② 답답한 일(아포레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여 당황스러운
③ 핍박(디오코): 도망가도록 만드는
④ 거꾸러뜨림(카탈라보): 가장 낮은 곳으로 던져진
이 네 가지의 고통스러운 특성을 가진 자가 누구입니까?
질그릇 안에 담겨진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아무리 보아도 이 네 가지의 일을 당하는 자들은 불행한 사람들 같은데 이들이 왜 보배입니까?
Ⓐ 우겨쌈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 낙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버림을 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이런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집니까?
심히 큰 능력이 있는 하나님이 이렇게 만들어주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하는 두 번째의 정체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2) 믿음의 승리를 견인하는 힘은 내 힘이 아닌 주님의 힘임을 믿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 7절 하반절을 읽겠습니다.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이 능력의 근원이자 원천임을 바울은 분명히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정체성을 갖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발전해 나아갈 수 있는 또 다른 영역을 분명히 제시합니다.
본문 1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렇습니다.
부끄러움의 상징이라고 여겨졌던 예수의 죽음, 수치스러움의 극치라고 고린도에 편만하게 퍼져 있었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피할 내용이 아니라 몸에 항상 짊어질 영적 자존감임을 바울은 말합니다.
대단한 믿음의 진보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정체성을 다시 보여줍니다.
어떻게 이런 엄청난 믿음의 진보를 그리스도인은 갖게 되는 것일까요?
다시 강조합니다.
능력의 심히 큼이 하나님께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이 주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두 번째의 정체성입니다.
능력의 원천이 하나님께 있기에 이것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사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 8-9절입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그림을 보겠습니다.


필그림하우스 천로 역정 동산에 만들어진 조형물 중에 하나입니다.
이 조형물에 대한 배경을 하고 있는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나오는 글을 소개하겠습니다.
“해석자는 또 다시 크리스천의 손을 잡고 벽난로가 있는 방으로 이끌었다. 난로의 불꽃은 갈수록 드세고 뜨겁게 타올랐다. 누군가가 불길을 잡으려고 끊임없이 물을 쏟아 붓고 있었지만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크리스천이 물었다. ‘여기에 무슨 의미가 들어 있습니까?’ 해석자가 대답했다. ‘불길은 마음속에서 하나님이 이루시는 은혜의 역사일세. 불을 끄려고 난로에 물을 퍼붓고 있는 이가 사탄이지. 하지만 보다시피 마귀가 제 아무리 훼방을 놓아도 불길을 점점 더 맹렬하고 뜨겁게 피어오르고 있네. 그 까닭을 알려드리리다.’ 해석자는 한쪽 벽으로 데려갔다. 웬 남자가 기름통을 들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눈에 띄지 않게 모닥불 위에다 기름을 뿌려대고 있었던 것이다. ‘이건 또 무슨 일이랍니까?’ 크리스천이 물었다. ‘이 분은 그리스도시라네. 쉴 새 없이 은혜의 기름을 부어가며 마음속에 이미 시작된 일이 사그라지지 않게 지키시는 걸세. 마귀가 무슨 짓을 하든지 그리스도가 중심에 벌이고 계신 은혜로운 역사는 갈수록 왕성해 지는 법이지.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벽 뒤에 지키고 섰던 분을 그대도 보았을 게요. 그처럼 숨어 계시는 탓에 심령 한복판에서 은혜의 역사가 소멸되지 않고 유지되는 까닭을 제대로 아는 이가 드물다네.”(존 번연, 천로역정, 포이에마, pp,69-70)  

지난 상반기 동안,  코로나 19라는 대재앙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이 재앙은 현재진행형입니다.
그런데 뒤를 돌아보면서 절절하게 체감하는 부인할 수 없는 은혜가 있습니다.
꺼질 것 같았던 내 삶의 은혜의 과정이 소멸되지 않았다는 기적입니다.
어떤 때는 사방의 우겨쌈으로, 또 어떤 때는 싸이는 답답한 일로, 그리고 또 어떤 때는 심각한 박해를 당했어도 오늘 여기까지 천로역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했단 말입니까?
그 답은 단 한 가지, 내 힘이 아닌 하나님의 심히 큰 능력이 나에게 거부할 수 없는 은총으로 임했기에 내가 오늘 여기에 은혜로 서 있을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내 등 뒤에 무한대로 성령의 기름을 붓고 계시는 하나님의 그 큰 은혜 때문에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내 힘이 아닌 하나님의 심히 큰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다음 주간부터 나성 총회 인준 교역자 과정인 교책 과목 이수를 위한 강의를 받습니다.
이제 육십 나이에 어떤 과정을 이수하기 위해 공부를 한다는 것이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제가 선택한 과정이니까 잘 감당하려고 합니다.
이유는 그 교육을 받아야 교단이 어떤 행정과 법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조직에는 거기에 걸 맞는 법과 제도가 있습니다.
그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은 마땅히 그 법과 체계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물리적인 법과 제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체성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 역시 예외일 리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주군이 그렇게 만드신 질그릇에 담긴 보배들이라는 정체성과 그러기에 언제나 깨지기 쉬운 나라는 것을 인식하고 넘어지지 않기 위해 주군께서 심히 큰 능력으로 나를 견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견고한 정체성을 갖고 또 한 주간도 승리하는 세인 지체들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나의 인생길에서 지치고 곤하여
매일처럼 주저앉고 싶을 때 나를 밀어주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평안히 길을 갈 때 보이지 않아도
지치고 곤하여 넘어질 때면 다가와 손 내미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때때로 뒤돌아보면 여전히 계신 주
잔잔한 미소로 바라보시며 나를 재촉하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