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8일 금요일 성서일과 묵상 바울, 도대체 그는 누굴까? 오늘의 성서일과 시편 67편, 이사야 63:15-19, 사도행전 14:19-28, 창세기 41:37-57 꽃물 (말씀 새기기) 사도행전 14:19-20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마중물 (말씀 묵상)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성서일과다. 도대체 바울은 누구지? 어떻게 이런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지? 아무리 신앙이라는 이름을 갖고 평생 목사로 살아온 지난날들이 나의 이력이지만 바울은 해석 불가다. 루스드라에서 당한 폭력은 가히 살인에 가까운 폭력이었다. ‘죽은 줄 알았다’는 의사 누가의 표현을 적용할 때, 죽었을지도 모를 정도의 가혹한 린치를 당한 것은 분명하다. 복음적으로 해석하는 전제를 갖는다면 주께서 그를 죽음의 문턱에서 살리셨을 것이다. 그렇다면 주군의 은혜는 백골난망이지만 어떻게 자기를 죽기를 바라며 때렸던 무리들이 그대로 서슬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그 성으로 다시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사도행전이 침묵하고 있기에 더 어떤 확신을 갖고 이 본문을 해석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나도 안다. 하지만, 문맥 그대로 접근할 때 도대체 루스드라로 다시 들어간 바울은 무슨 마음이었을까? 용기라고 말할까? 객기라고 표현할까? 도대체 무엇일까? 설상가상으로 전도 팀의 리더였던 바나바는 정황상 멀쩡하다. 대원이 돌에 맞아 죽어가는 정황을 눈앞에서 목도했을 바나바는 그 어떤 육체적인 린치를 당했다는 흔적이나 보고가 없다. 바나바는 왜 멀쩡했지? 허메와 쓰스로 추앙받는 자리에서는 함께 있었던 바나바였는데, 왜 가히 살인적인 폭력이 바울에게 자행되었건만 바나바는 멀쩡했지? 모든 게 의문이다. 이런 글을 본 적이 있다. 루스드라 사역의 보고를 한 사도행전 14장 이후, 서열이 바나바와 바울에서 바울과 바나바로 바꾸어 누가가 기록한 것은 아마도 바나바의 비겁함이 그렇게 리딩의 역할을 역전하게 만든 이유가 되었을 것이라는 글이었다. 해석이니 100% 맞는 설명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나름 설득력이 있는 해석이다. 물론 이런 해석을 부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늘 나는 성서일과 묵상에서 이런 부류의 설명은 차치한다. 오히려 질문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바울, 도대체 그는 누구지? 바울,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지? 오래 전에 진보적인 기독교교육학자인 문동환 박사가 쓴 『예수냐, 바울이냐』라는 제하의 단편을 읽었다. 나는 저자가 책에서 직설하고자 했던 논지를 이해했다. 그는 이렇게까지 바울을 혹평했다. “가장 예수다운 역사적 예수를 독자들에게 망각하게 만든 원흉이 바울이었다.” 전체를 다 인용할 수 없지만, 그의 가혹한 평가의 결국은 바울이 예수의 원 정신(역사적 예수)을 깡그리 앗아버린 대단히 위험한 인물이었다고 평가절하 했다는 점이다. 바울에 대한 신학적 이해와 평가는 신학적 차원에서 얼마든지 호불호로 갈려 평가될 수 있다는 점에서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양보할 수 없는 마지노선이 있다. 역사적 인물 바울이 예수의 정신을 앗아버린 원흉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왜 바울이 그의 전 인생의 삶을 드렸던 신앙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평가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는가? 역사적 바울이 역사적 예수의 삶을 축소시킨 것에 대해서는 분노하면서 신앙인 바울이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셨던 신앙적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려 했던 삶의 흔적을 조금도 인정하지 않으려는가? 이것이 내 질문이다. 이것에 대한 균형적인 답을 말하는 자들이 바로 이 지성적 영성을 추구하는 자들이다. 정직한 고백이 있어야 한다. 7년 전, 소아시아 여행을 했다. 타우르스 산맥을 에어컨 시스템이 완벽한 고급 리무진 버스를 타고 두 번 넘으면서 나는 울었다. 왜? 바울은 이 산을 도보로 넘었는데. 넘으면서 강도의 위협과 굶주림과 배고픔을 감내했고 목마르고 추위와 싸웠으며 자지 못하는 고통을 당하면서 넘었는데 나는 고급 버스에 올라 관광하며 넘었기 때문이었다. ‘자기 의’를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라는 슬며시 기어오르는 못돼 먹은 생각으로 표현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늘 성서일과를 묵상하다가 이런 소회가 들었다. 내가 감히 하지 못했던 주님을 향한 신앙적 헌신에 대해서 그 헌신을 성실하게 감당했던 신앙의 선배들에 대해 매도하지 말아야 한다는 영적 오기가 임했다. 철저히 나부터다. 신학적 우월주의라는 교만과 영적 건방짐이 내안에 똬리를 틀고 있다면 그 자리는 벗어나는 것이 옳다.
두레박 (질문) 예수인가? 바울인가? 질문 자체가 유치하다. 예수다. 백번을 대답해도 예수다. 그래서 나는 그 예수께 전 인생을 올인 한 바울의 신앙적 삶을 존경한다. 손 우물 (한 줄 기도) 하나님, 역사적 예수의 삶에 대해 따라가고 싶습니다. 그가 살았던 장소, 삶의 내용, 정신 등등에 대해 나도 민감하게 닮아가고 싶습니다. 하나님, 그런데 그 예수가 나의 주군이십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두 가지의 올바른 균형에서 벗어나거나 치우치지 않게 하옵소서. 나비물 (말씀의 실천) 예수의 삶과 그가 증언하셨던 하나님 나라를 잊지 말자. 그를 따랐던 바울의 신앙적 삶을 나도 본받자. 하늘바라기 (중보기도) 지체들 중에, 적지 않은 아픔을 당한 교우들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힘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그러나 그들을 위한 엎드림에 소홀하지 않게 하옵소서. 그들의 아픔이 제 아픔이 되게 하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