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 스티븐, 퍼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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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두란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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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3-04-03 17:57: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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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록 믿어라 스티븐 퍼틱저, 죽도록 믿어라, 두란노, 2013년. 부끄러운 고백을 하나 하자. 이전에는 안 그랬다. 탄탄한 조직 교회의 당회장으로 사역을 할 때 교회 멤버십을 구성하고 있는 인원, 숫자가 뭐 그리 중요한가? 하고 거드름을 피며 교만의 극을 달렸던 때가 있었다. 그 때는 불과 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4년이 지난 지금 교회를 개척하고 한 명의 영혼에 집중하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일인가를 새삼 느낀다. 하나님께서 교만했던 나에게 바로 이것을 원하셔서 개척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근래 강하게 한다. 아마도 상황이 교훈을 만드는 것을 보면 사람은 무언가를 말 할 때 경험하지 않고는 결코 입 밖으로 내 뱉어서는 안 된다는 배움을 얻게 되었다. 아,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해는 마시라. 섬기는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하여 상업적인 방법을 동원하는 그런 아둔함을 경계하고 있는 것은 나의 목양적 자존감의 마지노선이다.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목양의 틀을 세속적 잣대로 바꾸라는 세미한 사탄의 음성을 들을 때마다 그 음성을 일거에 날리게 하는 책들을 접하게 하신다는 점이다. 고난 주간 이후 부활절을 은혜롭게 보내고 주초에 손에 잡은 책이 지금 서평을 쓰고 있는 스티븐 퍼틱(Steven Furtick)의 ‘죽도록 믿어라’ (두란노출판사)였다. 카일 아이들먼의 ‘not a fan’ 과 데이빗 플랫의 ‘Radical' 이후 스티븐 퍼틱의 ’죽도록 믿어라‘ 역시 급진적 제자도의 맥을 잇고 있는 책이라 연속적인 통찰력을 얻기 위해 정독하는 기회를 가졌다. 책을 읽고 난 결론적 소회를 먼저 밝힌다면 목양의 본질적인 기초를 무엇으로 삼아야 하는 가를 다시 한 번 재확인시켜준 양질의 도움을 얻었다는 것이다. 열왕기상 후반부와 열왕기하 전반부에 소개되고 있는 선지자 엘리사의 일대기를 오늘의 언어로 표현하고 적용을 시도하는 퍼틱의 글들은 단지 급진적인 제자도의 삶을 살기를 촉구하는 평신도들을 각성시키는 글을 뛰어넘어 현직에서 목양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목사의 사역 틀이 얼마나 철저하게 복음에 원색적이어야 하며 결벽증적으로 믿음 중심적이어야 하는가를 공격하고 있다. 시작부터가 의미심장하다. 엘리사가 소명을 받고 난 뒤 그가 목숨처럼 붙들고 있었던 소를 죽여 백성들에게 고기로 주어서 먹게 한다. 동시에 그는 소가 끌고 다니며 농사를 짓던 기구들을 불살라 버렸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지난 대선 때 무소속을 출마를 했던 안철수씨의 어록이 생각났다. “타고 온 배를 불살랐다.” 퍼틱은 신앙의 궤도에 ‘대충’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음을 분명히 한다. 우리들의 언어로 굳이 표현하자면 도 아니면 모다. 나는 퍼틱의 이 지적에 동의한다. 하나님의 소명이 나에게 임재할 때 그것은 인간적인 잣대로 주판알을 튕기는 일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를 개척하고 나니 영혼이 귀하고 귀했다. 이런 이유로 한 영혼의 소중함은 더할 나위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나 사역자로 세울 수는 없었다. 이런 이유로 본인의 언어에 의하면 상처(?)를 받았다고 교회를 떠난 지체가 있었다. 그가 떠나면서 남긴 한 마디가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편하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이 교회를 찾았는데 도저히 편한 신앙생활을 꿈을 꿀 수가 없어 떠납니다.” 그렇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 크리스천들의 상당수는 신앙의 정체성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사수하는 순교적인 마인드가 아닌 신앙을 떠난 삶의 모습이 못내 찝찝하여 흉내 내는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으로 만족하려는 경향의 이름뿐인 신자들로 넘쳐난다. 쟁기도 잡고 하나님도 잡으려는 교인들이 물결친다. 상황이 이 지경이기에 순교적인 신앙생활을 요구하는 것은 미친 짓(?)처럼 보이는 어리석은일이고 순교라는 말을 쓰는 경우는 시대를 분별하지 못하는 고조선 시대의 일이라고 공격하는 세태가 교회에 만연하고 있다. 그러나 퍼틱은 이런 안일한 신앙의 태도를 여지없이 공격한다. 엘리사는 그의 삶의 방식이었던 소의 쟁기를 불태웠음을 강조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름을 받았다면 이 세상의 방식과 완전히 이별할 것을 촉구한다. 옛 삶에 묶여 있는 것에 불을 지리지 않는 한 하나님을 진정성 있게 믿고 따르는 것은 불가능하며 입으로 그렇게 증언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거짓임을 천명한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이 땅을 사는 데 필요한 내비게이션을 주지 않으신다. 그 이유는 하나님 당신을 내가 내비게이션으로 삼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내비게이션으로 삼는 자는 적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산다고 증언한다. 적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믿음의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많은 개천을 파는 데에 집중하는 사람임을 고지한다. 마른 땅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절망의 상황에 좌절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비를 주실 것을 믿고 깊고 많은 개천을 파는 사람이 급진적 제자임을 독자들에게 설득한다. 이런 자들은 세상의 방식을 과감히 포기한 자들이기에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아끼지 않고 주님을 위해 드린다. 상투적인 드림이 아니다. 물질에 대한 가치를 하나님과 비교하지 않겠다는 최고의 faith quality의 표현이다. 퍼틱은 양보하지 않고 충격적인 선포를 계속한다. 주님 때문에 경험하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 한다. 교만하지 말고 낮아질 것을 종용한다. 믿음의 결과는 인내로 나타남을 잊지 말 것을 예고한다.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직선적인 사고관을 갖고 있다고 나는 분명히 믿는다. 그러기에 신앙은 끝이 있는 경주이다. 바울이 유언처럼 남긴 말은 그냥 흘려보내는 가벼운 고백이 아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이런 의미에서 퍼틱이 자신의 저서에서 밝힌 ‘죽도록 믿어라’의 원제가 'GREATER'라는 대목은 의미심장하다. 윌리암 캐리의 말 때로 양다리 걸친 명목적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순교적 신앙으로 제자 된 삶을 살기 위해 삶을 주님께 올인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위대한 일을 계획하고 시도하는 위대한 자’ 들임에 틀림없다. 아주 오래 전 신학교 선배께서 교역자 회의 설교를 맡아 섬기셨다. 당시 갓 안수 받은 병아리 목사인 나는 대선배인 그 분의 설교를 가슴으로 들었다. ‘죽도록 충성하라’ “우리 목사들은 입만 번지르하게 이 구절을 인용하며 써 먹는데 정말로 여러분은 죽을 만큼 주님께 충성하고 있습니까? 정말로 순교를 각오하고 있습니까? 죽도록 충성하십시다.” 십 수 년이 흘렀지만 목회의 현장에서 선배의 그 날 목소리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고 긴장하며 30년을 되새기며 달려왔다. 이제 목회의 마지막 필드에 있다. 퍼틱의 가르침이 또 한 번 나를 흥분하게 한다. 바보는 결심만 한다. 행하지 않는다. 이제 얼마 남지 않는 목양의 에이지에 바보가 되고 싶지 않다. 부활절 이후 퍼틱은 나에게 전율과 감동을 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