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김근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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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IV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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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4-02-06 12:25: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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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주의 ‘특강 예레미야’를 읽고 김근주 교수의 ‘예레미야 특강’ 읽고 그가 전하고자 하는 팩트를 이해했다. 동시에 조국교회가 들어야 하는 메시지도 함께 경청했다. 그리고 부분적으로 그의 말에 동의했다. 예레미야의 선언 속에 담보된 파격적인 선언들이 위기의 극을 달리고 있는 조국 교회가 들어야 할 이야기라고 나름 동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분적이라고 언급한 이유는 그의 갈파들이 조국교회의 목양터의 현장에 대한 현실적인 접근이 왠지 모르게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물론 이렇게 이야기하면 저자의 이데올로기적인 면을 트집 잡아 딴지를 거는 것으로 이해할 것 같은 노파심이 있어 분명히 전제하지만 그것은 결코 아니다. 이 서평을 쓰고 있는 나 역시 김근주 교수와 함께 같이 한국교회의 미래를 염려하고 걱정하는 고민하는 ‘바른 교회 아카데미’ 회원이기에 그가 갖고 있는 진보적인 학문의 틀을 지지하면 지지했지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러나 문제를 하나 제기하고 싶다. 다름 아닌 조국교회의 목양터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현직에서 목회를 하는 목사들에게 있어서 가장 관심을 갖는 것은 다름 아닌 목양의 현장이요 섬기고 있는 교회 지체들이다. 나는 아직은 그렇게 믿고 싶고 또 그렇게 믿으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현장에서 목회를 하는 대부분의 정상적인 목회자들의 공통의 관심은 하나님의 뜻이다. 동시에 그들 대부분은 김근주 교수가 책에서 지적하는 ‘공평과 정의’가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으며 목회를 해 왔을 것이 분명하다. 아모스가 5:24절에서 말한 그대로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의 선언처럼 미슈파트와 츠다카의 성취를 사모하며 사역하는 것이 일반적인 정서이다. 대부분의 대형 교회와 일부 일탈의 목회자들을 통해 조국교회의 모든 목회자들이 그렇게 목회한다고 매도하는 일에 대하여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김근주 교수의 예레미야 특강을 통하여 지적하고 있는 예레미야 예언의 현대적인 실천과 적용이 조국교회를 살리고 회복시키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이며 팩트임을 분명히 지지한다. 그러나 서평을 쓰고 있는 본 서평자가 문제를 제기하고 싶은 것이 바로 여기에 있다. 언어 자체에 대한 어패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조국교회가 그 동안 배웠고 또 배우고 있는 목양의 현실 안에서 예레미야가 남 유다를 향하여 외쳤던 파격의 사실적인 선포들이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가? 에 대한 문제를 제기할 때 학자들이 보는 조국교회와 시각과 현직 목회자가 보는 시각이 현저한 갭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먼저 본 서평자는 김 교수가 말하고 있는 내용 중에 강력한 지지를 보내는 필드를 소개해 보고자 한다. 첫 번째의 지지 내용은 김 교수가 이 책에서 줄곧 말하고 강조하는 역설점이 다윗왕조에게 주신 언약과 여호와의 성전 신앙에 대한 공격적인 선포라는 2-4장에서의 강조점이었다. 그는 적어도 예레미야 시대에 이 두 가지의 유대 종교적인 사상은 이스라엘을 유지시키는 절대적인 신앙의 보루라고 종교인들은 믿고 있었지만 반대로 이 두 가지는 이스라엘을 더럽히고 파괴시키는 결정적인 원인이었음을 지적한다.(p12.) 이런 이유 때문에 예레미야는 유다의 멸망을 선포하면서 이 두 신앙의 기둥을 때려 부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는 것을 시작으로 파격의 행보는 진행된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죄를 중요한 두 가지로 정의한다. ① 하나님의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는 죄였다. 즉 다윗 언약을 믿고 여호와의 성전 신앙을 갖고 있는 그들이 입술로는 그렇게 강조하지만 야훼 하나님을 믿지 않고 애굽과 앗수르를 의지하는 위선의 죄를 지적한다.(p.61) ② 거짓 경건의 죄를 들고 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저들이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종교 지도자, 정치 지도자 할 것이 없이 모두가 우상을 섬기는 거짓의 경건으로 도배한 죄였다.(p.63) 저자는 유진 피터슨의 일갈을 소개하면서 예레미야 당시의 영적인 기상도를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인류의 오래된 옹고집 중에 하나가 하나님을 길들이고 자신의 입맛에 맞게 하나님을 조절하려는 시도”라고 갈파했는데 예레미야 시대의 형국이 바로 이러했다는 사실을 빗대고 있다. 이런 한심한 영적인 기상도를 갖고 있었던 예레미야 시대의 현실을 직시하던 예레미야는 판을 뒤집어 업는다. 야훼께로 돌아오라는 것이었다. 야훼께로 돌아오라는 것은 분명한 참여를 말한다. 그것은 전술했던 것처럼 미슈파트와 츠다카의 실천이다.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는 것이다. 정의와 공의는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는 기본적인 원칙이자 이미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원칙이며,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의 원칙이기도 하다.(p.77.) 강조하지만 예레미야의 중심 메시지는 곤경에 처한 자들과 하나님과의 연대이다. 어디서나 영성을 강조하지만 윤리적인 행동 특히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정의에 대한 열심과 분리된 영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강퍅하게 떠난 것이며 이는 이 민족의 심장부에 놓인 문제라는 김 교수의 지적에 동의한다. 본 서평자가 김 교수가 예레미야 특강을 통하여 선포한 또 다른 지지 팩트는 11-20장에 걸쳐 있는 ‘예레미야의 고백’이다. 총 5개의 고백으로 이루어진 그의 고백은 특별히 21세기의 한 복판에 있는 조국교회의 목회자들에게 주시는 메시지로 받아들이기에 더할 나위 없이 귀하고 아름답다. 첫 번째의 고백은 “여호와께서 내게 알게 하셨으므로 내가 그것을 알았나이다”로 시작한다. 그가 알게 된 것은 고난의 내용들이었다. 고향 사람들의 대적으로 대변되는 그가 당하는 일련의 고난이었다. 심지어는 살해의 위협까지 당하는 그런 위험 말이다. 아나돗 사람들은 본인들에게 플러스가 되지 않고 손해가 되는 일들에 대하여 집단적으로 그것을 거절하고 또 그것을 선포하던 예레미야를 내치는 패거리 집단으로 전락했음을 알려준다.(p.106.) 진리를 말하고 옳은 내용을 말함으로서 임하는 심각한 핍박과 고난에 대하여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적절하게 설명하지 않으신다. 도리어 앞으로 당할 더 심각한 고난에 대하여 용기를 가지라고 독려하실 뿐이다. 하나님의 이러한 에둘림을 예레미야는 외면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악인들의 번성함과 본인의 고난 앞에서 괴로워하지만 도리어 그 고난으로 인해 하나님께 더 진솔함으로 다가서는 삶의 고백이 눈물겹다. ‘이 풍랑으로 인하여 더 빨리 갑니다.’의 예언자적인 구도의 삶이 아름답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이다. 예레미야의 두 번째 고백은 선명하지 않은 본인의 사역과 하나님이 속 시원하게 해결하시지 않는 것에 대한 고백이라기보다는 항의에 가까운 내용임을 저자는 밝힌다. 그 이유는 남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심판은 기정사실화된다. “모세와 사무엘 같은 중보자가 온다 할지라도 유다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은 결코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죽이는 칼과 찢는 개, 삼켜 멸하는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을 유다에 보내사 그들을 멸하며 흩어 버리실 것이다. 여러 위기들이 닥쳐오지만, 하나님께서 그 택하신 백성들을 돌보시고 그들을 괴롭히는 이방 민족들을 물리치시며 결국 유다를 회복하실 것을 기대하고 있는 자신의 동포들을 향해, 그리고 유다 왕들을 향해, 이토록 단호하고도 확고한 심판과 재앙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의 삶이 어찌 고달프고 고통스럽지 않을 수 있으랴.”(pp.110-111) 예레미야는 남 유다에게 임할 가공할만한 재앙을 선포하며 목도하는 당사자로서 불편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이 불편한 진실을 어떻게 해결해 주실 것에 대한 기대감으로 불평 섞인 불만을 갖고 항의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심판의 확실성에 대해서는 요지부동이시다. 다만 그것을 목도하고 선포할 예레미야 개인 대상에게만 메시지를 주신다. 너를 강하게 할 것이고(15:11), 너로 하여금 놋 성벽이 되게 하실 것이다.(15:20) 두 번째의 고백을 통하여 예레미야의 개인적인 고독을 느낀다. 아무리 힘이 들고 어려워도 백성들이 듣고 싶어 하는 달콤한 위로의 말이 아니라 생명의 말씀을 끝까지 선포할 것을 격려하시는 하나님의 신탁 앞에서 철저히 고독한 구도자의 삶을 엿 보게 됨은 목회자로 살아가고 있는 오늘의 목사들에게 시사 하는 바가 크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예레미야의 세 번째 고백은 예레미야 17:12-18절에 나타나 있다. 이 고백은 선지자의 절절한 외침으로 볼 수 있다. 동시에 병자의 기도처럼 시작되는 탄원 기도이기도 하다. 마치 이런 것처럼 들린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하나님이 어디에 있는가? 있으면 한 번 내려와 보라고 해라.” 이런 비꼼을 예레미야는 극복한다. 선지자의 예언은 과거에 주신 말씀에 근거하여 현재의 삶을 보고 미래에 임할 일을 선포하는 것이기에 오늘의 절망에 연연하지 않는 예언자적인 초연함이 그의 고백 속에 들어 있다. 그의 네 번째 고백은 반항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의 진정한 저주 외침이라고 볼 수 있다. 예레미야가 왜 저주의 외침을 할 수 밖에 없었을까? 예언자를 괴롭히는 최고의 방법은 렘 18:18절에 기록된 대로 그를 무시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혀를 치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예레미야는 저주의 기도를 올린다. 그러나 주의하자. 그의 저주는 예레미야가 개인적 복수를 원해서 선포한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수호하고자 했던 외침이었다. 어느 불편한 상황이 임한다고 하더라도 예언자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 지를 그의 네 번째 고백을 통해 알 수 있다. 마지막 다섯 번째 고백은 그의 신앙의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태어난 날을 저주할 정도로 고난과 슬픔으로 그의 인생이 그렇게 힘든 인생이었다. 그러나 그의 고난을 통한 메시지는 이 땅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당하고 또 당할 삶의 예표이기도 했다. 이런 하나님 백성들의 삶에 비해 오늘날 조국교회가 전하는 복음은 현저히 축소 왜곡되어 있음을 저자는 역설한다. 본 서평자 역시 이 점 역시 동의한다. 예레미야의 탄식은 사라지고 기쁨만이 요동치는 조국교회, 교회가 세상의 주류가 되고 권력의 한 복판에 서 있는 현실, 교회가 지향하는 가치가 세상이 지향하는 가치와 별반 다름이 없는 오늘의 현실이 왜 이지경이 되었는가? 저자는 예레미야의 고난을 수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맹비난한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예레미야가 선포한 저주와는 너무 거리가 멀다. 그래서 저자는 스툴만의 예레미야 고백을 소개하면서 그의 말에 귀담을 것을 종용한다. “교회는 병자들과 억압받는 자들과 고통 받고 있는 자들의 공간이어야 한다. 가난하고 힘겨운 삶을 사는 외국인이나 나그네와의 연대를 촉구하는 것이 교회이다.” 이 말은 참으로 타당하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저자의 역설이지만 본 서평자의 관심이기도 하다. 예레미야 특강을 독서하면서 또 하나 저자의 강의 내용에 박수를 보낸 것은 27-28장에 걸쳐 있는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에 대한 해석이었다. 예레미야와 하나냐로 대립 구도가 형성되어 있는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의 첨예한 분석은 오늘을 사는 목회자들에게도 뼈를 깎는 자성의 목소리로 들려야 했기 때문이다. 남 유다의 멸망이라는 이스라엘의 절망을 목전에 두고도 하나냐로 대변되는 거짓 예언자들의 구도는 평화의 정착이었고 샬롬의 기대였다. 더 심각한 것은 시대의 백성들은 좋은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는 점이다. 이에 반하여 참 예언자 예레미야와 그의 서기관으로 사역했던 바룩은 멸망을 외치되 회복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불치의 멸망을 외친다. 이들의 메시지는 당연한 일이겠지만 백성들에 의해 무자비하게 공격을 당한다. 더욱 절망스러운 것은 거짓 예언자들의 고정된 상투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같이 일러 말씀하시기로’이다. 그들은 자신의 거짓된 예언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는 절망이 있다. 평화와 번영을 전하던 예레미야 시대의 거짓 예언자들은 대중들의 절대적인 지지와 환호를 듣지만 참 예언자들은 도리어 핍박을 당한다. 캐나다의 리젠트 칼리지에서 신약을 가르친 고든 피와 고든-콘웰에서 사역한 윌터 카이저가 ‘탐욕의 복음을 버려라’에서 부와 건강이 복음으로 탈바꿈된 것에 대하여 한탄하며 결코 속지 말 것을 천명한 것처럼 이 시대의 참으로 많은 시대의 목회자들이 건강은 복음이며 질병은 저주요 이와 같은 맥락에서 부는 하나님의 은혜요 가난은 저주라는 도식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하는 거짓의 복음이 판을 치고 있는 것에 대하여 개탄스럽기까지 한 것이 사실이다. 책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갈파하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직 성경으로’ 라는 종교개혁자들의 자랑스러운 구호 역시, 해석의 다양성을 배제한 채로 무시무시한 독재의 권위주의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악용되기 일쑤다.” 이 대목은 특별히 복음주의권에서 사역하고 있는 목회자들이 냉철한 이성적 판단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 한국교회의 강단이 귀에 들리는 소리들이 복음과는 상관이 없이 달콤함의 유혹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불편한 소리를 전하지 않아야 교회가 부흥된다는 세속적인 논리에 점령당한지 이미 오래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예레미야 시대의 하나냐와 같은 길 예언자가 아니라 바룩과 예레미야와 같은 진실 된 흉 예언자라고 착각하고 살아가는 이 땅의 목회자들이 얼마나 비일비재한가! 갈라디아교회에 편지하는 글에 바울이 선언했던 일침이 조국교회에 정말로 필요할 때가 아닌가 싶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저자는 이어 새 언약에 대한 해석을 진보적으로 가늠한다. ‘내 백성-너희 하나님’으로 대변되는 영역을 이스라엘이라는 지역적인 영역에서 이스라엘의 마음에 새긴 토라라는 영역으로 확장시킨 점은 주목의 대상이며 예레미야에 의해서 강조되고 있는 새 언약은 다윗에게 주어졌던 다윗왕조에 대한 언약을 쓸어버렸고 동시에 성전 중심의 언약을 훼파하였다는 점에서 괄목할 만하다. 도리어 그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 언약은 과거 다윗왕조에게 주어졌던 특정한 범위에게만 해당되었던 쌍방언약이 아니다.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일방적으로 선포된 회복과 용서의 언약이다. 그러므로 계급적인 구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두가 왕 같은 제사장이여 거룩한 나라 택한 족속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를 통하여 주어진 새로운 언약의 정점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의 돌아섬을 의미한다. ‘하나님께로’의 돌아섬은 방향의 전환이다. 즉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경배와 찬양이 아니라 미슈파트와 츠다카의 회복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로’의 돌아섬을 상징적으로 선포하기 위해 36장의 레갑 족속을 소개한다. 이스라엘과는 달리 레갑 족속들은 미슈파트와 츠다카의 실천을 위해 노력했던 백성들이었다. 저자의 표현이 의미가 있다. “이스라엘이 부에 매달려 야훼를 버렸으나 레갑 자손들은 야훼를 얻기 위해 부를 버렸다.”(p.223.) 예레미야 시대에 하나님을 위한 신앙의 정결함과 순수함을 유지하기 위해 세속의 모든 만족과 유혹을 물리치고 그들만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유목 생활을 포기하지 않는 초지일관의 삶의 양태를 지속하는 레갑의 후손들을 소개한 이유는 무엇일까? 며칠 전 한국교회에 대한 신뢰도 조사를 기윤실에서 발표했다. 이 일을 시작했던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한국 개신교회의 성적표는 초라하기 이를 데 없다. 초라함을 넘어서서 참담하다. 그런데도 한국교회는 이스라엘의 길을 가고 있지 레갑 족속들의 길을 가고 있지 않다. 더 절망스러운 것은 한국교회는 끄덕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50-60대 목회자의 시대가 지나가고 30-40대의 목회자들이 역동적으로 활동하는 시대가 되면 괜찮아질까? 희망의 소리를 내고 싶지만 그렇지 못한 현실이 아프다. 더 슬픈 것은 요지부동하고 있는 목회자들의 한편에 맞물려 있는 평신도 지도자들의 부화뇌동이다. 소위 말하는 교회 안에 존재 하는 예수 안 믿는 자들로 인한 추락이다. 걷잡을 수 없는 추락 바로 그것이 아프지만 조국교회의 현실이다. 이제 예레미야 특강에 대한 서평을 마칠 시간이다. 서평을 마무리하면서 김 교수의 논지에 대한 2%의 아쉬움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 질문은 7장과 26장에 기록된 ‘성전 설교’에 대한 대목이다. 본 서평자는 분명히 저자의 예리한 예레미야 분석의 종합적인 결론으로 조국교회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은 단순한 회개의 차원이 아니라 미슈파트와 츠다카의 회복임을 동의했고 인정했음을 밝혔다. 저자는 성전 설교의 챕터에서 이렇게 단언한다. (P.85.)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사회봉사 혹은 구제라고 표현하는 일을 중요한 일이라고 말하지만 복음의 본질은 아니라고 치부한다. 하지만 이는 우리의 착각일 뿐이다. 하나님은 백성에게 바른 길과 행위, 즉 가난한 이웃을 돌보는 삶을 요구하신다. 가난한 이웃을 돌보는 일은 부차적인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야훼를 섬기는 신앙의 본질이다. 수직적 차원의 회복은 수평적 차원의 회복으로 구현된다. 그것은 예레미야서가 우리에게 선포하는 바다. 우상숭배의 금지가 우선적으로 선포될 말씀이라고 생각하겠지만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이웃과의 관계가 먼저라고 말씀하셨다.” 저자는 단언한다. 사회봉사와 구제는 신앙의 본질이라고. 그러나 저자의 이 선포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동의하지 못한다. 그것은 고집이나 무지나 오기 때문이 아니다. 저자와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본 서평자는 사회봉사와 구제가 하나님의 원하시는 하나님 사람 된 자들의 실천적인 열매와 또 증거라고 믿는 것에 이의가 없다. 또한 저자가 이렇게 말하는 의도까지 십분 이해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말한 수직적 차원의 회복은 수평적 차원의 회복으로 구현된다는 저자의 역설은 저자가 가지고 있는 사상적인 한계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도리어 성경의 흐름에서 단 한 번도 하나님은 이 구조를 양보한 적이 없다고 나는 성경을 해석한다. 무엇을 말인가? 도리어 수평적 차원의 회복은 반드시 수직적 차원의 회복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본질을 말이다. 조직신학에서 해묵은 논쟁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 칭의가 먼저인가? 아니면 성화가 먼저인가? 의 담론이다. 쉽지 않은 논쟁이다. 마찬가지로 접목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떤 이들은 저자처럼 수평적 차원의 회복을 본질로 인정하여 방점을 찍을 수 있다. 그러나 본 서평자와 같이 형장 목회자는 수직적 차원의 회복이 양보될 수 없는 본질이라고 확신하다, 만에 하나 구제와 사회봉사를 십자가의 도라는 본질보다 앞서 놓는다면 나는 교회가 사회적 봉사단체와 다름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목회자외 신학자의 신학적인 차이로 인한 일임을 주지시키고 싶다. 또 하나 김근주 교수에게 제안하고 싶은 아쉬움이 있다. 목양터를 근거로 사역하고 있는 오늘의 목회자들에게 예레미야를 통한 올바른 신학적 이정표를 제시한 것에 대하여 박수를 보내고 싶다. 또한 기존의 교회 조직 안에서 쉽게 말할 수 없는 민감한 사항에 대하여 예언적인 목소리를 내준 것에 대한 머리를 숙인다. 학자적인 양심을 포기하지 않은 것에 대한 경의이다. 김 교수의 설파들을 읽으면서 옳은 소리임에 공감한다. 그런데 아쉬움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론적인 대안이나 해결책인 아닌 목양적 차원에서의 대안이 과연 무엇인가? 에 대하여 잠잠하다. 저자에게는 독설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잠잠하게 들렸다. 오늘의 치열한 영적 전쟁터인 목양지에는 이론적인 대안보다 목양적 대안이 더 필요하다. 어찌 보면 학자에게 이것을 기대하는 것이 무리수인지는 안다. 그러나 참 귀한 책을 읽으면서 조국교회를 위해 고뇌하는 목사의 가슴 절절함을 어찌 다 표현할 수 있을까에 대하여 때론 좌절한다. 그 고통을 누가 시원하게 통타하여 노래를 부를 수 있게 하겠는가? 여기까지 목사의 철없이 보이는 어리광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조국교회의 희망의 노래를 할 때는 정녕 없는 것일까? 에 대하여 민감하게 고민했다. 저자는 조국교회의 미래에 대하여 지금의 구조와 생각의 수준으로는 불가능함을 분명히 한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에서 파면을 당한 학자이다. 그의 이력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으로 그의 경력을 들추어 낸 것은 아니다. 다만 그의 길 선택이 쉬운 길을 선택한 것은 분명 아님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그가 예언서를 연구한 학자이기 때문일까? 바른 교회 아카데미 연구위원 세미나에 참석하여 그의 발제를 몇 번 경험했다. 그 때마다 느낀 감흥은 세상에서 평범 모드로 살기가 참 쉽지 않은 길만을 고집한다고 느꼈던 경험이 있었는데 그 이유를 이번에 읽은 예레미야 특강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신학교에 들어가서 첫 번째 맞이한 방학에 크로닌이 쓴 ‘천국의 열쇠’를 읽게 되었다. 책을 통하여 만난 프랜시스 치셤과 안셀모 밀리 신부를 통해 가장 열정적으로 뜨겁고 순수했던 시절이었기에 당연히 목양의 현장에 나가면 치셤처럼 사역하리라는 도전을 강하게 받았던 옛 시절의 추억이 있다. 그러나 30여년이 지난 2014년 나는 어떤 목사인가? 를 수없이 되묻는다. 그리고 하나님께 절망의 탄식을 드릴 때 그 얼마인지... 아름다운 학자 김근주 교수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내드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