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함께

제목가장 위험한 기도 주기도,2024-06-10 14:58
작성자 Level 10

 

ㆍ지은이 김영봉
ㆍ출판사 ivp
ㆍ작성일

 2013-10-23 17:12:15




리처드 포스터는 자기의 책 ‘기도’에서 하나님의 마음, 곧 본향을 여는 열쇠가 기도라고 했습니다.

동의합니다.

기도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라는 지적일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마음을 여는 기도가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상업적으로 익숙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상업적이라는 표현에 대하여 거부감을 갖는 분도 계시겠지만 제가 이렇게 언급한 것은 기도라는 중요한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동력을 수단화시켜 기도를 너무 가벼운 주문처럼 전락시키고 있는 자들에 대한 유감 표시입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기도 중에 가장 위대한 기도이자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대로 ‘가장 완전한 기도인 주기도’인 것을 저 또한 공감합니다.

그런데 저자는 동시에 이 주기도를 가장 위험한 기도라고 정의하며 표제를 붙였습니다.

속을 들여다보면 저자는 그 만한 이유를 몇 가지로 제시합니다.

첫째,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의 참된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암송 되고 있는 기도이기 때문임을 말합니다.

둘째,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주기도를 드리는 자들이 기도의 내용을 실천할 리 만무이기에 위험한 기도임을 밝힙니다.

곧추 세워 역으로 저자의 지적을 수용한다면 우리들은 당연히 주기도에 담겨 있는 신학적 교훈을 성찰한 뒤에 충실히 이해된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입으로, 삶으로 드려야 한다는 교훈일 것입니다.

저자는 책에서 제일 먼저 기도 신학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강조합니다.

그는 기도 안에 내가 있다는 사실을 명제화 하였습니다.

이 말의 뜻은 기도는 단순히 하나님을 조정하는 수단도 아니요, 마법도 아니며, 안정을 찾기 위한 명상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사귐입니다.

다른 말로 이해한다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소통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면에서 주기도는 주문의 약자가 되어서는 안 되며 주님의 마음이 담긴 기도가 되어야 함을 분명히 합니다.

‘하늘에 계신’에서 하나님을 시간과 공간에 묶어두려는 일체의 시도를 버릴 것을 저자는 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하늘이라는 영역은 제한적인 공간이 아님을 밝힙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이런 이유로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자의 태도는 스스로를 무장해제 하는 자이어함을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를 무장해제 한 자는 하나님을 결코 가두어 버리는 누를 범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하늘에 계신’이라고 기도하려고 하는 자라면 제대로 기도해야 합니다.

하늘에 계신 그 분 앞에 마지막 날에 서는 것만 서는 것이 아니라 기도라는 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날마다 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적어도 주기도를 드리기 위해서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고 갈파한 헨리 나웬의 일갈에 주목해야한다는 것에 나 또한 동의합니다.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하는 자는 반드시 기도를 할 때 나를 통해 아버지를 볼 수 있는 영의 사람이 되어야하고 또 그런 사람만이 주기도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저자의 글 터치는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책에서 아버지를 저자는 정의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다가 내린 결론이 ‘사랑을 허비하는 아버지’입니다.

이 정의를 내리는 저자는 기막힌 영적 통찰력을 독자들에게 줍니다.

누가복음 15장에 기된 소위 말하는 탕자의 비유를 예로 들면서 저자는 아버지에게 집중합니다.

그의 묘사를 눈여겨봅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는 적절한 비유 표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 비유는 탕부의 비유가 적절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랑을 허비하는 하는 아버지의 비유라는 점 때문입니다.

유대 종교적인 스펙트럼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랑을 허비하는 아버지를 보는 자만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기도를 드릴 수 있다는 통찰력은 대단한 도전입니다.

주기도가 왜 위험한 기도입니까?

적어도 주기도를 드리는 자들은 탕부의 입장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을 허비하는 자가 아니라 철저히 계산하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주기도를 드리는 자들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주기도를 드리는 자들은 반드시 이타적인 삶을 살아야 할 것을 종용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로 인함입니다.

‘나’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필자는 이 대목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 안에는 타인은 없다.’

깊이 생각해 보아야할 그리스도인들의 안목입니다.

저자는 책의 두 번째 장에서 주기도를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기도라고 못 박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이 기도는 단순한 기도가 아닙니다.

적어도 이 기도의 주인공은 분명한 한 가지를 전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입니까?

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기 위한 믿음의 방향을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방향으로 선회하겠다는 고백이 담보되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바울 되는 것일 것입니다.

나는 이 대목에서 참 은혜가 되었습니다.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나의 이름이 높여지는 방향을 추구하는 데 목적을 두었던 것을 부인할 없습니다.

신앙의 터무니없는 왜곡을 자행했습니다.

목사, 장로 할 것이 없이 모든 자들이 그렇게 살아왔고 또 당연시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길은 결코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저자는 이 대목에서 이렇게 힘 있게 선포합니다.

“믿음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선회하라”

“하나님을 깊이 알면 알수록 나는 작아지고 하찮아지며 하나님은 커지고 중요해집니다. 전능자 하나님 앞에서 나는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되소서.”

잊지 말아야 할 주기도를 드리는 자들의 고정 기도입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저자는 이 기도의 부분에서 하나님 나라를 조명합니다.

조금은 어려운 내용일 수 있겠지만 풀어 놓으면 이렇습니다.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ALREADY)와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 나라’(NOT YET)의 긴장관계에서 어느 한 쪽으로 치우지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임재와 도래를 균형 있게 기도할 것을 자문합니다.

이 자문 중에 책을 읽는 내내 나에게 스며들었던 문구를 소개합니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시옵소서!(Thy Kingdom come.) 를 뒤집으면 ‘내 나라가 끝나게 하옵소서!(My Kingdom done.)가 된다.” (데이빗 팀스)

그리스도인들에게 절절한 통찰을 주는 언급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잠시 거주하는 천국의 나그네들입니다.

그러기에 항상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의 확산과 아직 오직 않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강력한 희망을 노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3부인 우리를 위한 기도의 장에서 저자는 계속해서 위험한 기도를 펼쳐 나갑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들의 의식주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형이하학적인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들이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모든 소유가 그 분의 것임을 인정하는 기도이며 동시에 그 분의 주권을 인정하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전적인 다스림을 수용하는 기도입니다.

다만 이 기도는 욕심 것 드리는 기도가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저자는 두 가지로 들고 있습니다.

첫째로,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는 자들은 삶의 규모를 줄이고 겸손하게 살기를 다짐해야 합니다.

또 하나 이웃의 가난을 덜기 위한 나의 물질을 나누어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재강조하지만 주기도는 가장 위험한 기도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나의 의의 정당성을 항변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한글 성경은 이렇게 번역되었지만 원어 성경을 직역하면 이런 해석입니다.

“용서 하소서. 우리의 빚을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사람들을 용서하듯이”

예수님 당시 죄를 빚이라는 단어로 묘사한 것은 시대 상황에 더욱 적절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본다면 빚은 청산되어야 할 부담입니다.

그 청산되어야할 빚과 같은 죄는 가볍게 여겨져서는 안 되는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저자는 앞으로 시대를 다음과 같이 진단합니다.

“죄라는 단어가 기피 되는 시대이다. 소수자에게 상처가 되는 표현을 피해야 하기에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빌미로 죄를 죄라고 지적할 수 없는 시대가 올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지금의 시대에 죄라고 불렀던 일체의 내용들이 선택적 기호로 탈바꿈이 되는 암흑의 시대가 임박해 있음을 저자는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달라스 윌라드는 이런 시대에 횡행할 것을 미리 내다보았는데 죄 관리(sin management)라 했습니다.

죄를 즐기는 비극입니다.

머지않아 달라스 윌라드의 지적이 각광을 받을 날이 올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필수적인 기도의 내용은 죄에 대한 용서와 상응하는 실천적인 죄와의 단절일 것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저자는 이 기도의 전제 조건을 세 가지로 말합니다.

세상이 악하고, 인간은 약하나 하나님은 강하시다는 것을 믿고 이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저 또한 저자의 이 갈파에 동의합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영적인 공격은 치열 할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 있는 동안입니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 있는 동안입니다.

사탄은 그냥 내버려두어도 괜찮은 자들에게는 일하지 않습니다.

‘죽은 개를 차는 법이 없듯이’

그러나 내가 영적으로 살아 있는 동안 공격은 치열하고 맹렬할 것이 자명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 이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적어도 이상의 기도를 드린 자들만이 마지막 송영의 기도를 올려 드릴 수 있습니다.

‘나라와 영광과 권능이 아버지에게 영원히 있습니다. 아멘.’

시작할 때는 리처드 포스터의 이야기로 시작했으니 끝날 때는 CS 루이스의 이야기로 끝을 맺고 싶습니다.

기도란 과연 무엇일까?

루이스는 말합니다.

“우리 안에 있어야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바로 그것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는 것”

저는 루이스의 이 말이 참 좋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내려놓는 기도의 삶을 사는 자만이 하나님이 내 안에 있어야 할 것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하나님께 내려놓는 가장 좋은 기도는 다름 아닌 주기도임을 나는 확신합니다.

그래서 김영봉 목사가 말한 대로 주기도는 정말로 위험한 기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