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함께

제목배제의 시대 포용의 은혜2024-06-10 14:58
작성자 Level 10


ㆍ지은이 스캇 맥나이트
ㆍ출판사 아바서원
ㆍ작성일 2013-08-31 22:4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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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을 꾸었다.

직전 교회의 담임목사로 설교하는 꿈이었다.

가능하면 꾸고 싶지 않은 꿈인데 심리적인 압박이 아직도 심한가 보다.

사람들은 이것을 트라우마라고 부른다.

내 삶의 한 순간을 송두리째 앗아가 버린 악몽 그 자체라고 생각을 하기에 직전 교회에서의 모든 사역을 깨끗이 지우고 싶은 심각한 피해 의식으로 인해 가끔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경험을 한다.

이런 트라우마에서 고통을 받는 것은 순전히 나다.

그래서 생각해 보면 억울하고 또 억울하다.

우연히 서점에 가서 책을 한 권 들추어 보았다.

아날로그 방식의 도서 구입이 아직은 나에게는 취미이기에 시간의 여유가 있으면 책방을 들리는데 때마침 뽑아 들은 책의 한 페이지에서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구절을 발견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복음을 주셨다. 복음은 나에 관한 것이기 이전에 우리에 관한 것이다. 나 자신은 우리 안에 있으며, 우리 없는 나의 복음은 오로지 나에 관한 복음이다. 나는 복음이 나를 위한 것이지만 그것을 넘어 나가 아닌 우리에 관한 것이라는 점이 기쁘다.” (88p)

이 구절을 보는 순간 책을 집어 들고 주저하지 않고 구입했다.

역사적 예수 연구의 권위자라고 소개한 스캇 맥나이트의 글을 읽으면서 갖고 있는 트라우마의 굴레에서 해방되는 느낌이라고 할까.

왠지 모르게 그렇게 시선이 집중되고 몰입하게 되었다.

나는 ‘토후 바-보후’(tohu va-bohu)였다. 즉 ‘혼돈하고 공허했다.’ (32p)

지금의 교회를 개척하기 이전 조직교회를 5년 섬기는 동안 나는 ‘토후 바 보후’ 그 자체였다.

신학을 하게 된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기대감과 목적함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동안의 목양의 현장은 바로 그런 기대감과 목적함을 이루며 아름답게 목양해 왔던 이 땅의 천국들이었다.

그런 과정과 결과만을 알고 있었던 순진했던(?) 나는 처음으로 왜 목회를 해야 하는가? 를 타의적으로 고민하게 만들어준 현장을 만났고, 사람이 참 무서운 존재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해줌으로 늦깎이 학생이 되게 해준 곳도 바로 직전 교회였다.

에둘러 표현했지만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들의 깊은 잔재들이 내 안에 남아 있었기에 그것은 나에게 쓴 뿌리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개척을 하면서 조금씩 아주 조금씩 이 상처들에서 벗어나고 있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지고 있는 쓴 뿌리의 척결은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순간순간 느끼는 것 때문에 아팠는데 스캇 맥나이트는 나에게 이런 아픔을 치유하는 은혜를 주었다.

나는 이 책에서 공동체, 실천, 포용이라는 단어의 신선함을 배웠다.

더 솔직한 표현으로 고백한다면 복음의 요체는 개인이라는 ‘나’에 대한 것을 뛰어 넘어 우리‘라는 공동체에 대한 적용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그 복음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맥나이트의 지론에 대하여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이 나의 모습이요 자화상이었다.

그러나 복음의 능력은 타인을 향한 포용의 은혜를 배제시켜서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는 저자의 도전이 가슴을 때렸다.

나는 이 점에서 내가 숭요하고 있는 포용의 은혜라는 점수를 매긴다면 제로 포인트였다.

너무나도 기막힌 일을 당한 나는 항상 피해자였고 상처를 받은 사람이었고 그래서 보상을 받아야 할 사람이었다.

이 고정된 피해 의식에서 나는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고 아니 더 심각하게 고백한다면 나아가서는 안 된다고 굳게 자물쇠를 잠근 삶을 살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책은 나에게 자물쇠를 풀 수 있는 열쇠를 부여해 주었다.

그것은 포용의 은혜였다.

나는 부서진 에이콘(하나님의 형상)을 갖고 있는 자라는 피해의식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큰 기여를 이 책을 통해 선물 받았다.

맥나이트는 이 책에서 보석 같은 도전들을 준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복음적 삶이라고 말할 때 ‘말은 너무 많고 행함은 부족한’ 모습에 염증을 느낀다.”

“우리 가운데 있는 복음이란 다른 이들과 세상의 유익을 위해 공동체의 정황 안에서 하나님과 연합하고 다른 이들과 교제하도록 인간을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목회를 하면서 다양한 복음의 정의를 배웠고 가르쳤지만 스캇의 이 정의보다 탁월한 정의를 보지 못한 것 같다.

저자는 이런 복음을 다른 표현으로 ‘포용의 은혜’라고 정의한다.

이 포용의 은혜는 필립 얀시가 ‘우리 마음과 이 세상 속에 있는 무자비의 굴레(cycle of ungrace)라고 부른 것을 끝장 낼 수 있는 것은 끝없는 은혜의 순환(cycle of grace)이라고 지칭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주장한 저자의 의견에 나 또한 동의한다.

그렇다.

은혜는 끝없이 순환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복음은 우리가 승인해야 할 관념의 목록이기 보다는 연주해야 할 음악과도 같다”는 저자의 통찰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는 말한다.

“실천 없는 선포는 위선이며 선포 없는 실천은 복음이 아니다.”

이 세대는 교회가 선포하는 것을 교회가 실천하라고 요구한다.

귀담아 들어야 할 세례자 요한의 목소리요 하나님의 목소리가 아닌가?

그래서 언젠가 나는 교우들에게 맥나이트의 이 말을 주일 설교에 인용한 적이 있다.

“당신이 감각할 수 있는 대상들 중에서 성체 다음으로 거룩한 것은 바로 당신의 이웃이다.”

“개인주의는 포용하는 은혜의 복음을 말할 때 가장 큰 걸림돌이다.”

저자는 부서진 에이콘들이 바로 예외 없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라고 몰아붙인다.

이해가 되는 부분이며 고개가 끄덕여 진다.

왜 저자의 이 역설에 항변하지 못하는가?

그것은 부서진 에이콘이라는 관계의 부서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관계의 부서짐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저자는 서슬이 시퍼렇게 선포한다.

관계의 부서짐을 회복하지 않는 한 복음은 성립되지 않는다고.

다른 이에게 적용하려고 하지 않는다.

내가 스캇 맥나이트를 통하여 치유를 받았다는 대목은 바로 이 점이다.

악몽에 시달리게 하던 이전 교회에서의 사역은 결국은 내가 부서진 에이콘이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저자는 이렇게 갈파했다.

“교회는 인간이 서로 다시 교제하게 되는 신앙 공동체다.”(p.99)

교회공동체를 목회하고 있는 현직 목사로서 이 명제에 부끄러운 사역을 해서야 되겠는가?

이것이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나를 때리고 또 때린 뒤에 저자가 나를 치유의 호숫가로 인도해 준 은혜가 되었다.

대체로 내적 갈등의 치유에 대한 글들은 목회 상담에 관련된 책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나는 신약을 연구하는 학자의 글을 접하면서 쓴 뿌리를 뽑는 행운을 얻었다.

우리기 살고 있는 관계가 파괴되어 부서진 에이콘들과 영적 좀비들이 우글거리는 이 시대를 치유할 수 있는 그리고 또 치유 받을 수 있는 무기가 포용의 은혜이다.

허덕이고 있던 나에게 보석 같은 해답을 신선하게 제시해 준 스캇 맥나이트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