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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완전한 복음2024-06-10 14:56
작성자 Level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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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지은이 매트 첸들러, 제라드 윌슨공저,
ㆍ출판사 새물결 플러스
ㆍ작성일 2013-07-20 16:50:56



매트 첸들러, 제라드 윌슨공저, “완전한 복음”, 새물결 플러스, 2013년

 

개그 콘서트라는 공중파 방송의 한 프로그램을 통해 급속히 확산 된 유행어 중에 ‘손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라는 멘트가 있다.

갑자기 그 멘트가 하고 싶어진다.

‘이강덕, 여기서 이러면 안 되는데.’

지금보다 한참 더 젊었을 때(?) 기세가 등등했다.

‘한국교회, 이대로 안 된다.’는 나름대로의 생각에 빠져들어 너무 한쪽으로 나의 사고를 고정화시켰던 시기였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지적 교만에 사로잡힌 것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사람들의 조언을 경청하지 않았고 또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던 때가 있었다.

그것은 나만이 가지고 있었던 잘난 자존심이라고 생각했던 어리석은 시기를 자랑스러워했던 못난 시절이 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조직 교회 안에서 전통 목회를 하는 목사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야성을 갖고 보수적인 행태에 대하여 비판의 날을 세웠던 적이 그 얼마나 많았던지······.

그렇게, 그렇게 살아왔던 젊은 날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이제 지천명의 나이를 넘긴 중년의 필드에서 그런 시기들을 보내며 목회의 후반전을 뒤돌아보니 아쉬움이 참 많이 남는 것이 사실이다.

가장 중요했던 것은 내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판단이었는데.

하나님의 교회의 목양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실수 없이 이루시는데.

그래도 이 아쉬움 속에 감사한 것은 목양을 나의 얄팍한 이성으로 재단하려고 했던 못난 자아를 근래 들어 조금씩 내려놓는다는 점이다.

금년 들어 우연히 radical discipleship 에 대한 책들을 섭렵할 수 있는 기회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카일 아이들먼, 프랜시스 챈, 스티븐 퍼틱 등등의 젊은 미국 목회자들의 ‘spiritual movement’ 에 대한 시대의 경향을 만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접하면서 그들이 말하는 종합적인 공통분모가 문자 그대로 교회가 ‘급진적 제자도’를 회복하는 것만이 다시 한 번 교회가 영적인 부흥을 경험하고 원형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할 수 있다는 강력한 운동임을 인지했다.

오래 전 지구 반대편에 있는 존 스토트 목사를 통해 포효하는 듯 한 예언적 글들을 통해 적어도 한국이라는 목회 현장에서 사역하는 목사로서 살아가는 것이 어떠해야 하는지 가늠하는 역설의 은혜를 받았던 것을 기억한다.

그런 기억이 생생한데 급진적 제자도를 전언하는 미국의 젊은 목회자들의 책들을 접하면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존 스토트 목사의 그 옛날 음성을 다시 듣는 듯한 착각을 받게 되었다.

왜 그랬을까?

고민하다가 깨달은 것이 있다.

아무리 진보적인 생각을 한다고 기고만장 했어도 소위 ‘복음주의’라고 명칭 되는 카테고리 안에서의 메시지가 가장 나의 신학적인 바탕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고민도 깊어졌다.

다음의 고민이었다.

“정말로 급진적 제자도의 외침들이 개신교회의 전 영역을 아우를 수 있을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다보니 내가 너무 유토피아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한기총, 한교협, WCC, WEA 로 분열되고 갈라져 있는 이 땅의 기독교회에 ‘급진적 제자도’는 혹시 또 다른 울림으로 메아리치다 사라질 소리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내 마음에 선행되는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한 가지만 문제를 제기하자.

이 글을 읽는 모든 지인들이여 부족한 사람에게 명쾌한 답을 주기를 소망한다.

‘복음’이라는 것은 과연 해석되는 것일까? 의 문제제기이다.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승리로 정의되는 ‘복음’이 해석되는 것일까?

복음은 명제가 아닌가?

그렇다면 복음이 해석되는 것은 근본의 문제가 아닌가?

목양의 현장에서 이 문제를 갖고 25년 동안이나 씨름해 왔다.

그리고 그 씨름의 여정에서 진보적인 신학의 토대를 가지려고 노력했던 나 역시 이 부분에서는 소위 골통 보수의 소리를 들으며 변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 있는 것 같다.

성경은 해석되는 것이 마땅하다.

성경 안에 있는 삶 역시 해석되는 것은 마땅하다.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에서 박사과정 코스워크를 할 때 민영진 박사의 ‘구약의 석의적 해석 방법론 세미나’ 를 수강한 적이 있었다.

당시 미국의 성토마스 대학 성서학 교수였던 양승애 박사의 논문을 갖고 세미나를 하면서 너무나 알찬 도전을 받았던 부분이 있었다.

성경 해석의 방법론은 역사적으로 세 가지의 틀 안에서 발전되어 왔다는 논거였다.

① ‘성서 뒤의 세계' 즉 성서가 형성되기 전까지의 역사의 초점을 둔 해석

② ‘성서 속의 세계’ 즉 성서 본문 자체에 초점을 두는 해석학적 방법

③ ‘성서 앞의 세계’ 즉 성서를 읽는 독자들에게 초점을 맞추는 방법

이 세 가지의 방법을 기초로 다양한 성경 해석이 가능한데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전술한 세 가지를 균형 있게 조화시켜 해석하는 것임을 양 교수는 분명히 했다.

동의한다.

그런데 답답함이 있다.

‘복음’에 대한 해석이다.

이것마저도 위에 설명한 해석학적인 방법으로 접근하는 것이 옳은가의 난제이다.

신학자들은 마땅히 그렇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목회자에게는 신학자들이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현장이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목회자들의 자기 합리화라고 공격을 해도 물러설 수 없는 목양의 마지노선이 있다.

그것은 해석의 차원이 아닌 ‘복음’이다.

서울 경동 교회 박종화 목사가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수가성의 여인을 해석하는 설교를 들으면서 은혜를 받았던 적이 있다.

야곱의 우물가에 물 길러 나온 여인은 품행이 좋지 못한 여인이라 남편을 6번이나 바꿔치기 한 것이 아니라 사마리아 지역에 팽배했던 여성 인권 유린의 희생양으로 성적인 노리개 감으로 농락당하다가 남성들로 하여금 버려진 여인이라는 해석이다.

당시 나는 박목사를 통해 참 많은 도전과 신선한 은혜를 경험했다.

이후로 나 역시 요한복음 4장에 등장하는 여인의 해석은 말 할 것도 없이 후자였다.

이 해석은 양승애 교수가 지적한 성경해석을 위한 방법론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해 주는 대목이다.

다시 논지로 가 보자.

‘복음’은 어떤가?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승리로 정의되는 ‘복음’은 어떤가?

이것 역시 해석해야 하는가?

개인적인 나의 질문이지만 심각하다.

미국 댈러스 지역에 있는 빌리지 교회를 시무하는 젊은 목사 매트 챈들러는 복음의 정의를 책 제목으로 정했다.

"the explicit Gospel"

저자가 사용한 이 제목을 번역자는 ‘완전한 복음’이라고 번역했다.

번역자의 의도는 저자의 의도를 반영한 듯 보인다.

챈들러 목사는 책의 전 영역에서 빈틈없이 복음을 방어한다.

한발국도 복음에 관한한 물러서지 않는다.

그는 땅에서 바라 본 복음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한다.

“누구도 하나님의 모사가 될 수 없다. 누구도 하나님께 충고할 수 없다. 누구도 하나님의 길을 곧게 할 수 없다. 그 어느 누구도. (p42)"

서슬이 시퍼렇다.

그는 또 이렇게 역설한다.

“성경의 중심은 나나 당신이 아니다. 하나님, 오직 하나님, 오직 하나님의 이름이다. 모든 것의 핵심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기에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있을 것이다. 부요가 깊으신 분, 지혜가 깊으신 분, 자애가 깊으신 분, 영광이 깊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성경의 메시지이다.(p51)"

챈들러는 조엘 오스틴의 죄의 지적이 없는 설교, 그리스도 없는 설교를 맹폭한다.

“죄에 대하여 말하지 않을 것이라면 복음에 대하여 입을 다물어야 한다. 왜냐하면 복음은 피범벅인 끔찍한 것이기 때문이다.(p88.)”

“사실 기독교계 전반에서 사람들은 십자가는 한 쪽으로 치워버리고 치욕과 피, 살점, 끔찍한 죽음에서 한 걸음 물러나 다른 무언가에 집중하려고 한다.(p89.)”

그의 복음에 관한 메시지는 타협 없이 이렇게 정점을 이룬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에 대하여 중립적인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사실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듣는 자로 하여금 불안한 상태에 처하도록 하는 것이다. 복음을 듣는 자의 마음은 그리스도께 다가서든지 아니면 멀어지든 반드시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다.(p95.)”

사실 이 대목을 접하면서 나는 위로를 받았다.

내가 목회를 하는 현장에서도 예레미야 시대의 길(吉)예언자 선포를 요구받을 때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이것이 작금의 시대를 목회하는 현장이다.

복음을 해석한다면 얼마든지 입에 맞게 해석할 수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러기에 ‘복음’을 해석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는 지금도 치열한 목양의 현장에서 날마다 투쟁하는 요소이다.

챈들러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자.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드린 제사라는 복음은 도덕주의의 초청이 아니라 참된 변화로의 초청이다.(p102)”

트레빈 왁스가 지적한 현대 교회에 침투한 ‘일그러진 복음’인 도덕주의 복음은 즉 성경을 도덕 교과서로 전락시키는 행위를 경계한다.

내가 받은 또 다른 전율하는 도전으로 들어가 보자.

“우리는 우리를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배를 받는다. 우리가 말씀 아래 앉아 그 말씀을 듣는 순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다스리신다. 그 말씀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은 자신의 자리를 찾는다. 이것이 위험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 선포가 인간의 영혼을 좌우 어느 한 곳을 향해 움직이게 하고 이 둘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그 마음을 굳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누구도 취미로 교회를 다닐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신앙의 중간 지대에 있는 사람은 없다.(pp106-107)”

그는 이렇게 도전한다.

“만일 당신이 생각하는 교회가 뷔페식당 같은 곳이 아니라면 다른 곳으로 가서 드십시오.(p110)”

통쾌하다.

통쾌하다 못해 짜릿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받고 기독교 문화에 목을 담근 채 헤엄을 치는 사람이 많다. 이들은 예수님의 전부를 바라지 않을 만큼만 예수님을 소유한다. 이런 경우는 이들이 종교적인 행위에 순응한 것이지 하나님의 성령으로 변화를 받은 것이 아니다. 이들은 듣고 있지만 듣지 않는다.(p.110.)

나도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우리가 복음을 복음이 아닌 것으로 부풀리거나 조정할 때 복음에 담긴 영적인 능력은 부인된다.(p124)"

이런 복음에 대한 그의 원론적인 도전은 이 책에 지천이다.

그는 악성 뇌종양 3기라는 죽음의 선언을 원색적인 믿음과 복음으로 이긴 간증을 갖고 있다.

살아 있는 간증자로 그는 이렇게 강력한 타협 없는 원색적인 복음을 선포한 뒤 그의 목양의 현장에서 소박한 소망도 내비친다.

“나는 빌리지 교회의 지체들에게 삶의 모든 영역으로 통하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통찰을 가르치고 싶다.(p269)"고 했다.

그는 목양의 현장에서 혼합주의에 빠진 교회의 위기, 그리스도가 빠진 복음의 위기, 문화가 우상이 된 교회의 위기, 복음 전도를 포기한 교회의 위기를 극복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 잃어버린 그리스도의 피, 하나님의 말씀, 새 언약의 약속을 다시 찾음으로 복음의 위력을 선포하고 싶다고 했다.

이것이 어찌 매트 챈들러만의 소망이겠는가?

이강덕 목사의 간절한 소망이기도 하다.

그는 책의 말미에 이런 외침을 남겼다.

“예수님의 교회여, 부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복음을 아는 교회가 되자. 성경에서 하라 하지 말라는 수칙들을 설교할 때는 모든 것을 다 이루신 십자가의 그늘 아래에서 할 수 있게 주의하자.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다짐하자.(p335)"

처음으로 돌아가자.

나는 조그마한 지방 소도시에 있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인지도 없는 교회를 목회하는 목사이다.

그러나 이런 목양지에도 살벌한 영적 싸움이 있다.

복음이 말하고 있는 영적인 부담을 그만 설교하라는 겁박이다.

힘이 든 것이 사실이다.

복음을 편안하게 재해석하라는 폭력이 즐비하다.

어떤 때는 흔들린다.

쉽게 목회하고 싶은 열망이 나를 송두리째 집어 삼키려고 한다.

그 때 한 개그맨의 유행어가 나를 때린다.

“이 목사, 여기서 이러면 안 되지.”

챈들러는 나에게 이것을 가르쳐 주었다.

바울의 고백이 다시 한 번 나를 뒤흔든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라디아서 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