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김난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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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오우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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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3-07-13 22:01: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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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난도저,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 오우아, 2013년. 주일 설교의 피 말리는 영적 씨름을 마치고 난 뒤, 김난도 교수의 글인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에 대한 나눔을 글로 옮기려고 하니 왠지 마음이 너무 가볍고 상쾌하다. 오해는 마시라. 김난도 교수의 글 자체에 대한 느낌이 결코 가볍다는 의미는 아니니까. 저자는 이 책의 말미에 에필로그를 기록하면서 100% 리얼한 현장 체험을 하나 소개한다. “이 책을 쓰고 있는 어느 날, 강남의 한 대형 서점에 갔다. 에세이 코너에서 새로 나온 책을 구경하고 있는데, 대학교 3학년 쯤 되어 보이는 학생 둘이 책 한권을 놓고 귓속말로 킬킬 웃는다. 열심히 보던 책을 도로 내려놓는데 곽금주 교수의 ‘도대체, 사랑’이다. 내가 추천했던 책이라 호기심이 발동해서 말을 걸었다. 나: 그 책 어때요? 학생: 재미있어요. 완전 제 이야기 같아서 찔렸어요. 나: 그럼 사야지. 왜 내려놨어요? 학생: 그냥요……. 옆의 친구와 또 킬킬 웃는다. 하긴 웃음이 많을 나이다. 마침 바로 옆에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놓여 있기에 용기를 내서 또 물어봤다. 모르는 사람에게 내 책에 대하여 물어보긴 처음이다. 나: 이 책은 읽어봤어요? 학생: 아니요. 나: 이 책 알아요? 학생: 예, 알긴 알아요. 그래도 안 읽었어요. 나: 왜요? 그러자 그 학생이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당당히 대답한다. 학생: 김난도씨를 안 좋아해서요. 나: ……. 그 사람 알아요? 왜 안 좋아해요? 학생: 예, 저는 깊이 있는 책을 주로 읽거든요. 할 말이 없어진 나는 어색하게 웃다가 한 마디 하고 자리를 떴다. 나: 그래요. 다음에는 좀 더 깊이 있는 책을 써볼게요. 아아, 나는 언제나 깊이 있는 책을 좀 써 볼 것인가? 에필로그를 읽다가 김 교수의 당시의 난처함과 당황함이 얼마나 컸을까를 십분 이해하며 그의 넋두리를 동의해 주었다. 그렇다. 글은 본인의 사상, 가치, 삶의 흔적들이 동반되는 종합 예술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멘토 목사이신 이재철 목사께서 그의 책인 ‘청년아 울더라도 씨를 뿌려야 한다.’ 에서 시인과 소설가 중에 위대한 작품을 내는 사람들은 50대를 넘어서야 한다는 지론을 핀 것에 대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김 교수의 책은 다행히 에세이다. 뭐 그리 대단한 삶의 농축이 필요하지 않다고 에둘러 자위할 수 있는 글이 에세이일 수 있다. 그러나 김교수는 상황이 조금은 다르다. 그가 쓴 글들의 테마가 대상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에서는 싱그러운 청춘들을 위한 글이었고 이번에 쓴 글은 그 다음 세대 즉 대학을 졸업하여 사회에 첫 발을 내딛은 신출내기 사회 초년병들이 대상이다. 말 그대로 어른이라는 명칭을 붙이기에는 미완성의 부분이 많은 대상들이다. 소위 88만원 세대라고 할 수 있는 아픔의 세대들이다. 그러기에 에세이이지만 나름 결론을 도출해 주어야 하는 부담감이 저자에게는 있었을 것이다. 아직은 미완성의 삶의 영역이 많은 사회 초년병들을 위한 힐링 페이퍼를 쓴다는 것은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울대학교 교수라는 대한민국 인텔리 계층의 대표 주자인 저자가 아울러야 하는 대상들은 그와는 전혀 다른 인생의 극단을 달리고 있는 고통을 이 땅의 민초들 전부이기 때문이다. 글을 읽으며 내가 선입견을 가진 것이 바로 이 점이었다. 김 교수가 근처에는 결코 가보지 못했을 극단적 절망을 경험하고 있는 게토들에 대하여 그의 글이 얼마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바로 이 점 말이다. 기우였을까? 김교수의 글은 대체적으로 사회의 첫발을 내딛은 초년병 어른들에게 용기가 되는 상당한 양질의 내용들이 소개되고 있다. 특히 저자와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계층의 젊은이들에게도 보편적인 소망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는 그런 나름의 감동이 있다.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몇 가지만 나누려고 한다. ‘아모르파티’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가정에 불행을 당한 젊은이에게 주는 메시지는 ‘아모르파티’ 즉 네 운명을 사랑하라는 지침이었는데 상투적인 것처럼 들릴 수 있는 조언을 토대로 다시 일어선 그 젊은이의 이야기를 저자는 소개한다. 그 젊은이가 아모르파티에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저자의 고언에 진정성이 있는 힘이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어른들의 힘겨운 저글링인 트릴레마(tri-lemma) 즉 3중고를 읽으면서 감정이입이 되었다. 직장, 가정, 자아에 겹쳐져 있는 삶의 두께에서 버겁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 어찌 30대에만 있으랴! 오히려 5학년 3반에 입학한 나는 지금도 치열하게 그 싸움에 허덕이고 있는데. 설상가상으로 나는 목사라는 한 꺼풀을 더 쓰고 있는 4중고에 기겁하고 있는 것을 본다. 그러나 어쩌랴! 이것이 내 운명인 것을. 그래서 나도 동의했다. 아모르파티에 동참하기로. 책의 중반에 기록된 인생의 하인리히 법칙은 나를 또 한 번 경책하게 했다. “1:29:300의 법칙” 미국 보험회사의 관리 감독관인 하인리히는 노동재해 사고를 분석해 보니 중상자 1명이 나온 사고에는 약 29명의 경상자가 그리고 운 좋게 화를 면했지만 300명 정도의 같은 원인으로 인하여 부상당할 뻔 한 잠재적 상해자가 있다는 이론이다. 역으로 말하면 1번의 중상이 있기까지 29번의 미미한 비슷한 사건이 있었고 300번의 symptom 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회학적인 용어로 하인리히 법칙은 작은 징후에도 철저히 대비하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학술적인 용어로 발전했다. 저자는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 나오는 말을 인용한다. “그의 인생에서 죄를 범했을 때마다 확실하고 즉각적인 처벌을 받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처벌은 정화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가 아니라 ‘우리의 불의를 벌하여 주옵시고’ 라고 하는 것이 의로운 신에 대한 인간의 기도이어야 했다.” 목회를 하는 목사로서 정말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대목이다. 오늘 무사히 넘어간 잘못이 다행이 아니라 불행이라는 것을 접하면서 다시 한 번 옷깃을 여미게 한다. 목양의 현장에서 무뎌진 자아를 경성하게 하는 귀한 도전으로 적용하려고 한다. 또한 자주 넘어지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유명한 경구를 하나 김 교수는 소개한다. 8,000미터가 넘는 히말라야 14좌를 세계 최초로 완등하고 그 중 최고봉인 에베레스트 산을 홀로 무 산소 등정을 해 '세기의 철인'으로 불리는 전설적인 등산가 라인홀트 매스너의 이야기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머리가 버티는 한 다리는 견딜 수 있다." 심장이 뛰었다. 나 또한 끝까지 머리도 뜨거운 목사, 그리고 그 뜨거움 때문에 심장은 다 타들어가는 목사로 살고 싶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인생은 반드시 반전이 있고 성공을 할 수 있으며 성공한 뒤의 인생을 준비하라고 까지 친절하게 일러 준다. 그러기 위해 신발을 가지런히 하는 디테일한 삶을 계획하고 살아야 함도 역설한다. 그의 이런 긍정의 모드는 책 여기저기에 지천이다. 김 교수의 글을 읽고 그의 삶의 족적들을 반추하며 쓴 글들을 접하면서 목사로서 어쩔 수 없는 괴리를 첨언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이것은 요즈음 대세인 김난도 교수의 글들이 많이 지쳐 있는 현대인들을 열광하게 하는 용기를 주는 테제들이 있지만 시나브로 목사가 보는 몇 가지의 잔소리처럼 들릴 것이다. 그러나 그 잔소리를 늘어놓지 않으면 직무유기를 한 것 같아 욕먹을 각오로 내던지고 아쉽지만 글 나눔을 마치려고 한다. 지금 서평을 쓰고 있는 시간이 7월 16일 토요일 오후 9시 50분이다. 즉 이 글을 쓰고 있는 다음 날이 주일이다. 하여 주일 설교에 그의 글 한 대목을 인용했다. 소개한다.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출간되자 만나는 중년마다 내게 말했다. 중년도 아파요. 아픈 중년을 위해 책도 써주세요. 청소년들은 또 이렇게 말했다. 청소년도 아파요. 아픈 청소년을 위한 책도 써주세요. 아내의 친구들은 또 그렇게 말했다. 주부들이 제일 아파요. 아픈 주부들을 위한 책을 써주세요.” 김난도 교수는 글 끝에 이렇게 사족을 달았다. “도대체 이 나라에서 아프지 않은 이, 누구란 말인가? 그렇다. 인생이 아픔이었던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말이다.” 그렇다. 정말로 밖으로 나가면 죽겠다는 소리가 살겠다는 소리보다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아픈 시대임에 틀림이 없다. 이 글을 설교에 우리 교우들에게 소개하면서 교우들에게 이렇게 끝을 맺으며 설교를 마무리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저는 이런 글을 읽을 때마다 심장이 쿵쾅거립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이렇게 아픈 데 그리스도인들은 뭐하고 있는가? 에 대한 도전 때문입니다. 책으로 아픔이 해결됩니까? 청춘, 중년, 청소년, 주부, 심지어 노년들을 위한 힐링북(healing book)이 나온다고 그 아픔들이 치료되겠습니까? 치료되지 않습니다.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healer 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일어서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일하시자는 요청을 듣고 분연히 일어서야 합니다. 당신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인내하시면서 일하시기를 요청하시는 바보 하나님의 요청에 반응하십시다. 그리고 일어나 이사야처럼 아파하는 우리들의 열방으로 나아가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수의 복음을 선포하십시다. 이 땅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는 완전한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네덜란드 개혁교회 신학자인 수상까지 역임한 아브라함 카이퍼 박사는 그의 저서인‘영역주권’(Sphere Sovereignty)에서 엄청난 선포를 선언했다. “세상의 모든 영역 가운데 그리스도가 주인이 아닌 영역은 단 한 부분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세계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영역의 창조주이기 때문이다. 이 세계는 다 하나님의 것이고, 그리스도의 것이며, 우리들의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영역을 회복함에 있어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도구로 사용하신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한다.” 영역주권에 대한 신학적 논쟁은 아직도 첨예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카이퍼의 말에 동의한다. 하나님의 통치를 거절하고 기피하는 세상이기에 병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모두가 아파하는 것은 아닐까? 김난도 교수는 이 책의 프롤로그에서 목사인 나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화두를 던졌다. “거리에 나가면 약도가 있습니다. 길을 찾을 때 당신은 지도에서 무엇부터 찾나요? 당신이 가장 먼저 주시해야 할 것은 'You are here' 라고 쓰인 현제 위치입니다. 아무리 정교하게 각 건물의 위치를 표시해놓았더라도 지금 여기의 좌표를 알려주지 않으면 지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어디에 존재하고 있는지 'I am here'를 찾지 못하면 목표도 실행계획도 무의미합니다. 이 책은 갓 어른이 되어 서먹한 사회의 낯선 거리에 들어선 당신의 'You are here'를 비추는 거울이 되고 싶습니다.” 책을 소개하는 프롤로그로는 김난도 교수의 일견이 그럴듯하지 않은가? 그러나 읽다가 직업의식이 발동했다. “예끼, 어디 감히!” 김난도 교수가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 인기 있는 멘토인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의 책이 감히 낯선 거리에 나온 젊은이들을 위한 완벽한 'You are here'일 수 있겠는가? 당신의 자리가 어디인지를 알려주는 이 땅에 존재하는 유일한 지침은 복음뿐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천 번을 흔들리고 있는 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외치고 싶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이 고백 안에 있는 자는 결코 흔들리지 않을 텐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