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김기석 |
---|
ㆍ출판사 | 한국기독교 연구소 |
---|
ㆍ작성일 | 2013-06-29 07:20:48 |
---|
김기석의 “가시는 길을 따라 나서다.”를 읽고 (한국 기독교 연구소 간, 2009년) 목사로 살면서 소원이 하나 있다면 가급적 빨리 은퇴하는 것이다. 해보는 소리가 아니라 진정성이 있는 고백이다. 그 이유는 설교의 부담감 때문이다. 들었던 풍월로 설교를 하자면 왜 못 하겠나 싶겠지만 그것은 목사로서 가장 부끄러운 일이고, 설교를 하기 가장 힘든 이유는 설교와 삶에 대한 거리감 때문이다. 서평자는 이런 부족함 때문에 행여나 설교 도적질이나, 가위질의 유혹에 빠질 것을 염려하여 가능하면 설교의 횟수를 줄이려고 몸부림치거나 기를 쓴다. 더불어 기본적으로 해야 하는 일체의 설교를 원고로 작성하여 섬기는 교회 홈페이지와 개인 포털 사이트 블로그에 공개한다. 어떤 의미로 보면 자살행위와 같은 이런 모험을 왜 할까? 설교의 자신감이 있어서가 아니라 공부하지 않으려함에 대한 채찍질이다. 누군가에게 설교를 공개한다는 것은 공부하지 않거나, 노력하지 않은 허접한 설교를 하지 않겠다는 의지 표명이다. 왜? 공개된 비루한 설교의 내용들은 당장의 비난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올 것을 알기 때문에 그것을 노린 자기 경계의 마지노선으로 택한 비장한 방법이다. 해서 피가 마를 때가 많이 있다. 자, 여기에서 장황한 서론을 끝내고 이 말을 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며 본론에 들어가고자 한다. 설교에 대한 압박과 부담이 어찌 서평자만의 주절거림일까? 본 서평의 저자는 손석춘 선생과 나눈 대화집인 ‘기자와 목사, 두 바보의 이야기’에서 설교하는 목사의 애환을 이렇게 갈파한 적이 있었는데 공감했다. “가끔은 주일을 맞이하는 것이 고문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매주 설교를 준비하기도 어렵거니와, 그 말이 사람들의 가슴까지 도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절감하기 때문입니다. 설교자의 가장 큰 번민은 입을 다물고 싶을 때조차도 무언가를 말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삶을 통해 뒷받침되지 못하는 말의 부박함이 떠오를 때면 어딘가로 달아나고 싶어집니다.” (p.236) 그러고 보면 서평자의 고민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사유하고 성찰하고 있는 목사라면 거의 대부분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동소이함을 다시 한 번 공유해 본다. 여하튼 김 목사께서 그렇게 힘들어 하는 설교를 처음 글로 만났다. 김기석 목사의 주일 설교 묶음을 한국기독교 연구소에서 출간했다. 책 제목은 김 목사의 글 레테르인 ‘길’이라는 단어가 역시나 또 삽입된 채로 출간되었는데 제목이 귀했다. “가시는 길을 따라 나섰다” 책의 구도는 lectionary 에 맞게 설교를 한 내용을 발췌했지만 평화 운동가이자 생태주의자인 김 목사의 대표적인 설교의 형태여서 그런지 JPIC에 대한 모드가 물씬 풍기는 설교들이 담겨져 있다. 글을 읽어나가는 순간, 정제되어 있는 그의 영성과 지성 그리고 감성까지 함께 아우르고 있는 깊은 내공을 본다. 그리고 이런 설교가 탄생되기까지 그가 고백했던 그대로 얼마나 많은 산고가 있었을까 하니 괜히 짠해지는 느낌이다. 몇 년 전, 대구 성서 아카데미의 원장으로 있는 정용섭 목사가 서슬이 시퍼런 성서 해석의 칼날을 휘두르며 대형교회 목회자들과 인지도가 있는 설교자들을 넉 다운 시킨 난장이 있었다. 이후 표면적으로 나타내지는 못하였겠지만 아마도 성서해석의 갖춘마디를 갖고 있지 못한 설교가자은 나름 곤혹스러운 긴장감들이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틀에 박혀 박제된 설교를 해도 막혀 들어가던 시대, 일부 상업적 성향이 농후한 선동적인 설교들에 오히려 열광했던 시대는 이제 물 건너 간 느낌이다. 목회자들의 설교내지는 집필한 책마저도 표절의 구석구석을 찾아내는 시대이기에 말이다. 하기에 신학대학 교수들의 학술 서적 표절까지도 이제는 도마 위에 오르는 시대이니 무슨 부연 설명이 더 필요하겠는가? 본 서의 저자는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학부를 졸업했다. 이후 대학원에서 공부한 것이 그의 전부의 이력이다. 그 흔하고 흔한 목회학 박사 학위도 없는 그야말로 근래 목사의 스펙으로 평가하자면 평범함이라는 잣대 그 이하이다. 그러나 누가 그의 이력에 감히 돌을 던질 수 있으랴 싶다. 현존하는 대한민국의 현장 목회자 중에 그와 걸 맞는 독서력을 갖고 있는 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 그가 넘나드는 동서양의 고전적 담론들을 이해할 수 있는 동지가 과연 얼마나 될까? 이런 지성에만 찬사를 보낸다면 어떤 의미로 보면 또 다른 편견일 수 있기에 차제에 서평 속에서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다. 그에게는 지성을 빛나게 해주는 영성이 있다. 이 영성은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성령에 의해서 강요되고 조작된 영성이 아니다. 그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생태주의의 영성을 갖고 있다. 그는 말(末)보다는 본(本)을 소중히 여기는 본질적 영성의 소유자이다. 항상 그는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고 그를 소중히 여기는 겸손함이 있는 목회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단호한 매서움이 있다. 비 진리와 타협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이런 영성을 가지고 있는 그의 설교 속에 빛난 명제들을 살펴보자. 저자는 책의 가장 앞부분에 생명은 소명임을 밝히며 이렇게 가슴으로 말했다. “오늘의 사람들은 입구와 출구를 잃어버렸다고 말았다.” 기막힌 통찰이다. 입, 출구를 잃어버린 이런 비극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네의 삶은 빡빡하지 않을 수 없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들의 삶이 언제는 빡빡하지 않았던가? 듣도 보도 못한 88만원으로 상투 잡는 세대, 열정 pay 라는 단어로 ‘갑 질’하는 시대, 이로 인해 ‘삼포’라는 단어가 그리 흔하지 않았던 내 젊음의 시대와는 달리 이제는 진짜로 젊은이들이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것이 대세가 된 시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저자는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진부한 말을 한다. “지금, 여기’(here and now)의 삶을 충실히 살아내면 된다.” 나는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이 단지 젊은이들에게만 자문해준 내용이라고 보지 않는다. 현대인들 모두가 듣고 천착해야 할 삶의 키워드라고 생각된다. 왜 그런가? ‘지금, 여기’는 과거의 삶이 드러나는 현장이고, 내가 ‘지금 여기’라는 삶의 정황을 어떻게 살아내느냐에 따라 미래에 그려질 자화상의 오늘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 모두는 잘 살아야 한다. ‘지금 여기’를 잘 살아내야 한다는 그의 정의는 추상적이지 않다. 상당히 구체적이다. “잘 산다는 것은 ‘보내신 분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일’이다.” 서평자와 독자들이 살아가고 있는 오늘의 아픔은 보내신 이의 뜻을 무시하고 거부한 데에서 시작된 비극이요 참극이다. 하나님의 소리가 죽어 있는 지금, 여기에서 잘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하나님의 소리를 듣지 않으니 사람의 소리가 하나님의 소리를 대신한다. 하나님의 소리를 듣지 못하니까 랜덤으로 살아도 괜찮은 것은 마땅하다. 하나님의 소리가 불편해 진 시대는 무엇을 해도 모든 것이 가능한 무시무시한 시대이다. 해서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현대판 사사의 시대요, 기브아의 시대인 셈이다. 그러나 이대로 무력할 수는 없다. 그리고 물러날 수도 없다. 저자는 이 시대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다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대로의 회귀를 강력 요청한다. 그 예로 잘 살아낸 믿음의 선배 중 캘커타 테레사 수녀의 삶을 소개한다. 테레사 수녀에게 어떤 기자가 물었다. “수녀님은 뭐라고 기도하십니까?” 그 질문에 테레사 수녀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저는 듣습니다.” 기자가 의아해서 다시 물었다. “그러면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수녀는 다시 대답한다. “그 분도 들으세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내용을 들으면 생명이 움튼다. 그 생명의 소리를 들으면 부자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잘 살게 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미션이 생명을 소중이 여기는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이판승 법정은 4대강 사업을 가리켜 무지의 극치라고 탄식했다. 자연이 아파한다는 것은 생명이 아파한다는 것인데 오늘 생명이 아파하는 소리에 마치 스데반이 행하는 설교에 귀를 닫고 있던 유대인들처럼 귀를 닫고 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은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삶이다. 이런 면에서 저자가 ‘지금, 여기’ 를 잘 살아내는 것이 미션이라고 고집한 것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또 하나를 접해 보자. 저자는 가르치는 자에 대한 섬뜩한 경고를 내린다. 주현절기에 행한 그의 설교는 단호하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하나는 자기가 어리석은 줄 아는 진짜로 지혜로운 현자이다. 이 사람은 항상 자기의 부족함 때문에 배움에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진리에 있어서 항상 부족함을 느끼며 갈망하는 사람이다. 반면 또 다른 한 사람은 자기기 지혜로운 줄 아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는 배우려 하지 않고 항상 가르치려고만 한다. 깊이 경청하거나 세심하게 관찰하려 하지 않고 가볍게 듣고 즉각 반응한다.” 저자는 아프지만 솔직히 진단한 내용을 고백한다. 오늘의 기독교인들, 특히 목사들이 바로 이 두 번째의 부류에 있다고. 서평자 역시 목사이기에 저자의 이 독설에 기분 좋을 리 없다. 그러나 기분은 좋지 않지만 역설적으로 기분 좋게 받으려고 한다. 부인할 수 없는 정답이기 때문이다. 오늘, 나 역시 가르치려는 것에 타성이 붙어, 듣는 것과 배우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굳어진 자아를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자의 일침은 나에게 중요한 선생님이지 않겠는가? 저자는 이런 값있는 고언을 아끼지 않고 나누어준다. “공자도 세 사람이 함께 가는 길에 반드시 선생이 있게 마련이기에 그 중에 좋은 점은 따르고 나쁜 점은 고친다고 했다.” “영적인 교만이라는 영혼의 바이러스가 중세기의 페스트처럼 번져 가고 있다. 낮추고 또 낮추시오. 자기를 또 지우고 지우시오. 함부로 가르치려고 하지 말고 가리켜 보이시오. 그것이 영적인 바이러스에서 스스로를 지키는 일이다.” 저자는 이 설교의 텍스트를 마태복음 23:13-15절로 선정했다. 그의 도발이 매운 회초리로 내 종아리를 때린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글을 읽다가 도무지 서평에서 뺄 수 없었던 가지를 하나 더 추임하려고 한다. 저자는 마리아와 마르다 자매의 일화를 통해 이런 지침을 그의 영성의 우물에서 건져 올렸다. “흐르는 물에 우리 얼굴을 비추어 볼 수 없는 것처럼, 마음이 뭔가에 쫓기듯 분주할 때 우리는 본질적인 것을 놓치기 쉽습니다.” 저자가 왜 화두를 던졌을까? 그는 계속해서 본인이 던진 화두에 대한 책임을 진다. “우리가 물어야 하는 것은 교회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가? 혹은 얼마나 많은 이를 돕는가? 가 아니라 그 모든 일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하는가? 입니다. 근본이 서면 나머지는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시인 박노해가 쓴 ‘다른 길’을 읽었다. 그가 프롤로그에 남긴 금언이 기억에 있다. “역사상 가장 풍요롭고 똑똑하고 편리해진 시대에 스스로 할 수 있는 인간 능력을 잃어버리고 모든 것을 돈으로 살 수 밖에 없는 무력해진 세계에서, 그들은 내 안에 처음부터 있었지만 어느 순간 잃어버린 나 자신의 모습이었다.” 시인은 본질은 인간에게 있음을 직시한다. 헌데도 인간이란느 본질은 배제되고 돈이라는 우상에게 길들여져 있어서 ‘나’라는 인간을 잃어버린 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어처구니없음을 시인은 통탄한다. 비 그리스도인인 시인의 인간 통찰에 대하여 전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꿰뚫고 있는 본질에 대한 끈질긴 애정에 응원을 보내고 싶은 마음은 동일하다. 왜? 서평자도 아주 빈번하게 본질을 우습게 여기며 너무나도 당당하게 살아가는 뻔뻔함에 소스라치게 놀랄 때가 많기 때문이다. 나는 목사로 참 많은 일을 하는데, 나는 목사로 이 정도는 하는데, 나는 목사로 이런데, 얼마나 천박한 짓거리인지... 본질은 이리도 너무나 중요한데 비 본질이라는 편리함에 속수무책을 당하고 있는 교회, 그리스도인, 그리고 나를 뒤돌아보게 저자는 이 대목의 설교의 제목을 이렇게 정했다. “주님 발아래 앉아” 뭔가를 들킨 느낌인데 그의 직언이 귀하고 또 귀하다. 그의 이어지는 설교에 담긴 어록들을 몇 가지만 동냥하고 글을 맺으려 한다. “누가 꾸짖을 수 있나? 꾸짖음은 자기욕심을 여읜 사람, 그래서 맑아진 사람만이 할 수 있다.” “바다는 가장 낮은 곳에 있기에 세상의 모든 물들을 받아들인다. 바다가 바다인 까닭은 다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삶에는 자아가 없다. 나 좋을 대로가 없다는 말이다. 다만 남 좋을 대로가 주님의 관심이다.” “교회를 처음 나가면서 예수님을 머리로 이해하려고 했을 때만 해도 예수님은 나에게 참 멋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주님을 존재 전체로 만났을 때 그는 내 영혼을 밝히는 등불이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여느 사람과 다른 방식으로 즉 내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이웃과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웃을 바라보는 그 눈으로 우리를 보신다는 유대인의 속담이 있다.” “저는 신앙생활이 조율의 과정이라는 말을 자주한다. 조율이란 악기의 음을 표준음에 맞추어 고르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연주자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마음과 눈으로 우리의 마음과 눈을 조율해 나아가야 한다.”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우리 속에 있는 빛을 가리고 있는 것들을 닦아내야 한다. 무엇으로 닦을까? 하나님의 말씀과 이웃을 향한 눈물이다.” “함석헌 선생은 예수님의 위대한 힘은 엎드림에서 온다고 했다.” “하나님이 인류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은 힘 있는 자들의 독선을 경계하기 위함이었다. 힘이 정의인 세상에서는 하나님이 눈물을 흘리고 계신다.” “기득권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무서운 것은 밑바닥 사람들의 깨어남이다.” “자기와 싸워 이긴 사람들은 기쁨을 아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이겨 놓고 싸우는 사람이다.” “가끔 물 위를 걷다가 바다에 빠진 베드로를 생각하며 싱거운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는 왜 빠졌을까? 물보다 무거워서 빠졌다. 그를 무겁게 한 무게는 자아의 무게였다.” “구(久)즉(則)통(通)이라 했다. 꾸준히 계속하다가 보면 어느 순간 열린다는 뜻이다. 사람의 허물을 보지 말고 아름다움을 보자.” “해방신학자 구티에레즈는 이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존재라 했다. 사랑은 자기 밖으로 나가는 능력이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내려온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는 자기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다. 시체 말로 사람들 앞에 광내는 재주나 취미가 없었던 게죠.” “어느 날 테레사가 한 어린아이의 고름 든 몸을 만지면서 치료를 하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다가와 물었다. 수녀님은 잘 사는 사람, 평안하게 사는 사람,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 그런 사람들을 바라보면 시기심 같은 것이 없나요? 정말 이 삶에 만족하세요? 수녀는 조용히 대답했다. 허리를 굽히고 섬기는 사람은 위를 쳐다 볼 시간이 없답니다.” “사용하는 언어를 바꾸는 순간 영혼을 바꾸게 된다는 말을 두렵게 기억한다.” “어느 날 테레사 수녀가 몇 날을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고 있는 가족이 있다는 말을 듣고 음식을 가지고 그 집에 방문했다. 음식을 받아 든 그 집 아이가 잠시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왔다. 어디에 다녀오니? 옆집 친구도 며칠을 굶었거든요. 빵을 주고 왔어요. 이것이 기적이다. 빵이 기적이 아니라 나눔이 기적이다.” “신앙생활은 지양과 지향 사이에 있다. 자기를 부정하는 것은 지양이요 주님을 모시고 주님을 향해 가는 것은 지향이다.” “마하트마 간디는 힌두교도였지만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라고 질문하면 항상 산상수훈처럼 살라고 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진행형이어야 한다.” 그의 설교는 나를 흥분하게 한다. 결국은 주군을 향한 사랑이라는 결론을 내려주어서이다. 그의 설교는 활자화되어 있다. 헌데 그의 설교를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들었으니 이제는 삶으로 활자화하는 부담은 내 몫이다. 무겁다. 그러나 행복하다. 나를 마치 신혼 초에 가졌던 에로스적인 흥분을 목회자로 살아가는 중년의 파토스적인 열정으로, 또 노년에 어떻게 목회자로 살아가야 하는지의 방법이 에토스적인 절제로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 잘 살아내야 하는지를 알려준 선생님이었기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