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한병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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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문학과 지성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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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3-06-27 09:54: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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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의 “시간의 향기”(문학과 지성사, 2013) 를 읽고, 개신교 목사로 사역하면서 가톨릭의 종교성과 예전에 대하여 호의적으로 말하면 회색주의자라고 비난 받기 일쑤이다. 색깔을 분명히 밝히고, 정체를 분명히 하라는 압박이다. 물론, 가톨릭의 예전과 교리적인 내용을 무분별하게 용인하거나 전체를 긍정적 모드로 수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들의 예전적인 요소들을 보면 못내 부러운 것이 있다. 靜的(정적)인 요소들이다. 물론 서평자가 지금 논하고 있는 ‘정적’이라는 단어는 미국에 대표적인 크리스천 블로거인 트레빈 왁스가 일그러진 복음(Counterfeit Gospel)이라고 일축한 정적주의(quietism)의 개념으로의 ‘정적’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가톨릭의 예전 등에 나타난 부러운 정적인 요소들은 가장 단순하게 표현하지만 ‘시끄럽지 않음’, ‘빠르지 않음’ 이다. 나는 가끔 내가 살고 있는 제천에 소재해 있는 ‘베론 성지’를 일부러 찾는다. 분주함에 시달린 육체의 곤함을 고즈넉하게 너무 고요한 베론 성지에 찾아가 힐링을 받고 싶은 것이 두드러진 이유이지만 그곳을 찾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곳에 가면 시간이 멈춘 것 같은 황홀함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순교자 최양업 신부를 기념하여 세운 성당 안에 들어가면 시간의 멈춤은 절정에 다다른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가장 한국적인 얼을 담은 것처럼 보이는 성화, 성물, 그리고 성당 안의 고요함이 그렇게 압도한다. 미사가 있는 어느 시간과 운 좋게 맞닥뜨리면 미사 단에 타오르고 있는 촛불과 스태인드글래스에서 비추는 빛이 사람을 침묵의 자리로 초청한다. 그 시간은 참 경이롭고 아름답다. 개신교적인 예배에서 찾아볼 수 없는 신비로움이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느끼는 시간으로 착각이 들 정도 엄숙하다. 오래 전, 문화 인류학자이고 환경 운동가인 쓰지 신이치가 자기의 책에서 이렇게 말한 것을 읽었던 적이 있다. “전기를 끄자. 전기를 끄는 일은 무엇보다 어둠을 되찾는 일을 의미한다, 그 어둠 속에서 달을 보고, 별을 보고, 반딧불을 보자. 그리고 촛불을 켜보자.” 일반적으로 ‘어둠’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驚氣(경기)하며 적대시하는 것이 개신교인들이기에 신이치의 말을 수용하는 것에 대하여 거부감을 갖겠지만 서평자는 그의 말에 동의했다. 어둠이라는 개념을 복잡하게 교리적인 차원으로 해석하려고 들이대지 않고 단순히 하나님이 창조하신 빛과 어둠의 양 측면에서 인간에게 쉼을 주는 창조적 상태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어둠이라는 공간 안에서 자행되는 일체의 탐욕적인 행위에 대한 지지가 아니라 어둠을 되찾자는 신이치의 一聲(일성)을 쉼과 느림으로의 회귀라고 이해했다는 말이다. 언젠가 리젠트 칼리지의 영성신학자인 미르바 던이 ‘안식’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메누하’를 단지 육체적인 쉼을 말하는 단어로만 해석하지 않고 ‘나의 전 존재의 진정한 쉼’이라고 해석한 것을 아주 의미 있게 받아들인 적이 있었다. 인간의 전 존재의 쉼이 진정한 안식이라면 인간이 그렇게 진정한 쉼을 영위할 수 있는 공간은 혹시 어둠이라는 것을 아닐까 하는 생뚱맞은 추측을 서평자는 진진하게 해 본 적이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그것이 상징이고 신비적인 활동이라고 폄훼를 한다고 하더라도 가끔은 어둠의 영역에 혼자 있으면서 촛불을 킬 때 하나님의 심오한 임재를 개인적으로 나는 많이 느끼곤 한다. 서평자는 그 현장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데 그것은 바로 시간이 나를 위하여 멈추어 준 것 같은 감동이다. “빠름 빠름 빠름” 이 외침은 상업적 광고라는 것이 태생적으로 분명 한시적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어 서 당연히 이제는 많이 식어진 느낌이 있지만 한 동안 선풍적인 인기몰이에 성공했던 우리나라 대표적인 모 브랜드의 휴대폰 광고 로고였다. 타 회사의 제품에 비해 은연히 비교가 안 될 정도의 빠른 속도를 갖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경쟁력으로 한국인 습성에 기막히게 파고드는 데 성공한 광고 전략을 펴서 대박을 터트린 로고이다. 이 광고의 중독성은 나도 모르게 IT 계통의 제품들인 컴퓨터, 휴대폰을 살 때, 항상 얼마나 빠른가? 를 최우선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것을 보면 실로 막강하다. 문제는 광고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차별적으로 주입되는 공격에 속수무책이라는 점이다. 현대는 아날로그라는 수단을 역사의 한 과거로 되돌린 지 이미 오래되었다. 가장 서민적인 가전이었던 텔레비전의 송출 방식이 디지털로 완전히 바뀐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이제는 그 디지털 방식의 송출함까지도 속도와 선명성 경쟁에 사활을 걸고 있는 다양한 콘텐츠들이 개발되고 시행되고 있으니 참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불과 몇 십 년 전, 텔레비전 화질이 잘 나오게 하기 위해서 지붕 위에 올라가 전파를 잘 타는 쪽으로 안테나를 돌려놓으려고 안방에 있는 아들에게 소리를 질렀던 일은 전설의 고향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가 되었다. 참 좋은 세상이 도래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아이러니하다. 서평자는 이런 빠른 속도의 시대에 느린 것이 좋으니 말이다. 그러니 시대의 감각 면에서는 빵점이다. 완벽한 디지털 돌비 시스템이 선물해 주는 아이돌의 스테레오 음악보다 찌지직거리는 턴테이블에서 흘러나오는 안치환의 LP 레코드판 음악이 훨씬 더 좋으니 말이다. 정치도 버전 3.0의 시대가 되었는데 나는 왜 아직도 가끔은 1.0에 머물러 있는 것이 좋을까? 소녀시대, 시크릿, 2PM, 여자친구(미안하다. 아는 아이돌 그룹의 전부라서)들이 부르는 가사 전달이 잘 안 되는 노래보다 이야기가 있는 70,80의 노래를 좋아하니 말이다. 왜 이런 것들에 열광할까? 나이 때문일 것이다.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의 답은 결코 아니다. 내가 일련의 이런 아날로그식의 것에 애착을 갖는 것은 ‘머무르고 싶기 때문이다.’ 나의 흘러간 시간의 족적들이 멈추어지지 않는 것에 대한 반발 때문이다. 시간을 붙들어 놓고 싶은 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 시간은 나의 능력으로 붙들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도무지 붙들 수 없는 시간을 붙들고 싶은 욕망의 표출이 아마도 과거성의 회귀라는 테제로 고착화시키고 싶은 것이리라. 이것을 이미 알았을까? 장석주가 이렇게 말한 것은. “나이가 드니 어둠 따위는 도무지 무섭지 않다.” 우리 교회 이름을 잘못 지었나? 재독 철학자이자 가톨릭 신학자인 한병철 교수의 ‘피로사회’를 읽고 받은바 도전이 있어 그가 실제로 ‘피로사회’보다는 유럽에서는 먼저 발간한 ‘시간의 향기’에 도전하고자 책을 집어 들었다. 읽는 내내, 철학적인 학문적 지식의 일천함으로 인해 큰 집중력을 요했지만, 반면 철학적 신학의 통찰력이 얼마나 중요하고 긴요한지를 재삼 확인하는 시간이 되었다는 점은 소득이다. 한 교수가 도전하는 이 책의 논지는 ‘시간의 위기’이다. 저자는 이 시대가 시간의 위기를 겪는다고 진단한다. 이 정의는 추상적인 것 같지만 실제적이다. 어떻게? 다양한 시간적인 혼란과 착오를 초래하는 반시간성으로 인해 오늘 우리들이 만나는 시간에는 질서를 부여하는 리듬이 없음을 분명히 한다. 이로 인하여 시간은 혼란에 빠진다고 갈파한다. “시간이 리듬을 잃어버린 채 받침대도 방향도 없이 막막한 곳으로 흘러가 버린다면, 어떤 적절한 시간도, 어떤 좋은 시간도 있을 수 없다.”(p,21) 이렇게 야기된 시간의 혼란으로 나타나는 부정적 결과의 가장 중요한 마중물이 ‘활동적 삶의 절대화’라고 저자는 말한다. '세인'(Das Man)은 이 마중물의 중심이다. 세인은 노동이라는 절대화된 명령에 굴복하고 일하는 동물로 전락하게 되었다고 저자는 보고한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듯 ‘활동적 삶의 절대화’는 인간으로 하여금 사색적 삶과 머무름의 능력을 상실하게 하는 비극을 초래했다고 비판한다. 이 비극은 여기에서 머물지 않고 더 비참한 세계의 상실, 시간의 상실을 인간에게 선물했다고 본 것이다.(p,148) 저자는 안타까움으로 토설한다. 그러므로 더 늦기 전에 사색적 삶을 되살리라고. 사색하지 않는 인간, 생각의 기쁨을 포기한 인간은 너무나도 무서운 존재이다. 재야 지식인인 홍세화의 글을 읽다가 본인이 프랑스에서 살면서 발견한 놀라운 일을 하나 소개하는데 프랑스 아이들은 태어나서 제일 먼저 하는 말이 우리나라 아이들처럼 엄마가 부동의 1위이지만 2위가 아빠가 아니라 ‘왜?’ 라는 점임을 밝혔는데 참 의미 있게 받아들인 적이 있다. 인간이 인간이라는 것을 대외적으로 선포하는 것은 왜? 를 물으며 사색하는 것인데 근래는 어른이 되어도 왜? 를 묻지 않는 비사색의 시대라는 점이 슬프다. 세인으로 하여금 세인으로 사는 것에만 만족하게 한 원흉은 시간의 혼란으로 야기된 활동적 삶의 절대화시키는 것 그래서 빠름이 시간의 위기라는 저자의 지적에 서평자도 동의한다. 걸작 ‘월든’을 통해 참 많은 사람들을 깨어나게 한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글에서 이런 소회를 밝힌 적이 있었다. “몸을 부지런히 놀리는 데서 지혜와 순결이 온다. 나태로부터는 무지와 관능이 온다. 공부하는 사람에게 관능은 마음의 게으른 습성이다.” 격언과도 그의 말을 그냥 생각 없이 받으면 그냥 생각이 없는 말이 된다. 그러나 소로우의 이 가르침은 그가 숲에서 자연과 벗하며 새들과 노래하며, 호수와 대화하며, 시간이 머무른 공간에서 체득한 것이기에 가벼울 리 없는 지침이다. 적어도 시간은 사유함의 공간이다. 머무름의 출발점이다. 그러므로 머무름을 잉태하지 못한 시간은 당연히 위기이다. 서평자가 섬기는 교회 이름이 世認(세인)이다. 세상이 인정하는 교회를 만들자는 취지였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교회는 어찌 보면 세상이 인정하는 것을 전제한다는 서평자의 고집이 담보되어 있는 이름이다. 나는 우리 교회 이름이 실은 자랑스럽다. 자존감 때문이다. 한병철의 책을 읽다가 새로운 각을 발견하는 수지맞음을 경험했다. “세인(世認)교회가 세인(世認)교회 되려면 세인(世人(세인))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 는 것을. 시간에 향기가 없을 때 위기이다. 저자는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건강’은 종교의 차원으로 승화되었다고 말하면서 인간 숭배의 가장 극점임을 말한다. 건강이 대세다. 그러다보니 제대로 죽지 않도록 하는 일체의 문명적인 시도가 팽배하다. 저자는 일련의 이런 시도는 축복이 아니라 저주라고 말한다. 그러하기에 죽음은 시간의 리듬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시간의 리듬을 잃어버리게 한다면 그 어떤 적절한 시간도 좋은 시간도 있을 수 없다. 오죽하면 짜라투스트라는 ‘제 때 죽으라.’고 가르쳤겠는가?(p,21) 라고 갈파한다. 제 때 죽을 수 없다면 사람은 불시에 끝날 수밖에 없다. 죽음은 삶이 고유하게 종결될 것을 전제한다. 죽음이란 종결의 형식인 것이다. 100주년 교회를 섬기는 이재철 목사의 설교 중에 토씨 하는 틀리지 않고 완벽한 문장을 만들 수는 없지만 이런 내용으로 선포한 메시지가 생각난다. “섬기고 있는 교회의 모 권사님은 불치의 병을 진단받고 일체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의료행위를 시도하지 말 것을 자손들에게 엄히 명하신 뒤 가장 아름다운 시간과 하나님의 때에 부름을 받으셨습니다. 권사님의 그 선택은 우리들이 귀하게 받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죽음에 대한 고귀한 모델입니다.” 현대인들이 불-시(Un-Zeit)로 내몰리는 것은 삶이 점점 더 넓이를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인간의 삶이 더 유한해 지는 안타까움이 있다. 불-시로 내몰리지 않는 삶과 죽음의 여유가 절대로 필요한 이유이다. 인터넷에 들어오면 우리 현대인들은 분초를 다투는 정보의 바다에 빠진다. 혹여 이 바다에서 수영을 하지 못하면 퇴보되는 느낌이다. 탈락되는 느낌이다. 소위 말하는 왕따가 되는 느낌이다. 그래서 이런 비극(?)에 빠지지 않기 위해 눈을 붉힌다. 정보는 오늘 우리들이 섬기는 또 다른 신앙이 되었다. 그러나 한병철은 분명히 한다. 정보는 정보이지 향기가 아니라는 점을 말이다. 다시 말해 정보에는 향기가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신화를 예로 든다. 신들의 이야기가 신화이다. 다시 말해 신들의 이야기 안에는 시간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이야기가 있기에 무에서 세계가 만들어지고 의미가 주어진다. 그 신들의 이야기는 한 폭의 그림처럼 놓여 있다. 그러나 역사적인 시간들은 일정한 시간들을 향하여 달려가는 선의 형태를 띤다. 이 선이 목적을 잃고 서사적인 긴장을 잃으면 점들로 분산된다. 그러므로 역사의 종언은 시간이 점의 시간으로 흩어짐을 의미한다. 그 흩어짐은 곧 시간의 원자화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림처럼 올이 쳐져 있는 역사의 이야기들이 정보에 의해서 밀려나고 있다. 정보는 시간이 원자화되었다는 중요한 단서이다. 불행한 것은 정보라고 일컬어지는 원자화된 시간은 향기가 없다는 것이다. 언젠가 서울에서 찾아온 친구들과 함께 제천 비봉산에 만들어진 레일 바이크를 타 본 적이 있다. 정상에 오르면 솟대가 만들어져 관광객들을 유혹한다. 각 종 새의 형상을 띠고 있는 솟대인데 이상한 것은 움직임이 없다는 것이다. 솟대가 조형물이지 살아 있는 새가 아니기 때문이다. 시간의 향기는 긴장감이다. 움직이지 않는 시간은 향기가 있을 리 만무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근대의 가속화, 기술의 가속화, 사건과 매체의 가속화, 모든 경제적, 정치적, 성적 교환의 가속화로 인하여 엄청난 해방의 속도 속으로 던져졌고 그 속도에 의해 실재와 준거의 틀 밖으로 튕겨져 나왔다.”(p,47) ‘활동적 삶’(vita activa)을 사색적 삶’(vita contempativa)으로 그러나 그 반대의 이야기도 역설한다. 느림 또한 역사의 종언을 부추긴다는 것이다. 물질은 시간의 흐름을 늦춘다. 시간은 밀도가 더 큰 물체의 표면에서 더 천천히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대중과 태만한 사회적 물질은 정보가 적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환적장이 너무 많아 넘쳐나 역사를 정지시키는 부정의 요소로 작용된다는 것이다. 속도의 과정은 결국 너무 느려서도 안 되고 빨라서도 안 된다. (중략) 시간이 과거보다 훨씬 더 빨리 간다는 인상 때문에 오늘날 사람들이 머무를 줄 모르게 됨은 비극임을 분명히 한다. 시간의 지속의 경험은 이렇게 대단히 중요한 것이며 고귀한 것인데 희귀한 것이 되어버린 시대의 비극 속에서 저자는 시간에 대한 일련의 철학적 사색을 통하여 현대인들이 주목해야 할 논거를 제시한다. 그것은 ‘활동적 삶’(vita activa)을 사색적 삶’(vita contempativa)으로 전환하는 시도요 노력이다. 그는 시간의 위기를 초래한 조작 가능성의 세계관과 ‘활동적 삶’의 절대화를 비판하면서 ‘활동적 삶’에 대한 대안으로 ‘사색적 삶’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아마도 이러한 삶은 정관하는 삶이요 무위의 삶이요 행위를 멈추고 우리의 뜻대로 대상을 조작하고 바꾸어버리려는 협소한 욕망을 잊어버리는 적극적인 시도요 행위이며 그렇게 될 때 바로 그 순간에 드러나는 세계의 모습을 가만히 마주하고 받아들임으로 비로소 인간이 느낄 수 있도록 잃어버린 감각을 복원하게 될 것을 저자는 시사한다.(pp,161-181) 서평을 마치며 앞서 언급한 쓰지 신이치가 쓴 ‘슬로 라이프’에 나오는 나무늘보를 통하여 배우는 느림의 철학이 생각났다. “나무늘보는 영어로 sloth 이다. 이 동물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느긋하고 여유 있는 사고방식, 삶의 방식을 ‘슬로소피’(pslothphy) 라고 부른다.” “빠름 빠름 빠름”의 로고에 이미 점령당한 ‘vita activa’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지만 ‘vita contempativa’ 를 통하여 향기를 잃은 시간들을 되찾아보기 위해 슬로소피가 되어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특히 나 같은 목사들은 더 특별히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