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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일그러진 복음2024-06-10 14:53
작성자 Level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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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트레빈 왁스
ㆍ출판사 생명의 말씀사
ㆍ작성일 2013-06-18 16:58:55



트레빈 왁스 저, “일그러진 복음” (생명의 말씀사) 을 읽고

 

지금은 4개 교회로 분립되어 건강한 교회상을 조국교회에 제시하고 있는 높은 뜻 연합 선교회의 전신인 ‘높은 뜻 숭의 교회’가 한참 바람직한 교회상을 추구하려고 나름 노력할 때 필자도 홈페이지에 방문하여 많은 은혜를 공유하려고 노력했던 기억이 있다. 높은 뜻 숭의교회의 여러 사역 중에 당시 세간의 주목이 되었던 사역 중에 하나가 사회적 공기업을 향한 지원과 활로 개척이었다. 탈북자들을 위한 재활 사업, 쪽방 촌과 노숙자들이 직접 경영하는 기업 경영 등등 상투적이고 임시적인 생색내기 사업이 아니라 근본적인 재활 프로그램이었다. 이 신선한 사역은 교회가 4개로 분립된 지금도 4개 교회의 지속적인 협력으로 높은 뜻 연합 선교회의 운영 체제하에서 좋은 이윤(?)을 창출하는 그래서 교회의 대사회적 섬김의 롤 모델로 자리매김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런데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점화된다. 당시 높은 뜻 숭의교회의 홈페이지를 자주 방문하던 필자는 사랑방이라는 자유 토론방에 걸린 높은 숭의교회의 한 청년이 기고한 글을 발견하고 읽다가 평소 내가 생각하던 방향성을 들킨 것 같은 쾌감(?)을 느끼게 해 준 경험이 있어서 소개한다. 너무 오랜 된 일이고 글 자체가 상당히 긴 글이기에 내 컴퓨터 자료실에 한 쪽에 보관을 하고 있는 글을 서평 기고문의 지면상 요약하여 전하는 것을 양해 바란다.

“나는 우리 교회가 참 좋다. 한국교회에서 감히 하지 못하는 일들을 감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사회적인 사회적 공기업을 만들어 근본적인 경제적 독립을 이룰 수 있도록 탈북자, 노숙자, 쪽방촌의 빈민들 그리고 도저히 혼자의 힘으로 일어날 수 없는 구조적 빈자들을 살리는 일들에 공격적으로 승리를 이끌어내는 우리 교회가 너무나 자랑스럽다. 나는 내가 섬기는 교회가 더 많은 사회적 공기업을 만들어 없어서 고통 받고 있는 근면한 자들을 많이 살려내기를 간절히 원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에 하나 나는 우리 교회가 이런 일들만을 위해 존재한다면 언제든지 교회를 향하여 싫은 소리를 낼 것이다. 사회에서 교회의 역할에 대하여 그들만의 리그들을 이루면서 자축하고 있다고 비난의 화살을 쏜다고 해서 대사회적인 일들을 우선적으로 시행하는 교회가 된다면 나는 결단코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교회가 이 땅에 세워진 가장 중요한 목적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가치전도 되면 아무리 우리 교회가 사회적으로 칭찬을 받는 교회가 되더라도 나는 그런 교회에 대하여 표를 던지고 싶지 않다. 지지는 더 더욱 아니다. 나는 재삼 강조하지만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를 너무나 사랑한다. 그러나 대전제가 충족될 때까지 만이다. 교회의 존재 목적을 상실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이다. 교회는 교회이지 사회사업기관이 아니다.”

당시 청년의 글이 충격적으로 가슴에 닿았다. 조국교회가 대사회적으로 행한 것이 없어 지탄의 대상으로 마구잡이 공격을 당할 때 마땅히 역할을 하지 못한 교회의 죄 때문에 고개를 숙였다. 당연한 결과이고 또 당해야 하는 몫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공격을 당하면서 왠지 모르는 불편함이 내재되어 있었음을 숨길 수 없었다. 그것은 영적으로 아주 세밀한 불편함이었다. 많은 교회들이 이제는 사회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자책하였다. 더 늦으면 회복할 수 없는 혼수상태에 빠질 것이라는 절망적인 우려가 난무했다. 그리고 그 우려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에서 암울하다. 그렇다. 최선을 다해 세상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리고 실천해야 한다. 신학대학교에서 교수 사역하고 있는 친구 차준희목사가 일전에 페북에 올린 글 끝에 말했던 한 마디의 촌철살인의 댓글을 항상 가슴에 담고 있다.

“말과 삶과 글이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일치하기를”

21세기를 살면서 이 땅이라는 삶의 현장에서 목회를 하는 현직 목사로서 친구가 말했던 일침이 무거워 피하고 싶을 때가 많지만 오늘도 싸운다. 그래서 대사회적인 목소리를 경청하는 목회의 현장을 민감하게 목도하며 사역하지만 전술한 불편한 부분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교회의 존재 목적을 대사회적인 나눔으로 몰고 가는 불편함이다. 영혼 구원을 위한 사역이 교회의 존재 목적 중에 가장 중요한 프라이어리티인데 어느새 가장 중요한 것을 말하면 시대를 분별하지 못하는 무지의 소유자와 아둔함을 가진 자로 비난을 받는 지경에 이르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경험한다. 필자는 매 주 화요일 오후 1시에 어김없이 전도지를 들고 노방전도를 한다. 함께 전도하는 교회 지체들과 함께 현장을 누빈다. 전도지를 주는 현장에서 느끼는 복음 증거에 대한 매몰찬 체감 온도는 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결코 말하지 못할 수치심을 담보한다. 필자도 안다. 전도지를 들고 거리에서 복음을 전한다고해서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프로테이지가 바닥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나 또 다시 수치와 거절을 당해도 현장을 향해 나아간다. 왜 그런지 아는가? 그것이 목사가 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가 존재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교회가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사역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목회하는 교회는 타 교회에 비해 젊은 계층의 교우들이 대체적으로 많은 편이다. 그래서 노방전도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더 많을 수 있는 교회의 여론이 형성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하다. 반면 동시에 제천이라는 실버형 도시에 위치한 교회이기에 노인들 역시 많이 존재한다. 속을 끄집어내는 것 같아 낯이 간지럽지만 우리 교회 권사회에 속한 구성원들은 그 연령층에 있어 대학을 졸업한 인텔리 계층도 적지 않게 존재한다. 그러기에 담임목사의 고조선 시대의 전도 사역에 대하여 부정적인 사람들도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인텔리 계층에 있는 교회의 중직(말 자체의 어패가 있는 말) 권사호의 지체들도 전도 사역에 대하여 방관은 할 수 있지만 결코 부정적으로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 교회의 특성 중에 하나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복음 증언의 사역이 교회의 본질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서두의 잔소리가 너무 길었다.

‘Lifeway christian resources’에서 복음 중심 소그룹 성경공부 교재인 ‘the gospel project’ 담당 편집자로 사역하고 있는 트레빈 왁스(Trevin Wax)목사가 쓴 ‘일그러진 복음’(counterfeit gospels)은 오늘의 시대에 교회가 교회라는 이름을 갖고 있지만 전혀 교회의 본질과는 관계가 없는 ‘모조의 복음’ 으로 많은 현대 크리스천들을 농락하고 있음을 리얼하게 고발하고 있다. 왁스는 총 6가지의 일그러진 복음을 여지없이 강타한다. 가장 먼저 건드리고 있는 일그러진 복음은 소위 말하는 치유 복음이다. 그는 치유 복음의 치명적인 독이 치유라는 것을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인 아닌 수단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들고 있다. 그래서 치유의 은혜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점을 경계한다. 소위 사역자들에 의해 치유가 자기 마음대로 해피 밀처럼 주어지고 또 어떤 경우에는 사역자가 아주 손쉽게 만들어주는 선물로 수여되기도 한다. 더 심각한 것은 치유가 자판기 안에 들어 있다는 점이다. 몇 몇 헌금 코인이 투입되면 언제든지 임하는 물건으로 치유는 전락했다. ‘나는 치료하는 하나님’이라는 위대한 하나님의 선언이 언제든지 인간의 취향대로 만들어지는 천박한 치유로 탈바꿈되었음을 강력하게 저자는 비판한다. (천박한 치유 복음에 대하여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분은 고든 피의 탐욕의 복음을 버려라-새물결 플러스간, 참조) 두 번째로 트레빈 왁스는 심판이 없는 복음에도 경종을 울린다. 너무 단순한가? 오늘을 사는 현대 크리스천들의 입맛과 지성적 믿음에 대하여 흡족한 만족을 주는 복음이 바로 심판 없는 복음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백성을 절대로 지옥으로 보내지 않는다는 기분 좋은 메시지이다. 오죽이나 이 메시지가 마음에 들면 영국 시내버스 어드버타이지먼트로 등장했는가?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의 마음을 보시고 연약함을 아시기에 결코 심판에 이르게 하시는 나쁜 하나님이 아니심을 심판 없는 복음이 교묘하게 역설한다고 왁스는 주장한다. 동시에 이들의 중요한 메시지는 현세의 삶이 내세보다 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세에서 천국을 누리며 사는 것이 더 중요함을 강조합니다. 그렇다.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성도로서의 삶을 다잡이해야 하는 것을 결코 필자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필자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의 저자인 크로아티아 출신 신학자 미로슬라브 볼프가 말한 “심판의 개념이 제거되면 은밀하게 폭력이 조장되며 모든 것을 바로 잡으실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면 나는 칼을 들고서 끝없는 보복의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려 들어갈 것이다.” 라는 주장에 대하여 나도 100% 동의한다. 동시 카라마조프 형제들에서 바보 이반이 말한 대로 “하나님이 없는 곳에서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것을 동의하고 믿기에 심판의 확실성에 지지를 표한다. 그러나 필자는 이런 제 2차 자료들에 의한 심판이 있는 복음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이유로 심판의 확실성을 지지한다. 그것은 성경의 선포를 믿기 때문이다. 이제는 현장에서 은퇴하신 대선배 목사께서 설교를 통해 행하셨던 말이 기억에 잔잔히 남아 있다.

“한국교회가 약해지지 시작한 때는 첫째 강단에서 지옥 설교를 선포하기를 두려워하면서 부터였고 또 하나는 교회마다 마룻바닥 예배당에 의자를 세팅하면서부터이다.”

새겨볼 지침임에 틀림이 없다. 셋째 왁스가 비평하는 일그러진 복음은 도덕주의 복음이다. 그것은 기독교를 선한 사람을 만드는 훈련소로 만들어버린 일그러진 복음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큐리오스)가 선한 선생님(에피스파테스)으로 남아주기를 원하는 복음은 모조의 복음이며 일그러진 복음이다. 복음은 나를 변화시켜 개인적인 삶의 유익과 편안함을 누리게 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은 능력이다. 내 자신의 삶은 물론이거니와 나와 관계된 공동체가 본질적인 죄악에서 돌이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는 능력이다. 이런 점에서 성경은 도덕 교과서가 아님을 인정하여야 한다. 그래서 결국은 모든 것이 은혜였음을 알게 하는 능력 이것이 바로 복음임을 저자는 강력하게 주장한다. 네 번째와 다섯 번째의 일그러진 복음은 하나로 묶어야 하겠다. 소위 정적주의 복음 그리고 그 반대급부인 행동주의 복음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왁스의 본 책에서 무엇보다도 이 세션에서 도전을 받았다. 먼저 정적주의의 개념을 이해하는 한 글을 소개한다. 도전이 되어 지난 주일 낮 예배 시간에 필자가 섬기고 있는 교회의 설교에 인용한 글이다. 트레빈 왁스는 어윈 루처의 한 글을 소개한다.

다빈치 코드 깨기로 잘 알려진 어윈 루처 목사가 쓴 ‘히틀러의 십자가’에 나오는 한 독일인의 고백이다.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 기간 동안 나는 독일에서 살았다. 나는 그리스도인임을 자처했다. 우리는 유대인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을 들었다. 가급적 못들은 척하려고 했다. 그런 일은 누구도 제지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작은 교회 뒤편으로 철도가 놓여 있었다. 주일 아침에 멀리서 나는 기적이 울리고 나면 열차 바퀴 소리가 들렸다. 열차가 지나갈 때 그 안에서 들려오는 울부짖는 소리가 우리 마음을 어지럽혔다. 유대인들을 가축처럼 싣고 가는 열차였다. 매주 기적 소리가 울렸다. 우리는 열차 바퀴 소리를 듣는 게 두려웠다. 죽음의 수용소로 끌려가는 유대인들의 울부짖음을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 비명 소리가 우리를 괴롭혔다. 그 열차가 지나가는 소리를 우리는 알고 있었다. 기적이 울리면 우리는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열차가 우리 교회를 지나갈 때면 찬송하는 소리를 최대한 높였다. 비명이 들리면 우리의 찬양 소리가 더 커졌고 이내 그 열차는 지나갔다. 세월이 흐르고 이제 아무도 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 꿈속에서는 그 열차의 기적 소리가 여전히 들린다. 그리고 뒤늦었지만 참담하고 비겁하게 나는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 저를 용서하옵소서. 그리스도인임을 자처하면서 전혀 개입하지 않은 우리 모두를 용서하옵소서.”

정적주의라는 일그러진 복음의 범죄는 하나님의 공의에 눈을 감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적주의는 아모스 시대의 삶으로 성도들을 유혹한다. 예언자적인 선포에 눈 먼 복음은 그래서 복음일 수 없다. 이와 정 반대되는 일그러진 복음도 있다. 소위 행동주의적 복음이다. 이 일그러진 복음의 자화상이 바로 필자가 서평 서두에 언급한 교회의 역할 모드를 대사회적인 봉사와 섬김이라는 코드로만 국한 시킨 복음이다. 이 잘못된 복음의 테두리 안에 있는 사람들은 교회를 사회의 심부름꾼으로 전락시킨다. 결단코 거부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다. 동시에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러기에 교회는 주님의 뜻을 본질적으로 사수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이것보다 앞선 가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행동주의적 복음이라는 가면으로 인해 교회가 화이트 컬러들의 면피용 체면치레의 수단의 집단으로 혹은 그들의 대리 만족의 수단으로 대사회적인 봉사를 하는 심부름꾼으로 전락되는 것은 불행이요 비극이다. 필자도 이런 행동주의 복음주의자들에 대하여 천만 유감을 표한 것은 이의가 없다. 왁스는 마지막으로 무교회 복음의 폐해를 마지막으로 점검한다. 로컬 처치에 대한 중요성을 간과하고 단순히 교회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비판적 결단으로 행해지는 무교회주의자들이 선포하는 무교회 복음에 대한 저자는 이렇게 반응한다.

“나 자신을 속이기가 얼마나 쉬운지 나는 알고 있다. 나의 영적 상태를 가장 잘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나 자신이라고 말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나의 신앙을 확인해줄 교회가 필요하다. 의심할 때 확신을 넣어주고 잘못할 때 사랑으로 책망을 하는 교회가 필요하다. 심판의 날이 임할 것이다.”

왁스는 마지막으로 저서에서 이렇게 카르타고의 교부인 키프리안의 말을 인용한다.

“당신이 교회라고 하는 어머니를 인정하지 않는 한 하나님 아버지도 당신과 함께 하지 않는다.”

책을 읽으며 많은 생각이 스쳐지나 갔다. 어떻게든 결론을 맺어야 하는데 페북 친구인 김정건 목사가 올린 한국교회 진보적인 개혁 운동을 추구하고 있는 청어람 아카데미 책임자인 양희송 대표가 쓴 ‘다시 읽는 프로테스탄트’ 글을 읽고 단 글 소감에 필자가 단 댓글로 결론을 맺어야 하겠다.

김정건 목사는 이렇게 ‘다시 프로테스탄트’의 본인의 타임라인에 글 소감을 올렸다.

 

<다시프로테스탄트>를 읽고 있다...

그런데...

그런데...

그렇다...

 

필자가 친구의 글에 이렇게 댓글로 적었다.

 

“기독교가 가치의 중립이 가능할까? 요즈음 깊이 고민하는 대목이다. 김목사. 의미 있는 글 고맙다.”

 

책을 덮으며 한 가지 분명한 글 소감을 책에 기록했다.

“교회를 교회되게 성도를 성도되게 목사를 목사 되게 그리고 한 마디 더 적었다.”


“이강덕! 이제는 헤맬 나이는 아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