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 깁기석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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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꽃자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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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3-06-09 22:40: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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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행복하십니까? 아니오, 감사합니다.” 읽고 (꽃자리, 2013) 책을 덮었다. 그리고 한 동안 책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다. 한 참이 지난 뒤, 훗날 목회를 하는 아들이 볼 책이기에 습관적으로 남기는 짧은 후기를 책 후면에다 이렇게 기록했다. “어찌할까 이 감격과 감동들을! 아들아, 김기석 목사의 지성적 영성을 깊이 본받기를 기대한다.” 2006년 ‘속빈 설교 꽉 찬 설교’라는 제하의 설교 비평서를 신학교 선배인 정용섭 교수가 출간했을 때 김기석 목사를 만났다. 사실은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필자에게 있어서 김기석 목사는 미지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너무나도 격한 어조로 대한민국 최고의 인지도를 갖고 있는 목사들에 대하여 가차 없이 비판하던 서슬이 시퍼런 선배의 독설 중에 유독이 김기석 목사에 대한 비평에 대해서는 순한 양처럼 변한 모습을 보면서 김기석 목사의 설교와 책은 어느 새 나의 관심사 되어 버렸다. 지금부터 글감을 함께 나눌 ‘행복하십니까? 아니오, 감사합니다.’(이하 행복, 감사로 표기) 역시 서평자의 굶주린 배고픔의 먹잇감이 된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저자는 글을 시작하는 말머리에 디트리히 본회퍼의 이야기를 인용한다. “오늘날 교회가 고대 교회와 달리 시편을 잘 사용하지 않게 되면서 비할 바 없는 보물들이 시편과 함께 교회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에서 다시 시편으로 기도하기 시작한다면 상상할 수 없는 힘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그의 말 대로 시편의 편린(片鱗)들을 묵상하며 선포한 이 책에서 나는 새로운 힘을 얻었다. 이것은 책을 구입할 때 지불되는 책값이 너무 초라해 보일 정도의 가치와 은혜의 보물들이었다. 미리 말해두거니와 저자는 구약 성서해석자들처럼 시편을 주석하지 않았다. 단지 묵상했다. 아, 그렇다고 시편서의 이해가 상업적인 부흥사들의 값싼 해석과도 같은 장터 수준일 것이라고 이해하지는 마시라. 그의 시편서 묵상은 깊은 신학적 통찰을 전제하고 있으니 말이다. 다만 신학대학교 교수들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그런 언어가 아닌 가장 쉬운 언어로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는 글들을 선사하고 있다. 그래서 그랬나. 손석춘은 저자를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목사 중에 “가장 아름다운 한국어로 설교하는 목사”라고 극찬한다. 목사가 목사의 설교에 은혜 받지 못한다는 별로 바림직하지 못한 관용구가 있다. 이것을 보란 듯이 뒤엎는 감동이 이 글 속에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서평자 역시 그래서 저자를 영혼을 울리는 감동의 글쟁이라고 표현하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행복, 감사’는 무작위로 선정된(물론 저자는 청파교회에서 설교하기 전, 본문 선택을 심사숙고 했을 것임) 시편을 소개한다. 저자는 메마른 영혼을 적셔주는 따뜻한 햇살이 비치는 감성의 언어들로, 약한 자들이 당하는 시련과 억울함의 신원함을 소개하는 사자의 포효함을 보여준다. 동시에 극단적인 진보의 길로 나가거나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기를 거절하는 불통의 보수적 길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아주 엄격한 말씀을 통한 말씀의 해석을 토대로 시인이 그 시대에 이야기하고자 했던 텍스트인 'what did it mean?' 를 적나라하게 소개하였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 시인의 토로함이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에 대한 what does it mean? 의 콘텍스트로 확장시킨다. 이런 이유 때문에 책을 읽는 내내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의 40개 시편 묵상은 깊은 영성과 해박한 지성 그러나 균형 잡힌 의지가 없이는 도저히 해석할 수 없는 질 높은 감동으로 기록되어 있다. 숨이 가쁜 상태에서 매 장을 읽어갔다. 그리고 어김없이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 감동의 글들이 엄습할 때마다 놓치지 않기 위해 다잡이 했다. 저자는 시편을 영혼의 노래라고 정의한다. 해서 5개의 꼭지로 이루어진 매 장마다 ‘영혼’을 명제로 삼고 있다. 지면의 한계 때문에 각 장에서 가장 서평자가 감동의 진동을 크게 느꼈던 것들을 소개하는 것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첫 번째로 영혼의 발신음을 들어보자. 시편 4편을 조명하는 저자는 이렇게 노크한다. “우리가 정말로 조심해야 하는 것은 사람을 함부로 규정해 버리는 것이다. (중략) 분리의 장벽은 팔레스타인 땅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는 ‘우리’와 ‘그들’을 가르는 수많은 경계선이 있다. 연대에서 TH.M 과정을 할 때 구약석의를 당시 민영진 박사께서 강의했다. 그의 강의 전반은 구약의 포괄적 해석이었다. 보수적인 성향의 신학교를 졸업한 서평자는 한 번도 접해 보지 못했던 성서의 세계에 발을 딛는 경이로움을 경험했다. 그 동안 주입되었던 나의 뇌 구조 속에는 친 이스라엘, 반 팔레스타인이라는 틀이 박혀 있었다. 그랬던 나에게 민 박사의 강의노트는 청천벽력이었다. “그 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 및 앗수르와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 주시며 이르시되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라” (이사야 19:23-25) 이 본문 텍스트를 갖고 석의하던 민 박사께서 불을 뿜던 사자후가 서평자의 노트에 다음과 같이 소복 쌓여 있다. “대한민국의 하나님은 북한의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스라엘과 미국이 공격하고 있는 레바논과 이라크에 대하여 하나님은 내장이 끊어지는 마음으로 신원하며 아파하시고 있으며, 부유한 자들의 대변인 노릇을 하며 가난한 자와 구분 짓고 있는 한국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분노하심이다.” 8년 전, 성지순례라는 이름으로 방문한 나사렛에 펼쳐진 거대한 담들을 보며 이곳이 인류의 죄를 십자가라는 도구로 헐어버리셨던 예수께서 자라나신 땅인가? 하며 장탄식에 젖었던 적이 있었다. 기실, 저자의 말이 맞다. 분리의 장벽이 어찌 팔레스타인 자치 구역과 이스라엘인의 거주지역에만 있겠는가? 바로 내가 만든 분리의 담들이 수없이 존재하고 있는 내가 바로 담 자체인데.시편 46편은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며 우리의 힘이 되신다고 고백한 시인의 읊조림이 항상 은혜로 다가오는 노래이다. 하나님이 나의 피난처가 되신다는 실 경험을 이렇게 소개한다. “1960년대 새벽기도가 끝나 모두가 돌아가고 아침 햇살이 창문으로 들어와 비출 때 교회 안을 살펴보면 군데군데 마룻바닥에 눈물자국이 얼룩져 있고 그 눈물은 모두가 얼어 있었다.” 저자는 가난하고, 쪼들리고, 추웠던 시절 그래도 교회에는 이런 소박한 성스러움이 있었다는 것을 추억한다. 어디 이것이 저자의 추억에만 남아 있는 거룩함이랴! 서평자가 섬기던 고향교회에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러한 추억의 잔상들을 추억하라면 지천이다. 참 가난했지만 아름다웠던 말거리들과 글거리들이 있었던 고향교회의 모습이 왜 오늘 그리고 지금은 보이지를 않는가?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교회가 너무 부유해졌기 때문이리라. 부족함 때문에 감사가 넘치고, 연약함 때문에 서로가 더 하나가 되었던 바로 그 시절에 교회는 영혼의 피난처임에 틀림이 없었다. 서평자에게는 서울의 모 군인교회에 다니는 아내의 친구가 있다. 그녀가 다니는 교회는 장교들이 많이 다니는 교회로 유명하다. 친구가 지방에 있다가 남편이 서울로 인사이동이 되어 지금의 교회를 나가게 되었는데 구역예배를 교회에서 매 주 드리는 것에 대하여 처음에 적응이 안 되었음을 토로하는 말 중에 가정에서 드리는 구역예배가 교회로 장소를 옮겨지게 된 이유가 집을 공개하기가 싫은 것임을 듣고 교회의 공동체성의 무너짐이 극단적 이기주의 혹은 소그룹의 님비라는 사실에 못내 씁쓸한 심정을 갖는 것은 촌 동네에서 목회하는 목사의 한계만일까? 왜 이 지경이 되었는가? 를 못내 곱씹으면 씹을수록 가난했던 옛날이 더 그리워지는 것은 철없는 목사의 트집처럼 보여 아프다. 시편 37편의 교훈은 하나님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영적 지구력이다. 시인은 이렇게 선포한다. “악한 자들이 잘 된다고 해서 속상해 하지 말라. 불의한 자들이 잘 산다고 해서 시새워하지 말라” 사실,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이라고 해서 세속적 가치에 함몰되어 살아가는 자들에 비해 특별히 뛰어나거나 안전하지 않은 것이 매일반이다. 이로 인해 하나님께 항변하는 무슨 대가를 요구하는 천박한 신자들이 비일비재하다. 신앙의 목적이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성공이 아닌데도 말이다. 저자는 37편의 시인의 고백에 따라 그래서 중요한 통찰을 제시한다. “오뚝이를 가리켜 ‘부도옹(不倒翁)’이라고 한다. 오뚝이가 타력에 의해 넘어져도 엎드려 있지 않고 벌떡 일어설 수 있는 이유는 무게 중심이 아래쪽에 있기 때문이다. 신앙인의 무게 중심은 흔들리지 않는 터전이신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시인은 의인의 발걸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은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법’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저자는 이 통찰을 다른 지면에서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었다. “믿음은 밑힘이다. 굳이 한자로 바꾸자면 저력(底力)이다. 하나의 사람은 모두가 절망의 탄식을 내뱉을 때 희망을 노래하는 사람이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보아내는 사람이다. 모두가 더 일어설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할 때 다시 몸을 일으키는 사람이다.” 박수를 보내고 싶은 대목이다. 얼마나 수준 높은 신앙인의 가치인가! 두 번 째 꼭지인 ‘영혼의 파열음’에 들어가 보자. 저자는 시편 111편을 소개하며 시인의 깊은 사색에 박수를 보내고 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들은 참으로 훌륭하시니, 그 일을 보고 기뻐하는 사람들이 모두 깊이 연구하는구나” (표준 새 번역) 오늘 내가 사는 시대의 비극은 가벼움이 아닐까! 너무 얇다. 깊이를 찾아볼 수가 없다. 마치 종편에서 만들어내 개그맨들의 억지웃음과도 같은 유감이 있다. 왜 이렇게 깊이가 없지? 라고 질문할 때 나 스스로에게 내 뱉는 말은 공부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답이다. 공부가 무엇일까? 사유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에 목숨을 걸지 않고 그 이면에 있는 것의 귀함을 찾아내는 것이다. 몇 년 전에 읽었던 IT 계통에서 선구자라는 칭송을 받고 있는 니콜라스 카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저자의 아이러니 한 고발을 볼 수 있다. “나의 뇌는 굶주려 있다. 뇌는 인터넷이 제공하는 방식으로 정보가 제공되기를 바랐고, 더 많은 정보가 주어질수록 더 허기를 느끼게 된 것이다. 나는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을 때조차도 이-메일을 확인하고, 링크를 클릭하고, 구글에서 무언가를 검색하고 싶어 했다. 나는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어 했고, 마이크로소프트 워드는 내게 살과 피와 같은 워드프로세스가 되었고, 인터넷은 나를 초고속 데이터 처리기기와 같은 물건으로 바꾸어 놓았다. 나는 마치 인간의 모습을 한 기계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나는 이전의 뇌를 잃어버린 것이다.” 컴퓨토피아를 꿈꾸는 세상에는 사유함이 있을 수 없다. 삶에 대한 공부함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에 대한 묵상은 박물관 이야기이다. 문제는 이런 사색이 없는 세계는 죽어 있는 세계라는 점이다. 저자는 이렇게 갈파한다. “자기가 누리고 있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영혼의 타락이 시작되는 것이다,” 주군을 깊이 사색할 때 지금의 내가, 오늘의 내 삶의 영역이 하나님의 방법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해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지금의 랜덤을 돌리기 위해 항거하며 살게 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공부할 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시편 25편을 저자는 소개한다. “주님, 주님의 길을 나에게 보여주시고, 마땅히 내가 가야할 그 길을 내게 보여주소서.”(시편 25:4, 표준 새 번역) 이 말씀의 밑으로 내려가면 은혜의 샘물이 지천이다. 왜? 주님이 알려주시는 길만이 내가 갈 길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 기록된 이반의 말머리를 붙들며 한 마디 건드린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이 말은 참으로 무서운 말이다. 하나님이 길을 가르쳐주지 않으면, 아니 가르쳐주어도 따르지 않고 있는 오늘의 시대를 보라. 몸서리쳐지는 두려움이 아닌가? 세 번째 꼭지인 ‘영혼의 발 돋음’으로 들어가 보자. 시편 30편에서 노래한 시인의 읊조림을 저자는 소개한다. “주님의 진노는 잠간이요, 그의 은총은 영원하니, 밤새도록 눈물을 흘려도, 새벽이 오면 기쁨이 넘친다.” (시편 30:5절 표준 새 번역)인생은 누구에게 밤이 있다. 그 밤의 도래에는 예외가 없다. 상당수 많은 사람들이 그 밤의 공격으로 인해 무너지고, 좌절하고, 포기하기도 한다. 사람에 따라 밤은 정도의 차이가 있기에 경험되어지고 맞닥뜨리는 점에서도 모두가 동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공히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새벽이 온다는 것이다. 새벽이 온다는 것을 상기하는 자는 밤을 이긴다. 저자는 엘살바도르의 순교자인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의 일침을 소개한다. “초월이란 사방이 막혀 있을 때 하늘을 보는 것이다.”또한 인도의 격언도 이어 소개한다. “어둠을 욕하기 보다는 촛불 한 자루를 켜는 것이 더 낫다.” 영혼이 다시 발 돋음 하는 것은 하늘을 보는 것이라는 교훈에 서평자는 동의한다. 창세기를 묵상할 때 만나는 노아의 방주 기사에서 눈여겨볼 대목이 보인다. 동서남북이 막혀 있는 방주에 하늘 창문을 내라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1년이라는 시간 동안 동서남북이 막혀 있었던 방주는 말 그대로 지옥이었을 것이 자명하다. 동물들의 울음소리, 그것들의 분비물과 냄새는 아마도 노아의 식구들에게는 사투의 대상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더 심각한 것은 홍수가 끝날 시점을 알 수 없다는 불확실성의 미래였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희망이지 않은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생존 작가인 프리모 레비는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하루에도 수백 명 씩 가스실에서 죽어가는 막장 수용소에서 살아가는 자들이 암묵적으로 뇌 속에 스스로 각인될 수밖에 없었던 철칙들이 생겨났다고 보고한다. 이것은 수용자들의 본인의가 아니라 타의로 생겨난 절망이었다고 레비는 술회한다. “이해하려 애쓰지 말라, 미래를 상상하지 말라, 모든 게 어떻게 끝나게 될지 생각하며 괴로워하지 말라” 이렇게 갈파한 레비는 이 철칙들을 소개하면서 한 마디를 덧붙인다. “이것이 우리들이 여기에서 버틸 수 있었던 유일한 지혜였다.” 그러나 이것은 극한적 절망의 상황이지 않았는가? 인간이 평상적인 상황에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양식은 희망이다. 이것만이 슬픔의 상복을 벗는 일인데 이 일을 하나님이 행하신다고 시인이 노래한 메시지는 포기할 수 없는 영혼의 발 돋음 재료가 아닐 수 없다. 아직도 갈 길이 멀지만 지면의 제한 때문에 서평자에게 가장 큰 감동을 준 한 꼭지의 글을 소개하고 마무리를 하자. 그것은 ‘말씀의 위대함’을 피력한 장면이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적시했다. “우리의 생에 봄을 가져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정겹게 아멘 한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은 삶의 지침이 될 만한 경구들을 찾기 위함이 아니다. 그럴 목적이라면 명심보감을 보면 된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까닭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모든 것들이 거기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 빛나는 역설을 강조한 저자는 강하게 영혼의 잽을 날린다. 어떻게? 이렇게.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자는 길을 잃지 않는다고” 책의 말미에서 작심한 듯 저자는 강펀치를 날린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 않거나 설사 읽는다고 하더라도 밑줄만 긋는다. 말씀을 인용할 줄은 알지만 그 말씀을 삶의 척도로 삼아 나를 바꿀 생각은 하지 않는다. (중략)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읽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읽도록 말씀을 읽어야 한다. 말씀 한 마디라도 붙잡고 궁구하다보면 삶의 중추가 보이게 마련이다. 정말이지 숨을 곳이 없게 하는 카운터펀치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얼마나 전율하는 감동을 받았는지 모른다. 요즈음 새벽에 교우들과 예레미야를 만난다. 길 예언자와 흉 예언자에 대한 가감 없는 선포를 한다. 흉 예언에 집중할 것을 강하게 역설한다. 성도들이 눈살을 찌푸려도 어쩔 수가 없다. 그것이 성경의 진솔한 선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담이 되는 것은 예레미야가 이 대목에서 한발자국도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는 점이다. 평균적으로 약 40여명의 성도들이 눈을 비비고 새벽을 깨운다. 그래도 하루를 시작하면서 위로의 말씀을 듣기 위해 새벽바람을 가르고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강단에 서있는 담임목사는 만만치 않은 메시지로 무장하고 있다. 오라, 나를 따르라. 그리고 죽으라고 선포한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도 무너질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 불안함 때문에 서평자는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는다. 성도들에게 눈물겹게 감사하고 미안하다. 저들이 이 부담스러운 설교를 그 새벽에 들어주는 것이. 항상 설교자는 갈등과 고민을 동반하여 영적으로 투쟁하는 것이 분명하다. 진정성을 갖고 말한다면 흔들릴 때가 많다는 점이다. 이런 흔들림을 책의 거의 말미에서 선포하고 있는 저자가 인용한 예레미야의 말이 또 다시 곧추 세워주었다. 그는 이렇게 선언한다. “말씀을 부담스러워하는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이 뭐라고 하는지 아는가?” “나는 너희가 부담스럽다.(You are my burden. : 예레미야 23:33-40) 또 달려갈 힘을 얻는다. 힘에 부치기는 하지만 또 다시 달려갈 수 있을 것 같다. 한 목회자의 귀한 영혼의 울림이 그렇게 만들어 주었다. 7년 전 정용섭 선배가 김기석 목사를 향하여 이렇게 결론을 맺은 것은 서평자에게도 현재 진행형이다. “세상, 인간, 문학, 예술, 사랑에 대해서 한 수 가르침을 받을 만한 분과 동시대에 설교자와 글쟁이로 함께 활동하고 있다는 것은 기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