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5.07.05 셀 사역2024-04-22 15:31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상반기 중에 가장 아팠던 일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했던 일 나누기  

 
경배와 찬양 (WORSHOP)

● 주 예수 내가 알기 전 (찬송가 90장)
●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며 (복음성가)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본문 : 데살로니가전서 5:19-22
● 제목 : 성도로 살아가기(3)
1) 오늘 본문이 주신 성도로 살아가기 위하여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에게 권면한 세 가지는 무엇인가?


  

2) 그렇다면 바울이 이 세 가지를 권고한 성서적인 이해는 무엇 때문이었는가?
① 첫 번째 이해의 근거
② 두 번째 이해의 근거
③ 세 번째 이해의 근거  

3) 3주 동안 살핀 성도로 살아가는 방법 8가지를 곱씹고 셀마다 할 수 있는 실천적인 항목을 우선 정해보기
제 1 순위
제 2 순위
제 3 순위  

 
사역하기 (WORK)
1) 중보기도
  ① 7월의 다음세대들을 위한 여름사역을 위하여
  ② 연약한 지체들을 위하여
  ③ 대입 준비를 위한 수능생들을 위하여
    (곽보람, 서혜린, 섭현우)
  ④ 셀원들을 위하여

2) 치유기도
3) 헌금 기도
4) 광고
5) 폐회: 주기도문  

 
설교요약 (SUMMARY)
2015년 7월 5일 주일 오후예배 설교 (데살로니가전서 23번째 강해)
제목: 성도로 살아가기(3)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5:19-22

성도로 살아가기 위한 방법들의 5가지의 내용은, ① 가르치는 자를 신뢰하고 존경하기 ② 말씀이 말씀한 방향성대로 나아가기 ③ 항상 주 안에서 기뻐하기 ④ 삶으로 기도하기 ⑤ 모든 일에 감사하기였습니다. 나머지 세 가지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6) 성령을 소멸하지 않는 삶입니다(본문 19절).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태생적 한계인 어린 교회를 염두 해 두었기 때문에 이러한 권고를 한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성도들에게 임하시는 제 3위의 격을 갖고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님을 인격적으로 대우할 때만 내 안에서 내주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만에 하나 내가 범죄를 하거나 성령님이 거주하실 수 있는 영적인 상태가 아니면 성령님은 슬퍼하시면서 내 안에서 떠나십니다.
  데살로니가의 어린 교회 지체들은 이런 성령 하나님에 대한 충분한 배움과 양육이 시간적으로 부족했을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지역은 카비루스 파라는 신비주의적인 우상 숭배가 횡행했던 지역이었기에 성령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혼합적인 신비주의에 가려서 올바른 이해를 하기가 쉽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했습니다. 이것을 염려했던 바울은 사랑하는 지체들에게 성령 하나님을 소멸하지 말라고 권고한 것입니다. 주님이 승천하셔서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성령님이 가장 역동적으로 활동하던 시기였기도 했고 그 성령님의 은혜를 가장 민감하게 받고 사역하는 장본인이 지금 이 편지를 쓰고 있는 바울 자신이었고 더불어 역동적인 성령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지역이 바로 데살로니가였기에 바울은 멀리 떨어져 있기에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없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편지에 글을 담아 성령 하나님을 소멸하지 말 것을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멸하다’ 로 번역된 헬라어 ‘스벤뉘미’ 는 원래의 문자적인 의미가 ‘불을 끄다.’ 라는 의미입니다. 본문 19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타오르는 성령의 불을 끄지 말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타오르는 불과 같은 존재로 현현하시기도 하지만 빛으로 비추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시기도 하기 때문에 단지 타오르는 성령님의 불을 끄지 말라는 해석에는 부분적인 한계가 있습니다(존 스토트의 해석). 이 부분의 또 다른 해석으로 유진 피터슨은 “성령을 억누르지 마십시오.”라고 해석했습니다.
  아이든 토저의 ‘이것이 성령님이다.’ 에 보면 오늘 우리들의 교회가 빠질 수 있는 함정을 아주 잘 묘사한 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드리는 교회에서의 예배는 참으로 공허하고 무의미할 때가 있다. 우리들이 드리는 오늘의 예배에는 모든 것들이 다 갖추어져 있다. 그러나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 그것은 성령님의 부재이다. 경건의 모양은 있다. 심지어 겉보기에 미적으로 아름답다고 느낄 정도로 완벽하다. 성가대와 오케스트라. 화려한 강단 장식, 상징성이 풍부한 예복, 탁월한 음향 시절, 이런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예배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거기에는 결정적으로 부족한 것이 있다. 초자연적인 감동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위로부터 내려오는 능력을 알지도 못하고 사모하지도 않는다. 인간적인 정교한 장치들과 제법 그럴듯한 흥분을 조장해 내는 성공의 최면술이 성령의 감동을 대체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가짜 성령이 자리를 꿰찬 공백의 냉랭한 파급 효과를 처참하게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로 비극이다.” 또한 “예배 시간에 어떤 영적인 능력이나 성령님의 압도하시는 임재를 느끼지 못하니까 설교자의 메시지나 찬송가의 가사에 담긴 내용들이 전혀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그에게는 성령님의 신령한 체험을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목사의 축도가 끝난 뒤 즈음에 어디에 가서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그의 삶에 예배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이런 기막힌 영적 사망을 경험하고 있으며 성령 하나님에 대하여 전혀 민감하지 못한 현대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사자후를 토하는 토저의 글에 이런 말도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교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시급히 요구되는 것은 성령님의 능력이다. 더 많은 교육, 더 탄탄한 조직, 더욱 세련된 방법들, 그리고 예배당의 화려한 시설과 더 비싼 장비가 우리들의 영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들을 환자가 죽은 뒤에 가져오는 인공호흡기와 같다. 환자가 죽은 이후에 인공호흡기를 아무리 갖다가 댄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에게 다시금 생명을 불어넣어 줄 수는 없다는 말이다.”
  주후 1세기에 바울의 전인격을 통제하면서 그를 이방의 위대한 사역자로 쓰시기 위해 가는 곳마다 바울의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사용하셔서 마음껏 그리고 자유자재로 그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신 성령님의 일하심은 오늘도 그 성령님의 일하심을 제한하거나 억제하거나 억누르지 않고 그 분의 일하심을 사모하는 자들에 똑같이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의 일하심을 인정하고 주님을 사모합시다(요 5:17).

7) 예언을 멸시치 말아야 합니다(본문 20절).

이 구절의 유진 피터슨의 번역을 보면 “주님께 말씀 받은 사람들을 막지 마십시오. 그러나 쉽게 속지는 마십시오. 모든 것을 꼼꼼히 따져 보십시오.” 이 구절을 주목하여 보면, “주님께 말씀 받은 사람들을 막지 마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예언을 한다는 것은 분명히 한 가지를 엄격하게 제한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을 대신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에서 치우치면 그것은 100% 가짜입니다. 신학적 해석과 개인적인 해석은 결코 같지 않습니다. 신학적인 해석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범주를 떠나지 않지만 개인적인 해석은 자기의 감정을 주입합니다. 예언은 그래서 신학적이어야 하며 만약 예언에서 돈거래가 왔다 갔다 하면 그것은 굿판입니다. 더 심하게는 아주 질 나쁜 고도의 종교 사기극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20절을 재해석하면, 예언을 받으러 간다는 말의 진의는 부족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간다는 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것 외의 내용들을 말한다면 100% 거부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언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가장 건강하고 위대한 예언은 매일 내가 섬기는 교회에서 예언됩니다. 그 예언을 듣고 건강한 사역을 감당합시다.

8)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하는 것입니다(본문 21-22절).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바울은 본문의 이 가르침을 로마교회에 편지하는 글에서도 다루었습니다. “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로마서 16:19절).
  바울이 교회를 세워 나아가던 주후 1세기의 교회들을 지칭하여 우리는 초대교회라고 말하는데 문자 그대로 초기 기독교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이때는 신학이나 교리가 완벽하게 설정되지 않은 과도기로 조직이나 교회의 리더십도 불안하기 매일반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신학과 교리가 완벽하지 않은 것을 노리고 사탄은 유대 율법주의, 영지주의, 니골라 당과 같은 이단들을 창궐시킴으로 교회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회의 존재 자체를 흔드는 일에 대하여는 오늘처럼 기다리고 인내하시는 것이 아니라 즉각적으로 당신의 뜻을 나타내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예루살렘 교회의 일련의 일들이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즉결처분하신 것과 예루살렘 교회가 믿는 자의 수가 많아졌는데 불구하고 사도들이 조직을 구성하고 사람들을 공궤하고 하는 일에 정신을 팔자 하나님이 직접 나서셔서 스데반 집사를 순교하게 하신 뒤에 핍박을 예루살렘 교회에 주어 사람들을 흩으셨습니다. 영적 분위기가 상당히 불안한 시기였습니다. 이런 분위기는 어린 교회인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더욱 예민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제 첫 번째 편지을 거의 마감하는 5장 말미에 그래서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역설한 것입니다.
  ‘근묵자흑’(近墨者黑) 이라는 말은, 묵을 가까이 하면 검게 된다는 선조들의 가르침입니다. 까마귀 우는 곳에 백로에 가지 말라는 것은 경구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죄의 가능성이 보이는 곳에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죄의 근원적인 흐름들을 차단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의 대표적인 임상 심리학자인 하치볼트 하트 박사는 ‘참을 수 없는 중독’이라는 자신의 책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죄보다 크며 그 분의 자원은 우리의 불쌍한 필요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계속 선포할 때 모든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범사에 좋은 것을 취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악한 것에는 미련하고 선한 것에는 지혜롭게 하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악을 버리고 선을 취하여 이기는 그리스도인들이 됩시다.
  대천덕 신부의 증조할아버지인 R.A 토레이 목사는 ‘성령 세례를 받는 법’이라는 자신의 책에서 “성령의 충만을 받기 위해 필요한 것은 산더미같이 많은 불신앙적인 해석이 아니라 한 줌의 신앙적 성령 체험이다.”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체험을 날마다 경험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에 부족하지 않은 사모함이 있기를 바라며 그것으로 인하여 항상 선한 쪽에 줄을 서서 성도다운 성도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