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5.06.14 셀 사역2024-04-22 15:30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잠’과 관련된 나의 일상의 에피소드 나누기.  

 
경배와 찬양 (WORSHOP)
● 새벽을 깨우리로다 (복음성가)
● 어둔 죄악 길에서 (찬송가 523장)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본문 : 데살로니가전서 5:4-11
● 제목 : 깨어 있으면 됩니다.
1)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재하고 있었던 ‘자고 있는 다른 이들’ 은 과연 누구였습니까?
● 설교를 통해 선포되었던 세 가지의 부류들을 말해 보십시다.
1)   
2)   
3)     

2) 자고 있는 것을 깨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1장과 5장에서 바울이 연관하여 말한 교훈을 참고하십시다.
● 믿음 – 1장과 5장
● 사랑 – 1장과 5장
● 소망 – 1장과 5장  

3) 주간 복음의 교훈을 말해 보십시다.
※ 아직도 기회가 있다는 말을 적용해 보자. (본문 11절 참고)
※ 깨우기 위해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골로새서 1:24절, 1:29절 적용하기)  

 
사역하기 (WORK)
1) 중보기도
  ① 담임목사님의 안식 월 동안의 사역을 위하여
  ② 연약한 지체들을 위하여
  ③ 대입 준비를 위한 수능생들을 위하여
    (곽보람, 서혜린, 섭현우)
  ④ 셀원들을 위하여

2) 치유기도
3) 헌금 기도
4) 광고
5) 폐회: 주기도문  

 
설교요약 (SUMMARY)
2015년 6월 14일 주일 낮 예배 설교 (데살로니가전서 20번째 강해)
제목: 깨어 있으면 됩니다.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5:4-11

인간이 극복할 수 없는 한계를 느낄수록 종교성에 대한 관심은 높아집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절에서 말하고 있는 ‘주의 날’이 그렇습니다. 이‘날’ 은 단순하게 인간이 지정한 날이 아니라 야웨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날(욤)’입니다. 그렇다면 그 날은 살아 있는 날일 것이고 동시에 오고 있는 날 일 것입니다. 그 날이 오고 있다면 그 날과 관계가 있는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바울은 재림의 시기에 대하여 궁금해 하며 죽은 자들에 대한 염려로 가득 차 있었던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을 위해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고 했습니다(본문 4-6절). 바울은 사랑했던 데살로니가 지체들을 향하여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리라”고 선포합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가 공유해야 할 은혜는 이것입니다.

※ 깨어 있는 것입니다.

  당시 데살로니가 지역에는 여타 다른 종교적인 색채가 있는 분파들이 여럿 있었습니다(알렉산더 대왕, 율리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 황제 숭배, 카비리, 각종 민간 숭배 신앙들). 이들은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이르기 약 200년 전부터 이곳에 뿌리를 내린 종파로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믿고 있었던 종파입니다. 또 한 부류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약 3주 동안 회당에서 데살로니가의 회당에서 사역을 했다는 기록에 의지하면 데살로니가 지역에는 이미 유대인들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됩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의 사역을 그 어느 종파보다도 심각하게 핍박했습니다. 이들을 가리켜 바울이 ‘자고 있는 다른 이들’ 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들과는 달리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을 향하여 자지 말라고 권고함과 동시에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6절)”.
  정신을 차려야 깨어 있게 됩니다. 본문 8절에서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고 말합니다. 바울은 정신을 차린다는 의미를 ‘믿음의 사랑의 가슴막이를 하는 것과 구원을 해 주시는 하나님을 향한 소망의 투구를 쓰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두 가지의 군사용 기구가 본문에 등장합니다. 가슴막이와 투구입니다. 두 가지의 공통점은 공격용 무기가 아니라 수비용 즉 방어용 무기라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분명히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라는 말은 공격에 대비하여 준비하라는 영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깨어 있기 위해서는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라는 방어용 무기로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며 영적으로 어느 때에 공격이 임한다고 해도 능히 그 공격을 막아낼 준비를 하라는 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바울이 편지의 말미에 이것을 다시 이야기하는 까닭은 1장에서 언급한 대로 계속하여 데살로니가 교회 지체들의 신앙적인 승리의 그 장점들을 이어가라는 권면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우들은 이미 세 가지의 승리를 견지하고 있었습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살전 1:3).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무장합니다. 그것은 공격 무기가 아닙니다. 철저하게 방어용 무기입니다. 그런데 싸움을 싸우는 무기가 아닌 방어용 준비 무기를 사용한 자의 결과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바울이 복음을 증거 했던 지역들은 가정이었고 언덕이었고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공동체였지 건물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한 곳은 건물이 아닌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생명의 복음이 녹아져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의 선교 결과는 그리스 전 국민의 98%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갖고 살아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데살로니가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라는 가슴 막이를 하라고 그리고 구원의 투구를 쓰라고 권했던 바울 그리고 그 말씀을 기초로 그 날이 올 것을 기대하며 깨어 있었던 데살로니가 성도들로 인하여 복음은 편만이 전해졌고 오늘 그들의 후손들 중 98%는 예수의 복음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주전 313년 이전인 콘스탄티우스 이전의 시대는 기독교 박해 시대였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적지 않은 박해를 받아야 해서 데린구유 같은 지하교회를 만들어 신앙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주전 313년에 콘스탄티우스 황제가 기독교로 개종한 후 기독교는 국교가 되었고 음지의 종교에서 양지의 종교를 변하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이후 기독교는 예수의 정신을 잊어버리고 기득권의 종교, 정치적인 가진 자의 종교, 편리의 종교로 전락했다는 점입니다. 동시에 엄청난 건물들을 지어 외형적인 교세를 자랑하기에 급급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옷을 벗어 버렸습니다. 그 결과 기독교는 몰락하게 되었습니다. 동로마제국의 수도였고 기독교 최대의 도시였던 콘스탄티노플은 사라지고 이제 이스탄불이 되어 8,000개 넘는 모스크 건물들이 세워졌고 하루에 5번씩이나 알라는 위대하다고 외치는 이방의 소굴로 전락하였습니다. 깨어 있지 못했던 공동체에는 이제 98%의 사람들이 무슬림 신자가 되어 그토록 바울이 외쳤던 복음과는 정 반대의 이방의 굴혈로 들어가 복음에서 돌아서게 된 것입니다.
  터키 남부인 콘야 지역에 성경 상의 이름인 골로새 지역에서 복음을 전한 바울은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에게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권면했습니다(골로새서 1:24절). 그는 또한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9)”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현재 골로새 교회로 추정되는 지역은 한 구릉지대로 그 구릉 위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고 이곳이 골로새 교회로 추측되는 곳이라는 녹 슬은 이정 푯말만이 세워져 있습니다. 만에 하나 골로새 교회의 지체들이 바울의 권면을 귀에 담았다면 지금처럼 골로새가 폐허로 남아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어 있지 않을 때 우리들도 마른 잡초 같은 엉겅퀴 같은 모습의 쓸쓸한 영적 공허함을 맛보게 될 수 있습니다.
  문 9-11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바울은 ‘깨어 있든지 자든지’ 하라고 분명히 선포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에서 데살로니가전서를 쓰고 있었던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자고 있었던 이방의 신들을 섬기고 있는 자들을 향하여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독려하고 있습니다. 지금 자고 있다면 깨어나라는 것입니다. 아직도 기회가 있다는 말입니다. 자고 있는 너희들을 위해 너희들을 살리기 위해 주님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즉 복음을 서로 전하고 권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기회는 있습니다. 자고 있는 자들에게 아직도 문이 열려 있습니다. 이름만 예수 믿는 자들이고 실상은 자고 있는 명목적 그리스도인들이여! 아직도 문은 열려 있습니다. 주님은 믿음과 사랑의 가슴막이를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을 잃지 않고 투구를 쓰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잘 나가던 자신의 세속적 전 인생을 포기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 생명을 걸었습니다. 그는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하는 글에서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골 1:29)
  이러려면 반드시 전제가 필요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믿음, 사랑, 소망을 갖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