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5.05.31 셀 사역2024-04-22 15:29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내가 좋아하는 팝송이나 노래 소개하기. (소개하며 좋아하게 된 이유 나누기)  

 
경배와 찬양 (WORSHOP)
● 내 구주 예수를 (찬송가 314장)
● 주 임재 안에서 (복음성가)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본문 : 갈라디아서 1:6-12
● 제목 : 복음 하나로 충분합니다.
1) 바울이 세운 갈라디아 교회에 침투한 다른 복음과 바울이 단호하게 선포했던 성서적 바른 복음을 병행하여 설명해 보자.
● 다른 복음 : 갈라디아서 1:6-9 참고
● 성서적 바른 복음 : 갈라디아서 3:2-5, 5:2-6 참고  

2) 성서적 바른 복음보다 다른 거짓 복음에 현혹되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동시에 이런 오류를 극복하는 대안은 무엇일까요? 설교의 테마를 기억하면서 말해 보십시다.
● 현대인들의 심리 기저와 관련하여 (매트 첸들러 목사와 존 맥아더 목사의 갈파를 참고하자.)
● 오류 극복의 대안들 (두 가지로 말해 봅시다.)  

3) 신앙생활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성서적 복음 이외의 유사 복음에 자꾸만 기웃거렸던 일들을 고백해보고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복음으로만 만족하는 성도가 되도록 합심하여 기도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 내가 관심을 가진 유사 복음들.
※ 합심하여 기도하자. (기웃거리지 않기를)  

 
사역하기 (WORK)
1) 중보기도
  ① 담임목사님의 안식 월 동안의 사역을 위하여
  ② 영육의 연약한 지체들의 치유와 회복을 위하여
  ③ 교회 사역을 위하여
    (6월 월삭예배)
  ④ 셀 원들을 위하여

2) 치유기도
3) 헌금 기도
4) 광고
  ① 6월 1일(월), 오전 5시, 월삭예배

5) 폐회: 주기도문


  

 
설교요약 (SUMMARY)
2015년 5월 31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제목: 복음 하나로 충분합니다.
본문: 갈라디아서 1:6-12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매진 복음에 기웃거리는 갈라디아교회의 지체들에게 ‘다른 복음은 없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갈 1:6-10절). 이 구절을 NLT 영어성경에서는 ‘마치 좋은 뉴스인 것처럼 가장한 다른 방법’ 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변질시키고 있는 자들에게 복음의 선명성을 선포하며(갈 1:11-12) ‘복음은 내가 만들어낸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았다’고 말합니다. 즉 바울의 이 선언은 복음 하나면 충분한 것을 말합니다.

1) 예수께서 복음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충분합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사도 바울이 제 1차 전도여행을 통해서 복음을 증거 한 뒤에 제 2차 전도여행을 할 때 다시 방문하여 세운 교회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기독교 역사상 첫 번째 선교사로 바울과 바나바를 파송해 비시디아의 안디옥을 비롯해서 이고니온, 더베, 루스드라, 루가오니아와 같은 남부 갈라디아 지방을 중점적으로 전도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1, 2차 전도여행을 통해 복음의 씨를 뿌리며 사역했던 이 지역을 가리켜 갈라디아 지방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이곳을 경유하며 복음을 전한 결과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었고 세워진 갈라디아 교회는 대부분이 초 신자로 구성이 된 아직은 미 성숙된 신앙인들이었기 때문에 항상 이단 사설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어 위태로움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3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바울은 갈라디아 지역을 다시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 때 바울의 걱정대로 갈라디아의 신자들이 복음에서 떠나 갈라디아 교회에 율법주의자들의 유혹에 빠져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믿음도 중요하지만 율법도 지켜야 한다는 가르침에 넘어졌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신앙의 연륜이 짧았던 갈라디아 교회에 유대 율법옹호론자들이 침투하여 바울이 전한 복음의 선명성을 위축시키는 일들을 자행했던 것입니다. 그 악한 자들은 율법에 기록된 할례 준수가 복음보다 더 중요하다는 이론을 전개해 나아갔는데 갈라디아 교회의 교인들은 그 말에 솔깃하여 바울의 복음을 저버려 넘어진 것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는 바울의 사도권까지 매도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절박한 위기적 상황 속에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에게 책망 섞인 편지를 보내기로 하고 갈라디아서를 씁니다.
  바울은 복음을 변질시키고 율법을 강요하는 유대주의적인 선동가들을 향하여 무섭게 책망을 합니다(본문 6-7절).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가르친 것은 복음을 가장한 다른 복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거짓 복음과는 달리 8절에서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이라는 분명한 복음을 소개합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지체들에게 전한 복음의 요체는 너무나도 선명한 복음의 내용이었습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갈라디아서 2:19-21절).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라디아서 5:2-6절).
  복음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께서 주시는 구원”입니다. 그 예수께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나는 구원을 받았고 그러므로 이제는 내 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사신다고 말합니다. 또한 할례로 대변되는 율법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전체를 통해 이 복음의 능력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갈라디아서 3:1-5절).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충분한 복음을 할례와 같은 율법의 행위를 행하여만 구원을 얻는다고 변질시킨 자들의 유혹에 빠진 자들을 향하여 바울은 준엄하게 책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셔서 나를 구원하여 주신 예수께서 내 안에 사는 것으로 자랑스러워하는 것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반대로 같은 맥락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나를 구원하여 주신 것 가지고는 성이 차지 않아 그 예수님을  부담스럽고 불편해 하여 또 다른 그 무엇인 플러스알파를 요구하는 미련한 자들은 복음의 능력을 믿지 않거나 거부하는 자들임을 바울은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그래서 복음 가지고는 충분해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복음 이외의 것들을 찾습니다.
  달라스 교회의 담임목사인 매트 첸들러는 ‘완전한 복음’에서, “사실 기독교계 전반에서 사람들은 십자가는 한 쪽으로 치우쳐 버리고 치욕과 피, 끔찍한 죽음에서 한 걸음 물러나 다른 무언가에 집중하려고 한다. 은사주의자들은 오순절을 기독교의 중심으로 삼으려고 한다. 캘빈주의자들은 예정론을, 자유주의자들은 사회정의를, 근본주의자들은 도덕적 행위를 중심으로 삼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 중에 하나를 기독교의 신앙의 중심이아 소망의 근거로 삼으려는 것은 유일한 십자가의 능력을 무시하는 행위이다. 죄에 대하여, 피에 대하여 말하지 않으려면 복음에 대하여 아예 입을 다물어야 한다.” 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행하신 십자가에서의 승리라는 그 복음의 능력을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것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가졌던 복음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의 고백이 본문 11-12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으로 따라 된 것이 아니요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바울은 복음의 권위를 인간적인 방법에서 찾지 않고 복음의 권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것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복음의 강력한 권위는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복음의 능력에 만족해할 때 우리는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께 찬양할 수 있습니다.
  미국 그레이스 교회의 담임목사인 존 맥아더는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한 기독교’ 라는 책에서 이렇게 갈파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어떻게 오늘날 우리들이 가진 ‘전문지식’도 없이 교회의 역할을 해왔을까? 그런데도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을까? 유명인사도, 간증도, 현대 경영 기법도, 심리치료도, 대중매체도 없이 현대교회가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수단들도 거의 없이 그런 일을 해냈다. 어떻게 가능하였을까? 그것은 그들에게는 말씀과 성령의 능력과 예수 그리스도라는 복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교회는 예수라는 복음의 능력으로 충분한 교회, 예수 한 분만으로 충분한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2) 그 복음이 사람을 영적으로 변화시키는 유일한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기질적으로 쉽게 변하지 않지만 만약 변했다면 그것은 철저한 영적 변화이지 기질적, 성품적 변화는 아닐 것입니다. 영적인 변화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복음이 사람에게 들어가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의롭다고 인정하는 칭의(稱義)가 일어나고, 의롭다고 인침을 받은 사람들은 믿음을 갖게 합니다. 그런데 그 믿음을 바울은 예사롭지 않게 평가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믿음을 가진 자가 비로소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평가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분명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우리의 주군을 통해서 주어지는 복음의 능력이 우리들을 영적으로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본문 11-12절). 사람이 변화된다는 것은 전인적인 변화를 말합니다. 전인적인 변화의 시작은 예수를 믿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께서 복음 그 자체이시며 그 분을 믿는 믿음으로부터 하나님의 능력이 유출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의 강물이 흐르기 때문입니다.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바울의 모습은 살기가 등등했고 예수의 도를 믿는 자라면 위협하며 그들을 죽이고 폭력을 가했던 사울이었습니다. 그런 사울이 바울이 되어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분으로부터 능력을 부여받아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고백합니다(갈 6:14,17). 사울이 바울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라는 복음의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들 주변의 모든 문제는 예수라는 복음이 우리 가운데 없기에 존재합니다. 내가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린 것은 그 무엇 때문도 아닌 바로 나의 영적 무기력 때문입니다. 예수라는 복음의 능력이 우리들 가운데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예수라는 복음의 능력이 내 안에 있으면 나는 전인적 변화를 날마다 경험하게 될 것이며 그 변화의 능력으로 승리하는 이 땅에서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만족하고 그 분이 주시는 복음의 능력으로 재무장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