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5.05.24 셀 사역2024-04-22 15:28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적반하장도 유분수네’ 라고 느꼈던 일들이 있으면 함께 나누어 보기.  

 
경배와 찬양 (WORSHOP)

● 주여 지난밤 내 꿈에 (찬송가 490장)
● 마지막 날에 (CCM)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본문 : 데살로니가전서 5:1-3
● 제목 : 본말이 전도되지 않도록
1)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에게 재림의 때와 기한을 말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 구약의 예언서와 관련하여
● 예수님의 교훈과 관련하여 (사도행전 1:7, 마태복음 24:36 참고)  

2) 재림에 관한 본(本)과 말(末)을 설교를 참고하여 말해보자.
● 본(本) 
● 말(末)
● 본말을 전도시키지 말라는 교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3) 바울은 재림에 관한 본말전도를 경계했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범할 수 있는 일반적인 본말전도의 그릇된 신앙의 궤적들이 무엇이 있는지 추적하여 논한 뒤 반성해 보자.
※ 내가 범하고 있는 혹은 범하기 쉬운 본말전도의 그릇됨들.
※ 극복하는 방법들 모색하기.  

 
사역하기 (WORK)
1) 중보기도
  ① 담임목사님의 건강과 사역을 위하여
  ② 영육의 연약한 지체들의 치유와 회복을 위하여
  ③ 교회 사역을 위하여
    (성령강림주일, 정기 선교주일)
  ④ 셀원들을 위하여

2) 치유기도
3) 헌금 기도
4) 광고
  ① 수요기도회 참석하기

5) 폐회: 주기도문  

 
설교요약 (SUMMARY)
2015년 5월 24일 주일 오후 예배 (데살로니가전서 19번째 강해)
제목: 본말(本末)이 전도(顚倒)되지 않도록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5:1-3

  긍정의 사고방식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풍조를 만들어 주던 사회적 경향들이 도리어 사람을 죽이는 일이 된 까닭은 본말이 전도되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본(本)은 사물의 근간이 되는 부분을 말하는 단어이고, 말(末)은 지엽적인 부분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본이 말을 항상 앞서야 하는데 본말(本末)이 전도(顚倒)되어지는 즉,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의 위치가 뒤바뀌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질 때 세상의 가치에서도 본말이 전도되는 것을 비극이라고 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에게 신앙의 본말이 전도되는 일이 없도록 경성하는 발언을 쏟아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은 바울의 가르침대로 주님의 재림을 믿고 주님의 재림에 대하여 대단히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주 안에서 죽은 자와 주님의 재림과의 관계에 대하여 알고 싶어 했고, 살아 있는 자에게 임할 주님의 재림에 대하여 극도의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살전 4:13-18절). 신앙의 연수가 작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재림의 시기가 언제인지 알려고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어린 신앙의 한계였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그들의 소망에 대하여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본문 1절” 너희들이 알고 싶어 하는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시는 ‘때’ (크로노스)와 ‘시기’ (카이로스)의 시간에 대하여는 이 편지에서 특별하게 쓸 것이 없다고 말하면서 답변을 자릅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한 이유는 두 가지의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① 구약의 예언서에 기록된 말씀과 더불어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 12장에서 다니엘 역시 하나님의 때가 궁금해서 그 때를 알려달라고 청원했지만 그 때를 알려달라는 다니엘의 청원은 하나님의 사자에 의해서 묵살됩니다(단 12:8-9절). “내가 듣고도 깨닫지 못한지라 내가 이르되 내 주여 이 모든 일의 결국이 어떠하겠나이까 하니 그가 이르되 다니엘아 갈지어다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니라”
  바울은 예언서의 이 일을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고, 예수님의 말씀도 알고 있었습니다. 주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감람원에 서 있는 500여 성도들에게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행 1:6-7절”
  주님은 아주 선명하게 그 시기는 아버지만이 알 수 있는 권한의 영역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들이 알 바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주님의 이 가르침을 가슴에 담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알고 있는 대로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에게 주님이 행하셨던 말씀 그대로를 데살로니가에서 사역할 때 가르쳤고, 이 문제를 다시 묻고 있는 데살로니가의 어린 신자들에게 그 때의 일을 상기시키면서 다시 한 번 분명한 선긋기를 시도한 것입니다.

② 시기에 대한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을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에게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시기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시급한 것은 예기치 못할 때에 오시는 주님의 재림입니다.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본문 2-3절)” 이 말씀에는 세 가지의 사인이 들어 있습니다. ⓐ 밤에 도둑같이 임한다는 것. ⓑ 평안하다, 안전하다고 방심할 때 임한다는 것. ⓒ 임신한 여자가 해산의 때를 맞이하는 것 같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이것들의 공통점은 예기치 않을 때의 다시 오심입니다. 재림은 불시에 임하는 것과 같이 예고편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측 불가능이 정답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은 본인들이 추구하는 정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바울이 단호하게 그토록 사랑하고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 지체들의 소원을 풀어주지 않은 까닭은 바울도 그날을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신학적인 이유를 배제할 수 없는 것은, ※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에게 흘러 들어갈 수 있는 복음의 본말전도를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지체들에게 전했던 복음의 본(本)은 예수께서 다시 오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언제 즈음 오실 것인가? 는 분명히 말(末)입니다. 본(本)을 중요시 여기는 신앙인은 말(末)에 좌지우지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언제 오시는가?’는 그들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준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밤에 거하지 않고 낮에 거하며 졸지 않고 깨어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말에 초점을 맞추는 자들은 깨어 있지 않고 준비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을 때를 보고 거기에 맞추어 살겠다고 머리를 굴리려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본말전도입니다.
  본문 2~3절을 보면 시기가 아니라 세 가지의 영적 기상도가 형성될 때 주님이 이 땅에 오실 것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 밤에 도둑같이 임한다는 것, • 평안하다, 안전하다고 방심할 때 임한다는 것, • 임신한 여자가 해산의 때를 맞이하는 것 같이 임한다는 것) 그렇다면 우리는 이 세 가지의 힌트를 통해 재림에 관한 한 본말이 전도되지 않게 하는 방법을 역으로 배울 수 있습니다. 밤에 거하지 않고 낮에 거하는 것이며, 평안하지만 방심하지 않고 주님이 오실 것에 깨어 있는 것이며, 해산의 때를 정확히 계수하여 항상 출산을 준비하는 임산부처럼 영적인 경성함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본과 말을 전도시키려는 자들의 공통점은 주님이 이 땅에 오시는 것에 대하여 준비되어 있지 않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아니면 재림을 믿지 않고 싶어 하여 그 날을 준비하고 싶지 않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시 이 땅에 오시는 것이라는 본에 대하여는 침묵하면서 반대로 언제 오는가? 라는 말(末)을 놓고 논쟁하며 시비를 겁니다. 말(末)을 본(本) 앞에 두려는 시도입니다. 참 나쁜 시도이고 옳지 않은 질 나쁜 시도입니다.
  마태복음 16:16절의 베드로가 행한 신앙고백은 단순한 입술의 고백이 아닌 본과 말이 전도되지 않는 신앙고백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당대 최고의 도시로 헤롯 빌립이 헬몬 산 근처 해발 345미터의 높은 곳에 인위적인 거대 도시를 만들어서 로마의 황제 이름인 ‘가이사랴’라는 이름과 자신의 이름인 ‘빌립’을 합쳐 ‘가이사랴 빌립보’ 라는 도시로 명명하고 자신의 통치권과 충성을 맹세하기 위해 로마의 황제에게 헌정한 도시였습니다. 그러기에 그 도시의 위용은 어마어마한 위용이었습니다. 반면 그곳에 계시던 주님의 모습은 상대적으로 초라한 몰골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바로 그곳에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를 물으셨고, 그 답이 “주는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이 고백은 本이 되신 예수 당신은 결코 末인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세속 도시의 휘황찬란함과 바꾸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베벌 세어가 말한 대로 하나님의 노래를 부를 때마다 본인에게 보내주는 청중들의 위대한 박수소리라는 말(末)을 예수라는 본(本)과는 결코 바꾸지 않겠다는 고백과 동일한 고백이었습니다.
  오늘 이 시대, 본과 말을 바꾸라는 강요들이 사탄적인 공세로 우리들을 휘몰아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공세에 쓰러졌고, 쓰러지고 있고, 또 쓰러질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쓰러짐의 일행에 포함되지 않도록 쓰러뜨리는 일체의 것들과는 습관을 같이 하지 마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분명히 인식할 신앙의 명제가 바로 본과 말을 전도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승패의 요건입니다.
  다니엘 12장에 나오는 이 구절을 기억합시다.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 날에는 네 몫을 누릴 것임이라”(단 12:13절). 예수님의 오시는 때와 기한이라는 말(末)에 대하여는 눈을 감고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신다는 본(本)에 대하여는 눈을 크게 뜨십시다.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고 다니엘에게 권면한 하나님의 천사의 선포는 본과 말의 자리와 위치를 바꾸지 말라는 명령임을 명심하고 이 위대한 진리에 아멘과 행함으로 화답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