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나의 영성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을 나누어 봅시다. 혹은 추천해 봅시다. | 경배와 찬양 (WORSHOP) ● 시선 (CCM) ● 너 성결키 위해 (찬송가 420장)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4:3-8 ● 제목: 너희의 거룩함이라 1) 당시 데살로니가 지역의 세속화로 인하여 바울이 염려했던 것과 이로 인해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에게 단호하게 명한 것이 무엇인지 정리해 보자. 2) 바울이 세속성의 상징과 대립하여 맞서야 하는 두 가지 이유를 밝힌 것의 의미와 그것을 오늘 우리의 영적 교훈으로 삼아 보자. ● 출 20:17절: (본문 7절): ● 마 6:9-10절: (본문 8절): |
3) 나에게서 세속성을 거둬 내고 거룩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지금 당장 실천할 것을 다짐해 보자. 사역하기 (WORK)1) 중보기도 ① 담임목사님의 건강과 사역을 위하여 ② 춘계 대심방 사역을 위하여 ③ 창립 6주년 기념주일의 사역을 위하여 ④ 영육의 연약한 지체들의 치유와회복을 위하여
2) 치유기도 3) 헌금 기도 4) 광고 ① 수요기도회 참석하기
5) 폐회: 주기도문 | 설교요약 (SUMMARY)2015년 4월 19일 주일 오후 예배 (데살로니가전서 16번째 강해) 제목: 너희의 거룩함이라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4:3-8
세상이 소유할 수 없는 교회의 가치는 거룩성입니다. 세속성이 결코 넘볼 수 없는 영성의 최고의 가치인 거룩성은 어떤 것일까를 말씀을 통해 찾아 봅시다.
바울과 그의 동역자인 실루아노 그리고 디모데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을 향하여 격려와 용기를 북돋아주면서 한편으로는 염려하는 것을 말해 줌으로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에게 경성하도록 하는 지침을 줍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본문 3절). 바울의 일행은 당시 데살로니가 지역에 팽배했던 세속성의 뿌리 중에 가장 치명적인 악의 축이자 독(毒)일 수 있는 한 면인 ‘음란’을 말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데살로니가 지역은 당시 극도의 성적 타락이 만연하던 장소였습니다. 윌리엄 렉키(William Lecky)는 자기의 책 ‘유럽의 도덕사’ (History of European Morals)에서 로마 제국 초기 시절의 성적 방종함을 “헬라, 소아시아, 애굽의 도시들은 가장 방종한 타락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이 국가들에서 온 수많은 노예들이 그들의 부도덕성을 로마에 퍼뜨렸다.” 고 묘사했습니다. 소아시아의 도덕적 상태가 이 지경이었기에 데살로니가 역시 예외일 수 없었습니다. 당시 데살로니가 지역은 이런 성적 방종과 타락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기에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어린 지체들이 이런 영적 타락의 물결 앞에 서 있었던 위기감을 직시하고 분명한 어조로 이렇게 선언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대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말고”(본문 3-5절). 주전 1세기, 세속성의 상징은 ‘성적인 타락과 방종’이었습니다. 이 세속성은 당시 상식이었고 심지어는 죄라고 치부되지 않았던 시대였습니다. 데살로니가 지역에 만연했던 성적 타락은 데살로니가 교회 안의 어린 신자들에게도 당연히 침투하여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은 이 지역에서 일상이었던 왜곡된 성적인 일상들에 대해 가치의 혼돈을 경험했을 것은 당연했고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인의 성생활에 대한 정체성마저도 헷갈렸을 것이 당연합니다. 바울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어린 신자들은 초기에는 마땅히 그리스도인은 성적인 방종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교훈에 아멘 했을지 모르지만 영적 지도가가 없는 상태에서 세속성의 공격이 노도와 같은 지경에서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리디머 신학대학교의 목회 상담학 교수인 폴 트립은 ‘돈과 섹스’라는 본인의 책에서 의미 있는 갈파를 던졌습니다. “성과 돈의 전쟁은 단순히 주변 문화의 유혹에 맞서는 싸움이 아니며 단순한 행동이나 우리가 몸으로 하는 일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외부에 있는 사람들이나 상황이 아니라 내면에 있는 것이 우리 행동을 좌지우지 한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성 문제는 분명 마음의 문제인 것이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어린 지체들에게 임한 데살로니가 지역의 세속성의 성적 타락 원류가 단지 행위적인 측면의 문제가 아니라 영혼을 파괴하는 것임을 알았던 바울은 아주 단호하게 흔들리고 있는 것에서 빠져 나와 대처할 방법을 제시했고 그것이 바로 “거룩성”입니다. 오늘 본문에만 거룩함이라는 단어가 무려 3번 (3,4,7절)에 걸쳐 나올 만큼 바울은 데살로니가 지역에 만연해 있었던 세속성의 상징인 성적 타락에 대한 카운터 파트를 거룩성의 회복으로 보았습니다. 바울이 거룩성의 회복을 성적 타락의 대항마로 여긴 두 가지의 이유가 있습니다.
1) 거룩성의 회복은 다른 형제의 가정을 해하는 성적 일탈을 방지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대할 줄을 알고”(본문 4절),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언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라”(본문 6절). 이 본문의 선포는 아마도 출애굽기 20:17절에 기록된 십계명 중에 10번째 계명을 신약적인 차원에서 주석한 것처럼 보이는 기막힌 갈파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에게 10가지의 계명을 정리하여 선포하시면서 맨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이웃의 경계를 허물어 나의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일체의 행위를 수탈로 정의하시며 이 일을 금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이웃의 경계선을 침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의 집의 아내를 탐하는 일은 이웃의 경계선을 넘는 일입니다. 내 아내가 아닌 남의 아내를 범하는 일은 자기에게 주어진 분수를 넘어서는 행위라고 못 박은 것입니다. 내 아내를 존중하지 않고 창녀와 몸을 섞는 행위는 자기의 집의 울타리를 넘어 이웃과 형제에게 해를 가하는 것이라고 바울은 정의한 것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에게 성적인 타락과 방종은 다른 형제의 가정을 해하는 일임을 분명히 함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적인 윤리를 선명하게 정리한 권면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윤리이자, 이론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이론과 윤리의 문제가 성적인 측면에서는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성적인 방어선이 무너지고 뚫리는 일은 폴 트림 교수의 말처럼 육체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성적인 문제는 특히 영혼과 관계되어 있는 것이기에 학습이나 습관의 개발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본문 7절). 이 구절 속에 담긴 은혜는 하나님께 가까이 있을 때 거룩성을 회복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우리들을 거룩하게 하시게 위함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밀접하면 밀접할수록 세속성은 멀어지고 반대로 하나님과의 거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세속성과는 가까워집니다.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수 5:15절).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극적으로 건너서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더 이상의 전진을 허락하지 않고 여호수아를 맞서고 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칼을 들고 있는 존재가 여호와께서 보내신 군대 장관임을 알고 그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하명을 기다립니다. 바로 그 때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여호수아에 내린 첫 번째 일성이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니 네 신을 벗으라’ 였습니다. 신을 벗으라는 것은 여호수아가 그 동안 걸어왔던 방법을 다시 한 번 하나님 앞에서 멈추어 서서 점검 받으라는 명령이었습니다. 혹시 그 동안 가나안까지 오는 여정에서 여호수아 스스로가 나도 모르게 가졌던 자기 승리의 도취감이나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아도 할 수 있다는 자만감이나 이런 세속적 아류들을 있지 않았나 발걸음을 멈추고 성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영성인가? 세속성인가? 나의 걸음이 어떤 것인지를 살피라는 것입니다. 거룩성의 회복은 자연적으로 따라오는 영적 보너스가 담보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는 영적인 삶을 살아낼 때 성적인 타락은 물론이거니와 세속적인 아류들로 편입되는 것을 막아주는 가장 위대한 무기가 주어진다는 도전입니다. 날마다 내가 선 곳에서 나의 신발을 벗고 하나님의 음성과 조명 말씀을 통해 부여받는 교우들이 됩시다.
2) 거룩성의 회복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영적인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마지막 8절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에게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고 했습니다. 아내들을 존귀하게 여기는 것, 거룩하게 여기는 것을 저버리는 행위는 단순히 아내를 버리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죄악임을 명백히 하는 말씀입니다. 성령의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버리는 행위는 곧 성적인 타락을 위시로 세속적인 아류들을 따르는 행위임을 바울은 지금 어린 신자들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남의 집 가정의 담을 넘지 않고 자기 아내를 사랑하고 아끼고 존귀하게 여기며 거룩하게 인정해 주는 것은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이 되는 것이며 그것 자체는 곧 거룩성을 유지하는 일이 되는 것임을 본문 3절 전반절에서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의 대 명제는 ‘주의 뜻이 이루어지게 기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뜻’ 이라는 단어는 영어성경의 단어로는 ‘의지’ (WILL) 라는 단어와 동일하게 사용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뜻입니다. 우리들이 거룩해지는 것은 내 뜻을 이룰 때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룰 때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우들에게 바울이 증거하고 있는 것은 음란을 버리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내 분수를 넘지 말고 형제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내 아내를 존중하는 것은 곧 가정을 지키며 음란의 죄에서도 해방되는 아버지의 뜻임을 전해 줍니다. 또한 이것이야 말로 가장 하나님을 닮은 거룩한 자아를 형성하는 일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세속성은 이익에 빠르라고 가르치고, 성적인 쾌락을 마음껏 누리라고 강요하며, 마음껏 하고 싶은 것을 누리며 살라고 부축이지만 거룩성은 영악함을 포기하라고 종용합니다. 거룩성은 제한된 성욕을 요구하며 주님의 뜻을 위해 나의 유익을 포기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불편하지만 거룩성의 회복이 아버지의 뜻인 것을 기억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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