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의 끝자락에 서 있습니다. 사람이 평생 동안 늙는 시기가 있다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34세, 60세, 그리고 78세랍니다. 과학 칼럼리스트의 글이니 나름 신빙성과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노화가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례인데 세 번의 노화 변곡점이 있다는 것은 나름 신선한 정보로 느껴졌습니다. 이제는 저는 개인적으로 며칠 후면 두 번째 노화의 변곡점을 맞이합니다. 그래서 며칠 후부터 자세히 보려합니다. 어떻게 늙어 가는지를. 조금 젊었을 때, 아내하고 같이 기도하자고 다짐한 제목이 있었습니다. “추하게 늙지 말자.” 지난 주간, JTBC 앵커브리핑을 보다가 전혀 알지 못했던 한 대중가수가 초대되어 앵커와 인터뷰를 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름 석 자를 전혀 알지 못했던 사람이 요즈음 세간에 가장 주목받는 아이콘이 되었다는 사실을 그 날 인터뷰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90년대 초, 젊은 나이에 재미교포로 한국에 들어와 파격적인 음악을 선보였지만 자유분방한 그의 대중적인 음악은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아무렇지 않은 아이콘이었는데 당시 보수적인 문화에 서 있었던 대한민국의 주류들에 의해 공격을 받았고, 결국 잠깐 반짝하다가 사라진 가수였다는 것이 그날 인터뷰를 통해 알게 된 그에 대한 제 정보의 전부였습니다. 대중가수를 소개하려고 목양터의 이야기 마당의 지면을 빌려 이 글을 쓸 리가 있겠습니까? 그의 인터뷰를 처음부터 끝까지 시청하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국이 버렸던 그였기에 그는 조국을 증오하며 살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했는데, 인생을 막장으로 살지 않고 이후 어려웠지만 한 가정의 가장으로, 남편과 아이의 아빠로 성실하게 살아왔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누구를 지극히 원망할 수 있는 충분한 이야깃거리가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는 주어진 자기 삶에 최선을 다하며 살았다는 것을 뉴스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날 앵커브리핑을 아내와 함께 보다가 제가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남자인 내가 보기에도 저 남자는 참 아름답게 보인다. 이상하다. 50대 초반이라고 하는데 전혀 그렇게 보이지를 않는 것을 보니 사람이 나이를 먹어도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네.” 산전수전공중전을 겪는 게 목사의 일상이라서 그런지 그 날, 그 친구를 보면서 참 부럽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야곱이 바로 앞에서 고백했던 그의 삶의 반추가 이랬다는 것을 압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창세기 47:9) 어쩌면 야곱형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서글픈 현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성경은 그를 구속사의 가계도에 포함된 인생으로 긍정화 시켰지만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험악한 세월을 보낸 뒤, 그렇게 자기의 삶의 자국을 고백한 것은 전적으로 그가 스스로 선택한 결과이자 스티그마라고 저는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뿐이다.”(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 지성사 간, p,214) 지난 달, 인류학자 김현경 교수의 이 글을 읽다가 밑줄을 그었습니다. 내가 추하게 늙을 것인가, 아니면 아름답게 늙은 것인가에 대하여 살아내는 사람도, 말할 수 있는 사람도 결국 나라는 것을 각인시켜 준 촌철살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이 송년주일, 그러니까 일 년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한 해의 끝자락에 서서 이렇게 읊조리며 기도해 봅니다. 하나님! 창세기 47:9절을 말하는 인생이 아니라 디모데후서 4:7-8절을 간증하는 내 남은 삶이 되게 하옵소서.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