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나라가 또 어디에 있을까?
지임철 전도사의 정기 휴기기간이었던 지난 한 주간 새벽예배 운행을 하면서 여러 생각이 교차했습니다. 오전 3시 40분에 기상을 해서 세면 후, 옷을 말끔하게 차려 입고 교회 본당의 예배 세팅을 위한 일체의 준비를 해놓고 운행을 나가는 시간은 약 4시 즈음입니다. 첫 번째 코스에 4시 5분 즈음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는 교우들을 픽업함으로 시작하는 새벽 운행을 마치고 교회에 들어오는 시간은 4시 40분 사이입니다. 예배를 마치고 다시 교우들을 원래의 장소에 내려주고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면 오전 6시 30분. 이제 가을의 길목으로 들어서는 초입이라 그런지 새벽의 여운은 제법 어두운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지난 주간은 오랜만에 새벽예배 운행을 해서 그런지 안 보이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만물이 잠들어 있는 그 이른 시간, 시내를 누비는 교회 차량들이 분주히 교인들을 실어 나르는 광경이 눈에 크게 들어왔습니다. 조금 큰 교회들은 대형 버스를, 이내 그만그만한 교회들은 교회 봉고차를 돌리며 성도들을 픽업하는 모습은 25년 전, 개척교회에서 사역을 하던 때와 별반 다름이 없었습니다. 언젠가 교계에서 뜨거운 감자가 되어 화두에 올라 치열한 논쟁을 벌였던 내용이 새벽예배 차량 운행이 성경적인가? 에 대한 담론이었습니다. 대형교회들이 새벽 시간마저도 집 근처에 있는 교회들에게 성도들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경쟁적으로 대형버스들을 순환시킨다는 곱지 않은 비난이 그 주된 팩트였습니다. 그렇게 치열했던 새벽예배 버스 운행 이라는 화두는 토론을 해도 꿈쩍하지 않는 대형교회의 이유때문인지 잠잠해졌고. 수면 밑으로 들어간 이 담론은 또 다시 부상할 것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지난 주간에 새벽 운행을 하면서 제 눈에 띤 것은 전술한 곱지 않은 논쟁이 보인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아주 묘한 감동이 임했습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수많은 나라 중에 새벽 4시 즈음에 대형 버스이건, 소형 봉고이건 교회 차량들을 운행시키며 교인들을 픽업하는 나라가 또 어디에 있을까? 어느 곳을 가든 모두가 잠들어 있는 그 새벽의 시간에 섬기는 교회는 다르지만 새벽예배를 참여하는 성도들이 기다리고 있는 나라가 또 어디에 있을까? 근래 주지하듯이 이 새벽 은혜의 사모함이 이전 같지 않게 상당히 많이 시들어 있는 영적 상태의 한국교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의 신앙으로 무장한 성도들이 남아 있는 나라가 또 어디에 있을까? 가 떠올라 울컥했습니다. 김기석 목사가 쓴 글에 있듯이 추워도 너무 추웠던 시절, 가난해도 너무 가난했던 시절이었기에 나무로 만든 장의자 자체는 엄두를 낼 수 없어 교회는 찬기가 올라오는 마룻바닥이 전부였던 가난한 고향 교회였습니다. 해서 허접한 톱밥 난로가 유일한 난방이었기에 살을 에는 듯한 추위를 물리치기위해 손을 비비며 예배를 드리며 기도하던 부모님들이 앉았던 자리는 너나할 것 없이 눈물 자국이 흥건했습니다. 그 눈물이 한국교회를 만들었고, 지금도 그 눈물자국의 흔적이 한국교회를 근근이 버티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무기임을 종은 압니다. 새벽을 깨워 차량 운행을 하면서 왠지 모를 격정(激情)이 몰려왔습니다. 이런 격정이. 한국교회의 새벽예배가 종료되는 날, 하나님의 은혜의 잔이 깨질 것이라는 두려움이. 한국교회의 새벽예배의 찬양 소리가 그치는 날, 은혜의 촛대가 다른 곳으로 반드시 옮겨질 것이라는 고통이. 한국교회의 새벽예배가 문을 닫는 날, 이 땅도 완전히 무너질지 모른다는 최악의 공포가. 그래서 이렇게 두 손을 모으며 지난 주간 기도했습니다. “주님, 이 땅에 세워진 교회들마다 새벽 찬양이 중단되지 않게 하옵소서!” 그래서 고라 자손의 시가 절절하게 들리는 한 주간을 보냈습니다.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시편 46: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