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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더불어 셋이2024-03-07 13:58
작성자 Level 10

2021년 1월 3일 신년 감사주일

 

제목더불어 셋이

본문이사야 19:23-25

서론)

 

신년 벽두에 들어서면서 책 한 권을 집어 들고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초가속 (hyper-acceleration)” 인데 5명의 석학들이 코로나 19라는 펜데믹 상황에서 벌어졌고또 앞으로 벌어진 경제적사회학적인 변화에 대하여 심도 있게 연구한 보고서를 모은 책이라서 관심을 갖고 읽고 있습니다.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의 함준호 교수는 코로나 위기에 직면한 오늘경제 패러다임은 가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강도로 엄청난 변화를 줄 것이라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그가 진단한 내용 중에 하나가 이렇습니다.

보통의 일시적 충격이 발생하면 그 충격을 받은 나라나 공동체가 경험하는 경제적인 성장률의 형태가 대체적으로 자 형인데 반해코로나 19로 인한 충격적 상황은 전혀 다르다고 우려했습니다.

이번 위기처럼 크고 구조적인 충격이 발생하면 오랜 기간 과거의 성장 경로로 다시 복귀하지 못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경험입니다물론 기저 효과 때문에 2021년의 성장률 자체는 양(+)으로 나오겠지만 저는 자형으로 굳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함준호, “초고속”, 동아시아 간,112.)

자형의 경제 구조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장기간의 경제적 침체를 말하는 구조입니다.

자형의 경제구조가 코로나 19의 상황에서 지속될 것이라는 전문가의 진단은 아프지만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경제구조가 우리 같은 서민에게 주는 연관된 타격이 있다는 점이 우려스럽습니다.

구조입니다.

구조는 극단적 양극화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알고 있는 자본주의 체계 하에서 합법적으로 자행되는 모순이 있다면 그건 양극화일 것입니다.

어제 경향신문 신년 특집호에 실린 내용을 보니 소위 말하는 화이트칼라 집단에서 체감되는 코로나 19의 고통은 17%인데 반해블루칼라로 대변되는 자영업자와 노동자 계층들이 느끼는 경제적 고통의 체감은 무려 83%에 달한다는 보고하고 있습니다.

이런 지표들은 대단히 아쉽고 유감스럽지만 실현된 재앙 지표입니다.

해서 정부사회지식 계층의 사람들은 표면적으로 이런 재앙을 해결하기 위한 여러 대안들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별로 저들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들 자체가 화이트칼라집단이기에 얼마나 뼈저리게 이런 극단적 양극화의 폐해들을 헤쳐 나가기 위해 진정성을 갖고 정책들을 개발해 나아갈지 회의적이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정말로 정책이 이런 극단적인 분열분리양극화를 해결할 수 있을까에 대한 답은 대단히 부정적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코로나 19의 공격이 여전히 기세등등하게 그 위력을 펼칠 2021적어도 정치역학이나경제적 대안 제시나혹은 사회학적인 방법론보다도 더 앞서야 하는 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것이 바로 영적 스펙트럼이라고 저는 진단합니다.

오늘 신년 감사주일에 우리 교우들과 이 점을 나누어보려고 합니다.

 

본론)

 

제가 이 본문을 처음 접했던 1998년에 오늘 본문은 적어도 충격이었습니다.

서울신학대학교에서 학사와 석시를 할 때적어도 이런 본문 연구는 불온의 텍스트이자대상으로 삼는 순간불순분자로 찍힐 가능성이 당세에는 농후한 본문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성경에 등장하는 애굽과 앗수르는 무슨 일을 하든지 사탄의 대명사였고금같이 귀한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용서가 안 되는 대상 그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애굽은 430년간 히브리 공동체를 노예 삼아 부렸던 원수들이고앗수르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1/2을 멸망시킨 뒤 지도상에서 사라지게 한 또 다른 원수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 두 나라는 존재 자체가 선민 공동체인 이스라엘에게는 대단히 불편한 대상들이었을 텐데 오늘 본문에서 제 이사야는 껄끄럽기 그지없는 이 두 나라에 대하여 대단히 혁명적인 예언을 남기고 있습니다.

본문 2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 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주석이 필요한 대목입니다.

애굽과 앗수르는 전술했듯이 팔레스타인의 소국이었던 이스라엘의 위협 요인들이었습니다.

애굽은 나일강 문명의 발상지입니다.

앗수르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입니다.

문명의 발상지였던 이들 나라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경제정치국방에 있어서 강대국이었기에 팔레스타인의 소국이었던 이스라엘은 언제나 역사적으로 이들에게 공격을 받거나 설움을 당해야 했던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오늘 23절에서 아주 의미 있는 표현을 합니다.

그 날이 되면 애굽과 앗수르로 연결되는 대로가 만들어진다고 역설한 대목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가정이 가능해 집니다.

양 강대국이 서로 상생하기 위해 연합한다는 상상 말입니다.

이 두 나라는 나라 자체로만도 이스라엘에게는 버거운 상대인데 설상가상으로 연합을 한다면 이것이야 말로 이스라엘에게는 퇴로가 없는 재앙이지 않겠습니까?

여기까지만 보면 그렇습니다.

그런데 너무 놀랍고 혁명적인 예언을 이사야가 합니다.

23절 다시 읽겠습니다.

그 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이 두 나라 사람들이 왕래하는 대로를 통해 두 나라 사람들이 함께 하나가 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함께 경배하리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경배하기 위해 합친다는 말입니다.

주전 8세기는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백척간두요풍전등화의 상태였습니다.

정확히 주전 723-722년에 북 왕국은 앗수르의 사르곤 2세에 의해 정복당합니다.

그리고 역사에서 사라집니다.

역사는 어둡습니다.

그리고 현실적이었습니다.

앗수르의 발흥과 북 왕국 이스라엘 패망이라는 선명함이 현실이었습니다.

헌데 바로 이 때 지역적으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던 남 유다에서 예언의 소리를 내던 이사야가 현실과는 전혀 다른 예언을 남긴 것은 혁명적 발언이 아니겠습니까?

지배국이요점령국이요이방 나라인 앗수르와 애굽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경배한다는 것이 이해가 됩니까?

어디 이뿐입니까?

이어지는 본문 24절을 읽겠습니다.

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 및 앗수르와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다시 예언자 이사야가 역설하며 예언합니다.

그 날이 되면 이스라엘애굽앗수르가 더불어 셋이 복이 되는 나라들이 된다고 말씀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세 나라들에게 복을 주시는 주체가 바로 만군의 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마지막 25절에 분명히 적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 주시며 이르시되 내 백성 애굽이여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라

너무 놀랍고 감동적인 선언입니다.

물과 기름 같은 나라들이 이 세 나라들입니다.

도저히 함께 섞일 수 없는 나라들이 이 세 나라들입니다.

그런데 예언자 이사야가 이렇게 선언합니다.

애굽은 내 백성이라고앗수르는 내 손으로 지었다고이스라엘은 나의 기업이라고.

이스라엘을 나의 기업이라고 말한 것은 그리 놀랍지 않습니다.

너무 당연하니까.

하지만 애굽과 앗수르에 대한 예언자의 선언은 충격 그 자체입니다.

누군가가 북한을 조금이라도 옹호하는 발언을 하면 보수적인 사람들은 죽기 살기로 싸우려고 하지 않습니까?

이번에도 북한으로 김정은 정권 비방 전단지 날리기를 법을 정부에서 제지하는 법을 만들자마자좋은 사냥감 먹이를 발견한 것처럼 정부를 공격하는 것이 보수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생존논리이지 않습니까?

같은 맥락으로 예언자 이사야의 오늘 본문 선포는 어떤 의미로 보면 이스라엘의 민족주의자들에게는 매국적 발언으로 비쳐질 수 있는 대단히 불온한 예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언자는 이런 압박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 이 예언을 선언한 이유는 이 선언이 본인 만들어낸 선언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리신 신탁(oracle)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본문을 1998년 목회신학 박사 코스워크 때 민영진 박사님의 구약 원전 세미나 때 처음으로 만났습니다.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재론하지만 당시에 이 구절을 해석한 민 박사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하나님의 꿈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만든 꿈이 아닌 하나님의 꿈을 보았습니다.

이 하나님의 꿈은 2021년을 시작하는 첫 주일우리 세인교회가 가져야 할 꿈이며한국교회가 가져야 꿈입니다.

펜데믹의 공포 속에서 달려온 지난 1년과 앞으로 아무리 많이 양보해도 3/4분기까지는 여전히 코로나의 공포 안에 있어야 할 것으로 여겨지는 2021년의 첫 주일우리는 이 공포를 이길 방법앞에서 이야기 한 대로 정치적사회적의학적 방법 추구만으로는 절대로 극복할 수 없는 방법을 영적으로 제시하려는 하나님의 꿈을 오늘 교우들에게 선언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얻는 영적 교훈이 있습니다.

 

※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획은 편 가름을 와해시키는 것입니다.

 

애굽앗수르이스라엘이 서로 갖고 있었던 편 가름을 와해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애굽은 내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앗수르는 내 손으로 지었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내 기업이라고 했습니다.

공통분모가 보이십니까?

세 나라의 소유권자가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밝히신 것입니다.

놀라운 감동의 메시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만든 것이 담입니다.

하나님은 담을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도리어 담을 허무시는 분입니다.

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염려다 맡기라 주가 돌보시네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염려 다 맡기라 주가 돌보시네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지난주에 캄보디아 이주 여성이 경기도 포천의 비닐 히우스에서 지내다가 목숨을 잃었다는 보도를 접했습니다.

지난 2016년 4월 E-4 비자를 받고 입국한 속캉 씨입니다.

그녀는 4년 동안 이 농장에서 일했는데 사망 당일은 최저 기온 영하 18도까지 내려가는 혹한의 날이었습니다.

우리는 중동의 산유 부국들을 선진국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석유로 부자가 된 그들 나라의 정신이 돈만큼 정비례하는 수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하여 별로 시선이 좋지 않습니다.

일본을 여타 나라들은 선진국이라고 부릅니다.

국민들의 질서 의식혹은 도시의 청정함 등등을 유지하는 면에서 가히 일등 의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반쪽자라 선진국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국가주의로 뭉쳐져 있는 이기주의 때문입니다.

그들이 진정성이 있는 상생의 관계를 수용하지 않는 한일본은 절대로 온전한 선진국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아프지만 우리를 진단해 보십시다.

대한민국은 선진국입니까?

아프지만 언감생심입니다.

캄보디아 이주 여성 같은 불행한 일이 이 땅에서 존재하는 한대한민국도 영원히 선진국의 반열에 설 수 없을 것입니다.

경제적 양극화정치적 양극화세대별 양극화계층별 양극화는 물론이제는 코로나 19 백신 접종 순서까지 양극화를 우려하는 기막힌 시대입니다.

왜 이런 양극화가 극대화되고 있습니까?

담 때문입니다.

인간이 만든 욕심이라는 담 때문입니다.

차준희 교수가 본문에 대하여 멋있는 문구를 책에서 소개합니다.

선민과 만민의 동일시 사건” (차준희, “6개의 키워드로 읽는 이사야서”,174.)

저는 오늘 본문 중에 25절에 주목합니다.

왜요?

순서 때문입니다.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 주시며 이르시되 내 백성 애굽이여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라

복을 주시는 순서입니다.

애굽앗수르그리고 이스라엘입니다.

담은 언제 허물어집니까?

선민의 식의 교만이 무너질 때입니다.

그러려만 다음의 공식을 선민이 인정해야 합니다.

만민이 곧 선민이다.”

저는 친구가 말한 이 문장을 읽다가 친구가 말하지 않은 다른 면을 찾아냈습니다.

담은 만민이 허물 수 없다먼저 선민이 허무는 용기와 결단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목회적인 해석이었습니다.

적용하겠습니다.

양극화의 수혜자는 경제적 우위를 선점한 화이트 컬러들이고정치적 권력을 획득한 기득권자입니다.

이들이 본인들의 유익을 위해 쌓은 각종 담들을 허물어야 합니다.

문제는 이들이 허물겠는가입니다.

허물지 않습니다.

결코 허물지 않습니다.

그러나 절망하지 마십시다.

더불어 셋이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은 각 셋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주목할 단어를 끄집어냅니다.

그 날에

그렇습니다.

담을 허무는 것은 애굽도 아니요앗수르도 아니요이스라엘은 더 더욱 아닙니다.

야웨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 날이 되면 이들이 갖고 있는 선민의식을 하나님이 깨뜨리십니다.

그날은 어떤 의미로 보면 이미 왔고또 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분명히 이런 은혜에 도달합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더불어 셋이 하나 되고 한 꿈을 향하여 달려가는 그 감동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은혜입니다.

재 강조합니다.

더불어 셋이 하나가 되어 복이 되는 그날은 인간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정치적으로의학적으로사회학적으로자연과학적으로 또 다른 인간의 스킬로 인간이 세운 담은 결코 허물어지지 않습니다.

코로나 19로 진행되었고진행된 펜데믹의 고난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만군의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더불어 셋이 하나 되는 그날을 계획하고 계심을 명심하고 하나님의 방법이 말씀으로의 회귀만이 지금의 양극점을 향해 달려가는 고난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임을 명심하고 더 겸손한 2021년을 살아내야 할 것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 기록된 너무 유명한 말씀을 소개하고 설교를 마무리하겠습니다.

마태복음 4:3-4절을 읽습니다.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너무 잘 아는 이 구절을 저는 이렇게 해석해 보려합니다.

사탄은 떡을 돌로 만들라고 했지만주님은 말씀을 떡으로 만드셨다.”

우리는 떡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상상해 봅니다.

말씀을 떡으로 만드시려고 했던 주님의 권면대로 살 수만 있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인간 공동체거 얼마나 아름다운 에덴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말입니다.

더불어 셋이 하나 되는 것은 말씀이 떡이 되는 그 날일 것입니다.

오늘의 위기를 세속적 관점으로만 해결하려는 안타까움이 제게는 유감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2021우리 모두 더불어 셋이 하나 되는 날을 그립시다.

소망하십니다.

그 날이 바로 영적 펜데믹에서 빠져 나오는 날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우리오늘 눈물로 한 알의 씨앗을 심는다/꿈꿀 수 없어 무너진 가슴에

저들의 푸른 꿈 다시 돋아나도록 우리함께땀 흘려 소망의 길을 만든다

내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했던저들 노래하며 달려갈 그 길

그날에 우리 보리라 새벽이슬 같은 저들 일어나뜨거운 가슴사랑의 손으로

이 땅 치유하며 행진할 때오래 황폐하였던 이 땅/어디서나 순결한 꽃들

피어나고 푸른 의의 나무가 가득한/세상 우리 함께 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