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여호수아 24:29-31
본문: 끝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서론)
도쿄에 있는 마츠바라 얼번 크리닉에서 호스피스 전문의로 일하고 있는 오츠 슈이츠가 쓴 사람이 ‘죽을 때 후회하는 25가지’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중에 25번째로 저자가 다룬 후회는 ‘신의 가르침을 알았더라면’이라는 후회라고 적시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자가 말한 신이라는 개념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만을 염두 해 둔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사람이 죽을 때 갖게 되는 불안감과 두려움은 전적으로 영적인 것이기에 죽어가는 자들을 돌보는 호스피스 전문의로서 임상의 결과, 인간이 후회하는 가장 마지막의 후회가 ‘신의 가르침’에 민감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후회라는 말은 목사로 사역하는 제게는 큰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저자는 이런 이유로 책의 가장 마지막 에필로그의 문장을 이렇게 쓰며 끝냅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아무쪼록 잊지 않기를 바란다.” (오츠 슈이치, “죽을 때 후회하는 25가지”, 21세기북스, 221)
제 독서 비망록에 이 글을 2010, 2,5.에 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무려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50이라는 지천명의 나이에 이 글을 읽었는데 이제 제 나이는 이순을 넘어서고 시점에 이 글을 다시 한 번 설교를 위해 복기했습니다.
과정 속에서 자문을 하나 던져보았습니다.
나는 영적인 존재인가를 질문하며 살았는가?
그리고 스스로 자답하면서 이렇게 나름 입장을 정리했습니다.
내가 영적인 존재로 살아가는 존재라면 적어도 두 가지 면에서 증거들이 있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① 내 스스로가 영혼이 사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사는 것
② 나 때문에 적어도 선한 영향을 받고 영적으로 살아가는 자가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한 달 전에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에서 만난 제자들이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목사안수를 앞둔 제자들이 있었는데 안수 전, 선생에게 나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고 싶어 방문한 것입니다.
자리에서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목사 안수를 받는 것은 정말로 축하할 일이지만 여러분에게는 축하한다는 말을 하기가 쉽지 않다고. 작금에 목사로 살아간다는 것은 아마도 가장 힘들고 어려운 길이기 축하보다는 다른 것을 하나 전하겠다고 전제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 잘 믿는 목사님들 되기를 바랍니다.”
안수 받은 제자 한 명이 SNS를 통해 이런 인사를 전해 왔습니다.
“목사님, 예수 잘 믿는 목사가 되겠습니다.”
교제하며 기뻤습니다.
적어도 누군가에게 생각할 수 있는 나눔을 주었다는 기쁨이 그날 제게 임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본론)
본문은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110세가 되어 열조에게로 돌아간 것을 알려주는 역사적 보고입니다.
여호수아는 그의 영적인 고향인 세겜에서 성회를 개최합니다.
이 성회는 말 그대로 너무 상투적인 슬로건 같지만 진짜로 당시의 상황을 전제할 때 심령 부흥성회와 같은 집회였습니다.
불완전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후 12지파에게 땅 분배를 마친 여호수아는 12지파를 세겜으로 불러 모아 가장 강력하게 영적 재무장을 독려하는 집회를 연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을 했습니까?
여호수아는 알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수아가 죽은 뒤에 가나안에서 타락할 것을 말입니다.
이런 긴박성을 알고 있었던 여호수아는 본인이 죽기 전에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로 하여금 영적인 재 갱신과 심령들의 재 부흥을 도모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세겜으로 이스라엘 지파들을 몰수이 모으고 아브라함 시대를 위시한 족장들 즉 선조들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신앙공동체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기에 나섭니다.
이윽고 애굽에서의 치욕적인 노예 상태를 상기시키면서 모세와 본인을 도구 삼아 출애굽하게 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을 회상합니다.
그리고 가나안에 들어오기까지 있었던 우여곡절의 역사를 되돌려보며 아모리, 모압 그리고 가나안의 일곱 족속들과 치열했던 싸움 끝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정복하고 분배했던 시나리오들이 성취되었음을 복기하기에 이릅니다.
이런 지난했던 영적 전투 끝에 승리했던 여호수아는 본인이 죽은 뒤에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영적으로 무너질 이스라엘 공동체의 운명을 바라보며 그 유명한 고별 설교와도 같은 담대한 선언을 행하게 됩니다.
여호수아 24:14-15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이렇게 단호한 메시지를 던진 여호수아 앞에서 이스라엘 공동체는 다음과 같이 결의하며 반응을 보입니다.
이어지는 여호수아 24:16-17절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니 이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우리와 우리 조상들을 인도하여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올라오게 하시고 우리 목전에서 그 큰 이적들을 행하시고 우리가 행한 모든 길과 우리가 지나온 모든 백성들 중에서 우리를 보호하셨음이며 여호와께서 또 모든 백성들과 이 땅에 거주하던 아모리 족속을 우리 앞에서 쫓아내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이다 하니라”
물론 이 폼 나는 고백을 했던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의 예고대로 가나안에서 하나님을 떠납니다.
여호수아의 염려가 현실이 된 셈입니다.
자, 이 즈음에서 교통정리를 하려 합니다.
오늘 송년주일을 맞이하여 제가 교우들에게 드리고 싶은 메시지는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선택이 아닙니다.
집중하고 싶은 것은 여호수아의 삶입니다.
그는 세겜 사역을 끝으로 열조에게로 돌아갑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29절입니다.
“이 일 후에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백십 세에 죽으매”
이 일은 세겜 사역 후입니다.
여호수아는 자기가 해야 할 사명을 다 마쳤습니다.
그리고 110세에 하나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품에 안기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30-31절을 다 같이 주목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들이 그를 그의 기업의 경내 딤낫 세라에 장사하였으니 딤낫 세라는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 산 북쪽이었더라 이스라엘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아는 자들이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더라”
적어도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는 적어도 이런 예의를 여호수아에게 보였습니다.
여호수아에게 기업으로 분배된 유일한 땅인 딤낫 세라를 그에게 돌려주기 위해 그를 그곳에 장사지냈다는 예의가 첫 번째이고, 두 번째는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정복을 위해 같이 분투했던 장로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여호수아가 당부했던 하나님 신앙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신명기 역사가는 보고합니다.
우리는 오늘 이 본문 이해를 중심으로 두 가지의 은혜를 송년 주일 설교의 교훈으로 삼아 보려고 합니다.
1. 우리의 끝이 영적 해피엔딩이려면 성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떤 의미로 보면 여호수아의 삶은 파란만장한 삶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호수아 1:1절을 읽어 보십시다.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여호수아를 쓴 신명기 역사가는 여호수아는 소개하는 첫 장에서 이렇게 소개합니다.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
여호수아에게 붙어 있었던 레테르는 ‘모세의 수종자’였습니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여호수아 1장을 보면 여호수아의 영적 상태를 가늠하게 하는 대목이 눈에 띕니다.
여호수아 1:6,7,9에 연이어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담대하라”입니다.
충분히 이해가 되는 대목입니다.
모세의 종이었던 여호수아가 주인이 죽자 느꼈을 두려움과 부담감과 심리적 무거움이 얼마나 컸으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무려 세 번에 걸쳐 여호수아에게 당부하신 말씀이 ‘담대하라’였겠습니까?
하나님의 격려를 받은 여호수아가 곧바로 일어나 백성들에게 선포한 것을 여호수아 1:10-11절이 증언합니다.
“이에 여호수아가 그 백성의 관리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진중에 두루 다니며 그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양식을 준비하라 사흘 안에 너희가 이 요단을 건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사 차지하게 하시는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들어갈 것임이니라 하라”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격려에 힘입어 드디어 사역을 시작합니다.
가나안을 향한 진군의 발걸음을 띱니다.
그렇게 시작된 여호수아의 사역은 파란만장한 삶이었습니다.
가나안의 관문인 여리고 정복을 이루었지만, 곧바로 아이 성의 쓰라린 패배도 맛보았습니다.
이후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승장구한 뒤에 가나안 땅을 12지파에게 분배하는 사역까지 그는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모세의 뒤를 이어 나름의 승리를 거둔 자로 역사는 그를 평가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그의 유언과도 같은 메시지가 여호수아서의 대미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특히 주목할 한 단어에 눈을 크게 뜨십시다.
본문 29절입니다.
“이 일 후에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백십 세에 죽으매”
무엇이 보입니까?
‘여호와의 종 여호수아’
그렇습니다.
여호수아는 그의 시작은 사람을 따르는 자로 시작했지만 그의 삶의 마지막은 하나님을 따르는 자로 해피엔딩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해도 괜찮은 영적 시사점입니다.
여호수아는 어떻게 이런 영적 해피엔딩의 주인공이 되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하고자 한다면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로 답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게 이 질문에 답을 하라고 한다면 말할 것도 없이 저는 여호수아의 성실성을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호수아는 철저히 모세의 명령대로 순종했습니다.
그가 모세의 종으로 살았던 세월은 40년이었습니다.
김기석 목사가 쓴 ‘길은 사람에게로 향한다.’에 나오는 글입니다.
“언젠가부터 수졸(守拙)이라는 말을 참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졸(拙)한 것은 교묘한 것의 반대이니 수졸이란 조촐함을 지키는 것이겠지요. 세상에는 참 영악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때그때 입장을 바꾸고 이익에 따라 남에게 해를 입히고 속이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 말입니다. 졸함을 지킨다는 것은 부끄러움을 간직한다는 것입니다. 남은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차마 자기를 속일 수는 없어서 불이익을 감수하는 마음, 그게 졸의 길입니다. 저는 그 길을 가고 싶습니다.” (김기석, “길은 사람에게로 향한다.”, 청림출판, 116.)
이 글을 9년 전에 읽었습니다.
너무 깊이 간직했기에 제 책에도 이 글을 인용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성실한 사람들입니다.
결코 얍삽한 자들이 아닙니다.
결코 영악한 자들이 아닙니다.
수졸하는 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여호수아는 40년 동안 모세에게 충성한 수졸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성실함을 하나님이 보셨고, 하나님은 그를 쓰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말년 평생 따라다니던 ‘모세의 종’이라는 레테르를 떼 주시고 이렇게 새로운 이름을 붙여 주셨습니다.
‘여호와의 종 여호수아’
나는 우리 세인 교회의 지체들의 삶의 끝자리가 해피엔딩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려면 끝까지 성실해야 합니다.
2020년을 마감하는 오늘 주일, 이 결단이 있는 교우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 끝까지 영적인 선한 영향력을 남기는 삶이어야 합니다.
본문 31절을 다시 한 번 복기하십시다.
“이스라엘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아는 자들이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더라”
이 구절을 읽으면서 거룩한 오기가 생겼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수아가 죽은 뒤에 가나안의 안락함에 길들여져 하나님께 등을 돌리며 타락한 공동체가 됩니다.
해서 여호수아가 죽은 뒤에 이스라엘의 흑암기라고 하는 사사시대가 도래합니다.
아주 세밀하게 평가한다면 여호수아의 영적 영향력이 그가 죽은 뒤에도 이어졌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소원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너무 과한 욕심인가 봅니다.
아니 과한 욕심입니다.
그건 여호수아의 책임이 아닙니다.
전적인 후대 사람들의 책임입니다.
그런데 소스라치게 하는 대목이 오늘 본문에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 이스라엘은 하나님 신앙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신명기 역사가는 보고합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여호수아 사후에도 생존해 있었던 장로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겼다고 보고합니다.
누구의 영향력입니까?
여호수아의 영향력입니다.
몇 해 전, 베트남에 갔을 때 가이드가 호치민의 생가로 인도했습니다.
생가에 도착한 저희 일행은 가이드를 통해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베트남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바로 공산당 서기장을 지낸 호치민이라는 설명을 말입니다.
지금 베트남 공산당을 이끌고 있는 집단 수뇌부에 있는 지도자들은 부패한 자들이라고 치부한다는 이야기도 가이드는 곁들였습니다.
왜?
호치민의 청렴성 때문입니다.
그가 베트남을 공산 혁명으로 통일한 뒤에 서기장을 있는 동안, 얼마나 청렴하고 깨끗하게 살았는지 지금도 베트남 사람들에게는 신과 같은 존재라는 설명을 들으며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한 사람을 뺀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들과 비교가 되어서.
언젠가 호치민에 대한 베트남 국민들의 이런 생각들을 글에 옮긴 적이 있었습니다.
언젠가 호치민에 대한 베트남 사람들의 생각을 글로 남긴 적이 있었는데, 제 글을 본 선배가 아주 격노하여 제게 충고하는 댓글을 보냈습니다.
“이 목사, 호치민은 빨갱이야!, 공산주의자란 말이야. 이렇게 호치민을 옹호하는 글을 쓰면 이목사도 빨갱이가 되는 걸 왜 몰라.”
선배의 글을 읽고 울고 싶었습니다.
제가 말하고자 한 것은 누군가에게 적지 않은 영향력을 끼친 자의 삶의 내용이 어떠했는가를 나누고자 했는데 이것마저도 색깔 논쟁을 몰고 가는 선배를 보면서 가슴이 참 답답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교우들에게 전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인 저와 여러분이 빨갱이라고 공격하는 호치민보다 타인에게 더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존재로 살고 있습니까?
지금 나는 2020년을 살면서 어떤 존재감이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습니까?
설교의 서두에 인용한 오츠 슈이치의 말대로 여러분은 여러분이 영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살고 있습니까?
영적 존재인 우리는 그 만한 영적 선한 영향력을 타인에게 미치고 있는 삶을 지금 살고 있습니까?
여호수아는 살아서는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지 않도록 만드는 지렛대 역할을 한 영적 영향력의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 죽은 후에도 그와 함께 신앙의 연대를 도모했던 장로들을 영적으로 붙들어준 영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끝까지 아름다웠던 사람이었단 말입니다.아브라함 조수아 헤셀의 말을 빌린다면 여호수아는 ‘복사본의 삶을 살다가 인생의 끝자락 에서는 원본의 삶을 산’ 끝이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2020년의 끝자락 주일입니다.
파란만장했고, 다사다난했던 2020년이 역사의 뒤안길로 또 어김없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한 해를 보냈지만, 우리 세인 지체들은 이 해의 끝이 더 아름답기를 소망합니다.
시작과 중간은 버겁고 힘들었어도 끝은 아름답기를 바랍니다.
여호수아의 끝이 시작보다 더 아름다웠던 것처럼.
여호수아와 같은 선한 영적 삶을 살았던 바울이 유언을 이렇게 남긴 메시지가 2020년 송년주일에 더 크게 다가오는 것은 왜일까요?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디모데후서 4:7-8)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나 지금은 비록 땅을 벗하며 살지라도
내 영혼 저 하늘을 디디며 사네
내 주님 계신 눈물 없는 곳
저 하늘에 숨겨둔 내 소망 있네
보고픈 얼굴들 그리운 이름들 나 많이 생각나
때론 가슴 터지도록 기다려지는걸.
내 아버지 널은 품 날 맞으시는 저 하늘에 쌓아둔 내 소망 있네
주님 그 나라에 이를 때까지 순례의 걸음 멈추지 않으며
어떤 시련이 와도 나 두렵지 않네 주와 함께 걷는 이 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