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1월 15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후서 서른두 번 째 강해) 제목: 꿈만은 포기하지 마십시다. 본문: 고린도후서 8:13-15 서론) 오늘은 2020년 추수감사주일입니다. 혹시 이 중에, 금년 추수감사주일에는 도무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제목이 없다고 항변하고 있는 교우들이 있습니까? 감사는 고사하고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게 기적이라고 하나님께 따지고 싶은 교우들이 혹시 있습니까? 감정적인 골로 표현하자면 이해되는 면이 있음을 저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깊은 은혜의 장으로 들어오면 이전에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감사의 내용이 다가옴을 느낍니다. 어떤 감사의 내용입니까? 지금 여기에 내가 있음이라는 이론으로 형용할 수 없는 감사입니다. 지난 금요일, 황홍일 집사와 직접 통화를 했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이런 소리가 들렸습니다. “목사님, 황홍일입니다. 저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사람인데 저를 위해 이렇게 끊임없이 기도해 주신 그 은혜를 어떻게 감사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 너무 감사합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황 집사님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순간 울음보가 터졌습니다. 불과 한 달 여 전만 해도 생사의 기로에서 위급한 시기를 보냈던 황 집사께서 들려주는 목소리가 건강했을 때의 목소리의 약 80%까지 들렸기에 얼마나 감사했던지 그 동안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목소리를 듣고 황 집사께 이렇게 격려했습니다. “집사님, 집사님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는 것만도 제게는 벅찬 감사입니다. 살아주어서, 목소리를 들려주어서 고맙고 감사합니다.” 지금 당신과 얼굴을 마주보며 세인 교회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최고의 감사 내용입니다. 나는 이런 소박한 기적이 우리들에게 지속적으로 나타날 것을 기대하며 미리 감사의 노래를 하나님께 올립니다. 오늘 1년 중에 가장 큰 감사의 절기를 맞이했습니다. 저는 오늘 교우들과 감사하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찾는 설교가 아니라 감사의 내용은 찾아내야 하는 것임을 확인하는 설교에 초점을 맞추어 보려고 합니다. 위로부터 주시는 감사와 감동과 감격이 있는 레마가 공급되는 시간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을 공동번역 성경으로 다시 한 번 읽어드리겠습니다. “내가 지금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해주면서 여러분에게만 괴로운 부담을 주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공평하게 하려는 것뿐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넉넉하게 살면서 궁핍한 사람들을 도와준다면 그들이 넉넉하게 살게 될 때에는 또한 여러분의 궁핍을 덜어줄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공평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성서에,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았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았다."고 기록된 대로입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구제 연보를 종용하면서 그들을 설득하려고 했던 내용의 화두는 공평이라는 화두였습니다. 바울이 말합니다. 고린도교회의 형제들이여! 당신들이 섬기는 교회는 이방교회 중에 넉넉한 교회입니다. 그러니 그 넉넉함을 지금 기근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고통 받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의 형제들에게 나누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 나눔은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게 되는 것이기도 한데 그것은 공평함입니다. 하나님은 공평한 사회를 만들라고 명하셨습니다. 실례로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출애굽기 16장에 나오는 만나의 기적을 보십시다. 출애굽기 16장에 나오는 신 광야에 도착했던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에게 주셨던 만나 사건을 들추어 보십시다. 신 광야에 도착한 이스라엘 공동체가 애굽에 있을 때 노예로 살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곳에 있는 고기 가마 옆에서 떡과 고기를 먹었던 때가 좋았다고 하소연하며 원망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들으셨습니다. 소위가 악하고 괘씸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날마다 만나를 내려주시지 않았습니까? 그 말씀은 출애굽기 16:18절입니다.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여기까지가 바울이 고린도교회 지체들에게 알려준 본문 텍스트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뜬금없이 출애굽기에 기록된 이 구절을 소개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공평이라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나라임을 역설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잘 아는 것처럼 광야라는 장소가 무엇을 구할 수 있는 지역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세우신 철칙이 바로 공평한 분배였습니다. 본문 15절 말씀 그대로입니다. “기록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렇습니다.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는 상태 말입니다. 무슨 상태입니까? 공평한 상태입니다. 마태복음 20장에 기록된 포도원 농부들에게 준 주인의 품삯 비유를 잘 아시지요? 너무 잘 알고 있는 비유이기에 설명은 생략하고 교훈만 나누어보기로 합니다. 농부들의 관심이 무엇이었습니까? 일한 시간에 따라 수당 즉 품삯의 차별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오전 9시, 정오, 오후 3시에 온 자들이 오후 5시에 온 자들과 똑같은 1데나리온을 품삯으로 받는 것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해서 주인에게 항의한 것입니다. 그러나 농장 주인의 관심은 전혀 달랐습니다. 품삯의 공평함이었습니다. 모두에게 약속한 1데나리온 말입니다. 자본주의의 전형은 차별적 균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전형은 차별 없는 공평한 균등을 실천하는 나라입니다. 우리들의 선입관에는 정규직이 비정규직보다 임금이 더 많은 것은 자본주의적인 정당성이라고 생각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학교를 다니면서 조금 더 열심히 공부한 사람이 좋은 직장, 좋은 임금을 받는 것은 마땅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정규직의 사람들이 조금 더 사랑하고 양보하여 비정규직에 있는 사람들을 보듬어 보폭을 맞추어 걸어가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나라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에서 4주 연속 새벽 릴레이 기도회가 진행 중에 있습니다. 50개의 기도제목을 하나님께 올리고 있습니다. 그 중 4번째 큰 기도제목이 한국교회를 위한 기도인데 하부 항목 9번째의 기도제목이 이렇습니다. “한국 교회가 메가 처치(대형교회)의 환상에서 벗어나 지역 사회에 함께 하는 건강한 작은 교회(메타처치) 운동이 불일 듯 일어나게 하옵소서.”입니다. 우리가 착각하는 것 중에 하나, 대형교회의 목사들이나, 조직 교회 목사들이 경제적으로 안정된 교회를 담임하는 것은 능력 때문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정말로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강덕 목사가 세인교회라는 조직교회의 담임목사가 된 것은 실력이 출중하여 조직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조직교회의 목사나 대형교회의 목사는 섬기는 교회를 큰 교회로 만들어 더 양적으로 비대해지고 그로 인하여 자연적으로 임하는 경제적인 부에 대하여 마음껏 누리라고 그 자리를 주신 것이 아니라 아직도 힘들어 하는 작은 교회를 섬기며 함께 공생하는 길을 가도록 섬기라고 이 자리에 있게 하신 것입니다. 예상하기는 코로나 19 이후의 한국교회에 엄청난 지각 변동이 있을 것입니다. 아니 정말로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메가 처치라는 늙어버린 공룡 같은 교회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소규모의 교회(메타 처치)들을 더 많이 세워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이루어가는 공동체로 변해야 살아남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려면 교회의 사역의 일체가 공평해져야 합니다.본문에 두 번에 걸쳐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우리가 보는 개역개정판에는 ‘균등’이라고 점잖게 번역해 놓았지만, 앞에서 본 공동번역에서는 조금 더 공격적인 단어인 ‘공평’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 단어는 헬라어 단어 ‘이소테스’의 번역입니다.‘이소테스’를 에스라 성경대학교 대학원의 조석민 교수는 이렇게 주석했습니다.“개역개정에서 ‘균등’으로 번역된 헬라어 ‘이소테스’는 ‘동일한 상태’, ‘균형 유지’, ‘공정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조석민, “이해와 설교를 위한 고린도후서 주석”, 이레서원,p,193.) 제가 조 교수의 주석에 주목한 이유는 세 번째 주해 용어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소테스’는 ‘공정하게 하는 것’입니다. 천박한 자본주의의 체계 하에서는 공정한 일이 담보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고 다시 오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이상한 일에 대항해야 합니다. 어떻게? 혁명으로 대항해야 합니까? 그건 유물론적 공산주의에서나 행하는 짓입니다. 공정하지 않은 것들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싸워야 하는 것은 공정하게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차준희 교수가 얼마전 제게 숙제 하나를 주었습니다. 저와 함께 2018년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에서 실시한 미래 목회 컨퍼런스에서 공동 강사로 섬겼던 이도영목사가 쓴 ‘코로나 19 이후 시대와 한국교회의 과제’ (새물결 플러스 간)라는 책이 출간되었는데 그 책을 읽고 나서 은혜(?)를 받아 제게 그 책에 대한 제 소회를 듣고 싶으니 서평을 써서 보내달라는 숙제였습니다. 해서 전적으로 친구를 위해 책을 구입해서 지난 주간 책을 읽고 난 뒤 북-리뷰를 친구에게 보내주었습니다. 책을 읽다가 이 친구가 왜 나에게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써달라고 했을까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친구가 소개한 책은 우향우가 되어 있는 수구적인 근본주의자들이 읽으면 빨갱이가 쓴 글이라고 분명히 벌떼처럼 공격하고 달려들 것이 분명하니까 그래도 나름 중심을 잡으려는 친구가 저라고 생각해서 서평을 부탁한 것입니다. 친구의 의도를 알고 있는 저이기에 글을 읽고 난 뒤에 솔직한 소회를 친구에게 보냈습니다. 제가 친구에게 보낸 서평의 한 부분을 소개합니다.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에 나타난 교회의 대명제는 ‘보편적 교회’(Catholic Church)다. 보편적 교회라는 말은 곧 ‘공교회’ 라는 의미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공교회로의 걸어감은 ‘누군가’의 교회가 아니라 ‘누구나’의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라는 교회론의 적절한 정의를 교훈하고 있는 명제이다. 그렇다면 분명한 것은 교회가 ‘누군가’를 위한 교회로 치우칠 때, 이미 그 공동체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동력을 상실한 것인지도 모른다. 코비드 19라는 전무했던 괴물의 공격에 노출된 한국교회는 너무나도 유감스럽게 이상한 정치적 집단으로의 변색이라는 자가당착에 빠지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범했다. 수구적 기득권을 갖고 있는 정치집단에 천착하여 기생하려는 근본주의적인 개신교의 비성서적, 비신학적 행태는 약한 자, 병든 자. 억눌린 자, 가난한 자 등과 함께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는 전혀 관계없는 힘 있는 자들의 편에 서서 편승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아쉽고 아프다. 이 참담한 수구적인 교회주의자들을 지적하기 위해 꺼낸 든 저자의 방점이 여럿 있지만 안식일 개념 해석은 대단히 고무적인 실례라고 평가된다. “안식일은 탐욕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지나친 노동 착취를 근절하는 사회적 제도다.” (p,75) 저자의 성찰은 적절한 안식일 신학을 기초로 한 대단히 명쾌한 해제다. 분명히 저자가 이렇게 갈파한 것은 안식은 누군가 특정한 인물을 위한 특혜의 산물이 아니라 노예나 주인이나, 가진 자나 못 가진 자나, 높은 자나 낮은 자나, 여자나 남자나 전혀 개의치 않고 모두의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게 하는 것임에 동의했기 때문이리라. 저자는 이 모두에게 주어진 안식이 불평등하게 임하게 된 기저에는 인간의 탐욕이 똬리를 틀고 있다고 보았다. 필자는 오래 전, 아브라함 죠수아 헤셀이 ‘안식일’에 대하여 진단한 글을 읽다가 밑줄 그었던 적이 있었다. “안식일은 갈가리 찢겨진 삶을 수선하고,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집중하는 날이다. 존엄성을 상실한 노동은 불행의 원인이고, 정신이 없는 휴식은 타락의 원천이다.” (아브라함 죠수아 헤셀, “안식”, 복 있는 사람, p,65.) 시대의 진보적 구약학자라고 평가 받는 월터 브루그만도 말한다. “안식일은 단순한 멈춤이 아니다. 안식일은 강요와 경쟁에서 벗어나 서로를 긍휼히 여기는 연대성에 비추어 사회의 모든 삶을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다. 이러한 연대는 사람들이 좨쳐대는 탐욕이 부서져야 비로소 생각할 수 있고, 실행할 수 있다.” (월터 브루그만, “안식일은 저항이다.”,복 있는 사람,p,95.) 캐나다의 영성신학교 유명한 리젠트 칼리지의 미르바 던 교수의 갈파에 전율한 적이 있다. “안식일 지키기는 세상을 변화시킨다. 안식일 지키기는 우리를-칠 일마다 개인적인 ‘종교’ 영역으로 물러난 별난 사람들로서-세상과 분리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안식일 지키기는 우리를 세상과 그 필요 속으로 더 깊이 밀어 넣는다. 왜냐하면 안식일 지키기는 우리를 하나님의 가슴과 목적으로 더 깊이 이끌기 때문이다.” (미르바 던, “안식”, IVP,p,173.) 종교적 탐욕, 기득권적인 탐욕, 사회적인 탐욕 등등 일체의 탐욕을 제어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안식일의 회복이라는 학자들의 교훈이 중요하게 다가오는 것은 교회가 코로나 19 이후에 반드시 새겨 실천해야 하는 공동의 선이자,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에 살고 있는 백성들의 행동강령이었기 때문이다. 코로나 19의 공격은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가 아니라 인간이 자행해온 탐욕의 결과로 빚어진 자충수였음을 정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아마도 저자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안식의 규례를 있는 자의 편에 섰기에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이런 교회의 일탈로 보았고, 이것으로 인해 일어난 역기능적인 결과물을 되돌리기 위해 제시한 교회가 할 수 있는 뉴딜을 공교회성, 공동체성, 그리고 공공성의 회복이라고 보았다. 그 사역 실천에 최선을 다하려고 하는 고군분투의 길을 걷고 있음에 저자에게 필자 역시 박수를 보내고 싶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보려고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공동체의 지체들에게 강력하게 권한 구제 연보의 동참은 단순히 물질을 보태라는 형이하학적인 권고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에게 종용한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공평하게 하심이라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하라는 사자후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꿈꾸어야 하는 플랜이 있습니다. 2020년 추수감사주일에 우리 세인 공동체가 함께 꿈꾸어야 하는 비전이 있습니다.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되는 목표가 있습니다. ※ 공평한 공동체 만들기로의 걸음입니다. 교회가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꿈이 있습니다. 돈이 없어 자녀들과 함께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이가 다시는 없는 공동체로 이 나라가 설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입니다. 적어도 생명수당이라는 이름하에 오토바이 한 대에 목숨을 걸고 살다가 인생을 마감해야 하는 이 땅의 젊은이들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도록 그들을 품고 돌보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결혼을 해서 살 수 있는 집하나 장만할 수 있는 소망을 송두리째 앗아가 버린 이 땅에 만연한 부익부빈익빈이 구조를 이기도록 교회는 젊은이들에게 소망을 주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신발의 깔창으로 생리하는 것을 막기 위해 생리대로 써야 하는 정말로 끔찍한 이 땅의 소녀들이 사라지도록 교회는 함께 연대해야 합니다. 다가오는 이 겨울, 돈을 아끼기 위해 하루 세 번 피워야 하는 연탄보일러에 들어가는 연탄을 한 번으로 줄이며 추위와 외롭게 싸우며 살아가는 이 땅의 홀로된 노인들을 섬기는 공동체가 교회이어야 합니다. 열거하려면 지면을 채우기도 부족한 불공평한 구조로 인해 쓰러져 가는 우리들의 이웃들을 위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바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제 1 이샤야가 노래했습니다. 이사야 11:6-9절입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 나라를 앞당기는 철저한 선한 도구가 교회이어야 합니다. 우리 세인교회이기에 말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설교를 맺을까 합니다. 이성복 시인이 쓴 시어 중에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이성복,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학과 지성사,p,63.) 시인의 기막힌 성찰입니다. 오늘은 2020년 추수감사주일입니다. 혹시 오늘 내가 사는 이 땅이 시인이 말하고 있는 무통의 시대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그러다가 더 큰 두려움이 제게 임했습니까? 혹시 그 무통의 무감각이라는 영적 나병에 걸린 자가 바로 나인가! 하는 섬뜩한 깨달음 때문에 말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무통의 시대인 것은 분명하지만 저와 여러분은 꿈만을 포기하지 마십시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꿈만은. 다시 강조합니다. 공평한 공동체 만들기의 꿈 말입니다. 교회가 이 꿈마저도 포기한다면 그건 정말로 끔찍한 재앙이요, 절망의 끝이 됩니다. 글 하나 읽어드리고 기도하겠습니다. “담장이 높은 농가 앞마당에 거위들이 모여 살고 있었습니다. 맛있는 옥수수가 널려 있었고, 앞마당은 안전해서 거위들은 행복했습니다. 어느 날 철학자 거위가 그들에게 와서 담장 너머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담장 밖에는 아주 멋진 세상이 있습니다. 그곳엔 사막의 황무지와 푸른 골짜기와 나무 우거진 산도 있는데, 우리는 농가 마당에만 갇혀 있지요. 그것은 우리가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지 않고 진흙 웅덩이에만 만족했기 때문입니다.’ 거위들은 멋진 강의에 감동했고, 철학자는 거위도 날개가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습니다. ‘날개가 날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무엇을 위한 것이겠습니까?’ 거위들은 철학자 거위 한 마디 한 마디에 열중했습니다. 그들은 몇 달 동안 철학자 거위의 말을 분석하고 감동하면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거위들은 마침내 하늘을 나는 것이 갖는 영적 의미에 대한 멋진 논문을 작성했습니다. 이게 그들이 했던 전부였습니다. 그들은 제일 중요한 한 가지를 하지 않았습니다. 즉 날지 않은 것입니다. 옥수수는 맛있고, 앞마당은 안전했기 때문입니다.” (이정일, “시와 소설과 그리스도인”, 예책, pp,65-66) 덴마크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키르케고르 작품을 인용한 이정일 교수의 글말을 읽다가 나는 우리 교회가 유유자적이나 하고 논문이나 쓰면서 주어진 풍요에 만족하며 하나님의 나라까지 가는 유람선이 아니기를 간절히 소망했습니다. 나는 우리 세인교회가 앞마당을 박차게 치고 나가 날갯짓하면서 나는 거위를 상상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동체를 만들어 가기 위해 꿈을 갖고 날아가는 군함과 같은 교회이기를 간절히 기대합니다. 이 꿈을 이루어가도록 세인 교회를 나에게 허락하신 것은 2020년 최고의 감사 조건입니다. 이 꿈만은 포기하지 마십시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저 죽어가는 내 형제에게 생명을 주소서 흑암의 권세에 매여 내일을 빼앗긴 저들에게 저 소망 없는 텅 빈 가슴에 새날을 주소서 고통의 멍에에 매여 신음하고 있는 저들에게 아버지여 이 백성 다시 살게 하소서 묶였던 자 자유케 되는 영광의 날을 주소서 아버지여 이 나라 주의 것 되게 하소서 영원하신 하늘 아버지 다시 섬기게 하소서 메마른 뼈들에 생기를 부어주소서 아버지의 긍휼 주의 군대로 서게 하소서 성령의 바람 이제 불어와 아버지여 이 백성 다시 살게 하소서 묶였던 자 자유케 되는 영광의 날을 주소서 아버지여 이 나라 주의 것 되게 하소서 영원하신 하늘 아버지 다시 섬기게 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