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마음이 있습니까?
본문: 고린도후서 8:6-12 서론) 신경정신과 전문의인 정혜신씨가 쓴 ‘당신이 옳다’를 작년 초에 숙독했습니다. 저 역시 목회상담학을 전공한 터라 그녀의 글에 담겨 있는 한 챕터, 챕터의 문장들을 의미 있게 읽었습니다. 그녀가 기록한 한 문장을 소개하겠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힘, 상처 입은 마음을 치유하는 힘 중에 가장 강력하고 실용적인 힘이 공감이다. 가장 빠르고 정확하고 효율적이다. 공감은 수십 년 간 천문학적인 연구비를 투입하여 최첨단 의학, 뇌 과학, 생리학, 유전학, 생물학 등의 연구 방법론을 통해 개발된 어떤 항 우울제보다 탁월하다. 동시에 그런 약물과는 다르게 부작용이 전혀 없다. 압도적인 효과가 있는데 부작용도 없으니 비교가 무의미하다.” (p,116) 너무 상투적인 멘트일지는 모르겠지만 저 역시 작가의 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공감'(共感)이라는 단어를 영어 단어로 말할 때 ‘empathy’라고 합니다. 이와 비슷한 단어가 ‘sympathy'라는 동정, 혹은 연민이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단어 'sympathy' 즉 ‘동정, 연민’을 ‘공감’ 즉 ‘empathy’ 에 비교하는 것은 대단히 부적절한 비교라고 생각하고 경계를 하는 편입니다. 왜냐하면 전자(sympathy)는 후자(empathy)에 비해 타자에 대하여 인격적인 평형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연민 혹은 동정’은 언제나 교육자가 피교육자를 다루는 듯한 상하 혹은 수직 그렇지 않으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관계라는 모드를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공감은 이런 관계를 극복하고 너와 나의 균형적인 평형을 이루는 것을 전제합니다. 조금 쉽게 설명하겠습니다. ‘동정’은 나의 마음이 상대방의 마음과 같은 생각을 같지 않아도 얼마든지 가능한 심리적 행위이지만, ‘공감’은 나의 마음이 너의 마음과 같아야만 일어나는 정서적인 일치의 행위라는 말입니다. 언젠가 이런 영어단어 문장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I want to connect with your heart. 직역하면 네 심장과 이어지고 싶다는 말입니다. 저는 이것이 공감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헌데 영어 단어 ‘heart'는 심장이라는 단어지만 아주 가끔은 ’마음‘으로도 번역되곤 합니다.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는 것이 공감입니다. 오늘 왜 담임목사가 설교의 서두에 왜 공감이라는 단어에 집착하고 있습니까? 이제부터 나눌 오늘 본문의 주제 역시 공감 즉 마음에서 일어나는 자발적인 행위가 없이는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제 오늘 우리들에게 주어진 본문 이해에 도전하겠습니다. 본론) 우리는 지난 주일에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에게 예루살렘 교회 형제들이 당한 기근으로 인해 심각한 경제적 고통을 함께 나누기 위해 구제 연보하기를 종용했음을 나누었습니다. 그 심리적 압박의 실례로 가난했던 마케도냐 지역에 있는 가난한 교회들이 도리어 넘치는 연보를 거두어주었다는 보고도 나누었습니다. 동시에 마케도냐 교회 형제들의 연보는 자원함이라는 은혜로 진행되었음도 살폈습니다. 이런 일을 전제한 바울은 본문 6절에서 디도에게 고린도교회의 형제들에게도 거룩한 부담을 갖고 구제 연보 드림이라는 은혜에 동참할 것을 종용하라고 지시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디도를 권하여 그가 이미 너희 가운데서 시작하였은즉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하게 하라 하였노라” 그렇습니다. 구제 연보는 은혜 받은 자가 마땅히 행하여 하는 의무임을 역설한 셈입니다. 동시에 바울은 이것을 전제하여 본문 7절에서 고린도교회 공동체가 부유한 교회로서, 동시에 아가야 지역의 맹주 교회라는 위치에 있기에 마땅히 솔선수범하는 신앙적인 본을 보여 연보 에 동참할 것을 거듭 강조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구제 사역을 통해 말씀과 삶이 유리되지 않음을 고린도교회 공동체가 보여주기를 강력하게 촉구합니다. 본문 7절입니다.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여기까지 강온전략을 편 바울은 8-12절 본문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하는 물질관, 혹은 경제관에 대해서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 관점을 소개합니다. 먼저 본문 8절은 바울이 갖고 있었던 중요한 목회 신학이 담겨져 있는 구절입니다. 주목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고자 함이로라” 바로 이 구절에서 우리는 성도가 가져야 할 물질 사용의 첫 요소를 발견하게 됩니다. 1) 진실한 사랑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성경 안에 있는 따뜻한 러브스토리를 말하라고 한다면 솔로몬이 술람미와의 사랑을 노래한 아가서와 더불어 보아스가 룻과의 따뜻한 사랑을 기록한 룻기입니다. 이 따뜻한 러브 스토리의 한 장면을 소개합니다. 먼저 룻기 2:8-9절을 읽겠습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그들이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이 길어 온 것을 마실지니라 하는지라” 이어지는 한 구절을 더 읽겠습니다. 2:14-16절입니다. “식사할 때에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으라 하므로 룻이 곡식 베는 자 곁에 앉으니 그가 볶은 곡식을 주매 룻이 배불리 먹고 남았더라 룻이 이삭을 주우러 일어날 때에 보아스가 자기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그에게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며 또 그를 위하여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에게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 하니라” 보아스가 룻에게 배려한 것이 보이십니까? 이삭, 길어 온 물, 떡, 볶은 곡식, 곡식다발 등등은 지금으로부터 약 3,000년 전 시대에 팔레스타인 지역을 전제할 때 오늘의 물질과 동일한 경제적 가치들입니다. 더군다나 보아스에게 있어서 나오미는 먼 친족의 사이였지만, 그의 며느리 룻이야말로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보아스가 룻에게 이런 호의를 베푼 이유는 단 한 가지,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기사를 접하면서 이성간의 호감이 가는 상대방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고 반응할 수 있습니다. 물론입니다. 저 역시 이 점을 직시하기에 룻을 설교 교훈으로 나아가기 위한 성경적 내증으로 추출한 것입니다. 이들의 사랑 이야기를 도입하면 더 강력한 설교 교훈의 insight를 교우들과 나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7:23절을 소개하겠습니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이 구절은 그 유명한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에 앞서 사분오열되어 있는 제자들과 세상 사람들이 하나 되기를 기원하신 주님의 중보기도입니다. 주께서 중보기도 사역의 절정으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 사랑 그 자체 때문이었는데, 아버지께서 그렇게 하신 것처럼 세상도 그렇게 서로 사랑하며 하나 되는 은혜를 주옵소서!” 우리는 주님의 이 기도를 통해서 대단히 중요한 은혜를 받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님을 우리에게 내놓으셨습니다. 내놓으신 정도가 아니라 그를 죽이셨습니다. 왜? 단 한 가지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 러브스토리의 절정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행위는 곧 사랑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담보로 구원의 반열에 선 망극한 사랑의 수혜자들입니다. 오늘 본문 9절이 바로 사랑의 수혜라는 구체적 사건을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를 보내신 사건으로 상징화시킨 것은 바울의 탁월한 해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습니다.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마치 가난한 자들을 위해 당신도 가난한 존재가 되었다고 표현한 바울의 역설은 너무나도 적확한 해석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랑을 받은 결정적 증인들인 우리들이 사용해야 하는 물질 사용의 전제는 진실한 사랑이 반드시 내포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즉 다시 말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헌금, 구제, 연보 행위는 동정의 행위가 아니라 공감의 행위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오늘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에게 강하게 역설한 구제 행위에 대하여 이렇게 못을 박은 것입니다. 8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고자 함이로라” 20세기 최고의 복음 전도자라고 불렸던 빌리 그레이엄의 일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회자되어 내려옵니다. “빌리 그레이엄은 이렇게 말했다. 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 보시오. 그러면 당신이 하나님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 말해 주겠소.” (로날드 사이드,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 IVP,p,163.) 그레이엄의 이 일화는 모름지기 성도라면 분명한 물질 사용의 철학이 있어야 함을 역설한 대목일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우들에게 이렇게 질문해 보겠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사용하고 있는 물질은 내가 노력해서 번 소득이니까 내가 원하는 대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 시비 걸지 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만에 하나 그렇다면 대단히 유감스럽게 당신은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물질을 취할 수 있는 권리는 주셨지만, 그 물질을 마구잡이로 사용할 수 있는 자유를 주시지 않았는데 그 물질을 남용하거나 악용하였다면 당신은 주님과 전혀 관계가 없을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읽은 고든 콘웰 신학교 총장을 역임한 데니스 홀링거 교수가 일갈한 메시지는 제 심비에 깊게 남아 있습니다. “부와 건강의 복음을 모시는 자들의 마음과 생각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을 즐기는 것에 온통 사로잡혀 있다.” (데니스 홀링거외, “탐욕의 복음을 버려라”, 새물결플러스,pp,197-198.) 기억하고 명심해야 합니다. 부와 건강이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복음이라고 믿는 자들은 그것이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는 축복의 산물이라고 고집하며 사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부와 건강은 복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나에게 주신 달란트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물질을 사용할 때 항상 그 과정 안에 진실한 사랑을 담고 있는 사용인지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오늘따라 불교계의 레전드로 기억되고 있는 승려 성철이 남긴 어록이 제 뼈를 다시 때립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은 요한일서 3:18절입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기독교의 껍데기 신앙을 발가벗긴 불교계의 큰 승려의 교회를 향해 외친 울림은 그가 떠난 지 27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현재진행형입니다.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물질을 사용함에 있어 진실한 사랑이 담겨 있습니까? 2) 마음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본문 10-12절을 읽겠습니다. “이 일에 관하여 나의 뜻을 알리노니 이 일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너희가 일 년 전에 행하기를 먼저 시작할 뿐 아니라 원하기도 하였은즉 이제는 하던 일을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완성하되 있는 대로 하라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 11절은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 지체들을 위해 모금운동을 한 연보 사역이 약 1년 정도였음을 피력하는데 사도행전의 기록을 첨부하면 약 1년 6개월 동안 이 사역이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긴 시간이 소비된 것은 당시 제반 시설이 취약했기에 마케도냐, 갈라디아, 아가야라는 넓은 지역을 순회하는 데에 있어서 교통의 열악성을 들 수 있겠지만 또 다른 이유가 바로 비협조 때문이었습니다. 마치 고린도교회와 같은 큰 교회가 바울의 사역에 색안경을 끼고 협조하기를 꺼렸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지지부진한 상황에 대하여 분명한 어조로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의 분발을 촉구하는데 그것이 바로 마음 씀이었습니다. 12절은 말합니다.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 이 구절을 유진 피터슨은 이렇게 메시지 번역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고자 하는 의사가 분명한 만큼,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일은 하고 할 수 없는 일은 하지 마십시오. 마음이 가는 곳에 손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바울이 말한 강조점은 그리스도인들의 물질 나눔은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우리는 과부의 두 렙돈에 대한 기사를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호주 맥쿼리 대학의 폴 바네트 교수는 과부의 두 렙돈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영어 단어 하나를 동원합니다. “동전 두 닢을 헌금했다고 칭찬을 받은 가난한 과부는 가지고 있는 자원 면에서 가난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려는 마음에서는 부자였다. 그 이유는 ‘기꺼이 하고자 함’ (willingness)이 있었기 때문이다.” (폴 바네트, “고린도후서 강해” BTS 시리즈,IVP, p,200.) 저는 개인적으로 과부의 두 렙돈 비유를 읽을 때마다 폴 바네트의 직설에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은 거룩한 욕심이 생깁니다. 당시 이 과부가 예루살렘 헤롯 성전이라는 지경에 살고 있었는데 그 주변에는 으리으리한 집, 아주 풍족한 연봉, 그리고 수없이 많은 종교적 프리미엄으로 배를 채우고 있는 제사장, 율법교사, 서기관,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득실거리고 있었던 지역과 일치한다는 웃픈 스토리텔링이 존재한다는 점을 기억하고 싶은 욕심입니다. 부를 추구하고 있는 그들이 믿고 따르는 토라에 적시된 내용이 무엇입니까? 신명기 14:28-29절을 읽겠습니다.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헤롯 성전에 들어와 연보한 과부가 드렸던 두 렙돈은 노동자 하루 일당의 백 분의 일에 해당하는, 즉 한 끼 분량의 한 줌의 곡식 가루를 살 수 있는 적은 금액입니다. 오늘의 가치로 환산하면 약 2,000원 정도밖에 안 되는 물질입니다. 그렇다면 2,000원이 생활비의 전부일 수밖에 없는 과부를 돌보아야 하는 주체가 누구입니까? 바로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이 과부를 모른 체 하였을까요?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마음의 방치를 한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쓴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를 방치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보된 것입니다. 마음을 쓰지 않음이 무엇입니까? 그 반대로 방치하겠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께 왜 헌금을 드립니까? 이웃을 방치하지 않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연보와 구제예물을 왜 드립니까? 적어도 내가 살아가는 지경에는 두 렙돈이 전부인 과부가 없이 하겠다는 믿음이 있기에 드리는 것입니다. 결국 이타적인 마음 씀이 헌금이요, 구제금이요, 연보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바울이 역설한 12절에 진심을 담아 아멘하고 우리도 행하여야 합니다.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 다음 주일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2020년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면서 본문이 시의적절하게 세인교회에 주어진 그 의미를 아주 진중하게 고민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세인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장을 역임한 서중석 박사가 정기 채플에서 행했던 설교가 당시 학생이었던 제게 비수로 박혔던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 학교 대학원생들 중에 상당수가 목사입니다. 그리고 담임목사들입니다. 제가 그 학생 목사님들에게 부탁합니다. 가능하면 찬송가 70장을 교회에서 가증스럽게 예배 시간에 부르지 마십시오. 적어도 그 찬송을 행동함이 없이 부르는 것은 두 번 죄를 하나님께 범하는 것입니다.” 당시 개편찬송가 70장은 오늘 우리가 부르는 새 찬송가 50장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오늘 설교를 마치면서 이 찬양을 불러 보려고 합니다. 두 번 죄를 범할지 아니면 찬송의 가사를 행하며 살지는 저와 여러분의 이후 삶에 달려 있습니다. 어찌 보면 너무 거북하고 두렵고 부담스러운 가사지만 내 마음이 가사의 마음인지를 성찰하며 이 찬양을 드려보기를 원합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일체의 물질은 물질 이전에 마음입니다. 여러분은 마음이 있습니까?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리네 사랑하고 의지하며 주만 따라 살리라 주께 드리네 주께 드리네 사랑하는 구주 앞에 모두 드리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겸손하게 드리네 세상 욕심 멀리하니 나를 받아주소서 주께 드리네 주께 드리네 사랑하는 구주 앞에 모두 드리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주를 위해 드리네 주의 성령 충만하게 내게 내려 주소서 주께 드리네 주께 드리네 사랑하는 구주 앞에 모두 드리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