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18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후서 스물여덟 번째 강해) 제목: 아슬아슬하지만 본문: 고린도후서 7:8-13 서론) 먼저 사무엘상 3:1절을 읽으면서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이 말씀은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사무엘 선지자가 실로에서 소명을 받기 전, 엘리 시대의 참담한 영적 상태를 고발해 주는 신명기 역사가의 보고입니다. 소개한 문장에 나오는 단어 중에 ‘稀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를 풀자면 드믈 ‘希’ 자와 귀할 ‘貴’ 자로 이루어진 단어입니다. 한자를 풀면 말 그대로 드물고 귀한 상태를 말할 때 쓰는 단어가 ‘희귀하다’입니다. 선지자 사무엘이 부름을 받을 때, 여호와의 말씀이 제사장 엘리에게 임하지 않았음을 알려줌과 동시에 사정이 이러하기에 사무엘을 마지막 사사 겸 제사장을 부르셔야 했던 여호와 하나님의 의중을 보고한 내용이 바로 사무엘 3:1절입니다. 이것을 이미 알았던 김기석 목사도 그의 책에서 이런 글을 담아 놓았던 것을 보았습니다. “희망은 늘 위태롭다. 희(希) 자에는 ‘바라다’라는 뜻도 있지만 ‘성기다’, ‘드물다’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희망이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것이다. 희망은 낙관적인 전망이 아니라, 기어코 살아내는 안간 힘이다.”(김기석, “아슬아슬한 희망”, 꽃자리, 2014,p,66.) 저 역시 이 글을 읽은 지가 벌써 5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습니다. 이 글이 담긴 책을 다 읽고 나서 책 후면에 쓴 제 사족을 보니 이렇게 낙서되어 있었습니다. “아슬아슬한 오늘의 시대에 희망이 있음을 작가는 보여줬다. 어떤 의미로 보면 희망이 아슬아슬하기에 그 희망이 더 간절하고 소중한 것은 아닐까! 2015년, 나는 그 희망을 붙들련다. 그 희망이 나의 달려감의 끈이기를 기대하면서. 아름답고 깊이 있는 글을 쓴 작가에게 감사를 전한다. 2015년, 1월 1일 22:02” 저는 ‘드물다.’라는 단어에 필이 꽂혔습니다. 드물다는 것은 그만큼 통상적이지 않다는 말이고, 또 그러기에 그 드문 것이라는 길에 있는 사람이나 상황들은 그만큼 위태하고 아슬아슬한 상태임을 알려줍니다. 허나 김 목사도 언급한 대로 큰 길, 탄탄대로의 길, 넓은 길이 아닌 길로 가고 있다는 점은 동시에 주님이 원하셨던 길을 가면서 기어이 안간 힘을 다해 살아내고 있다는 영적 자존감을 갖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기에 아슬아슬하지만 그 길을 가는 것에 대하여 저 역시 이탈하고 싶지 않고 그 길을 가는 동역자들 모두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을 ‘아슬아슬하지만’이라고 정한 이유도 바로 본문에 등장하는 주인공 바울 역시 이 아슬아슬한 길을 여전히 갔던 믿음의 선배임을 오늘 우리 교우들과 공유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목회라는 것이 어디 쉬운가! 쉽지 않고 아슬아슬하니까 목회지!” 소천하신 선배 목사님의 조언이 요 근래 왜 그리 큰 음성으로 다가오는지 저 역시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본론) 오늘 본문은 아슬아슬하지만 그래도 그 아슬아슬함 속에서 타협하지 않고 한 길을 갔던 바울 사도의 외로웠던 목회 여정을 엿볼 수 있는 감동의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본문 여행을 시작하십시다. 우리는 지난 2주 동안 수요예배 설교를 통해 살폈던 바울 사도의 영적, 정서적 진의와 그 상태에 대하여 감동 있게 살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적대자들에게 본인의 진정성이 있는 진의를 표했음을 26번째 강해를 통해 나누었습니다. 아무리 나를 대적하고 있는 너희들이지만 나는 너희들을 포기하지 않고 ‘더불어’ 신앙의 여정을 걷고 싶으니 최소한 예의를 지키라고 간곡하게 권면했던 바울의 메시지를 접했습니다. 이 내용을 우리는 지난 수요 예배를 통하여 소위 ‘눈물의 편지’ 혹은 ‘분노의 편지’라고 하는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세 번째 편지에 담아 디도 편에 보냈음도 27번째 강해를 통해 살폈습니다. 이렇게 간절하고 진정성이 있는 편지를 디도를 통해 보낸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영적 상태에 대한 반응이 너무나도 궁금하여 디도가 하루속히 오기를 고대하였지만 디도는 여러 사정으로 인해 바울이 있었던 에베소로 돌아오지 못하고, 마케도냐 지역으로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울 본인이 손수 직접 디도를 만나기 위해 마케도냐로 달려갔고, 거기서 적지 않은 위로와 기쁨의 메시지를 받게 되었음도 나누었습니다. 디도가 가져온 위로와 기쁨의 메시지는 바울에 대하여 적대적 감정을 갖고 있었던 상당수의 지체들이 회개하고 회복되었다는 전갈이었습니다. 목회를 해 본 사람만 느낄 수 있는 전율하는 감동을 받은 바울은 곧바로 본인의 그 기쁨을 나누고 싶어 네 번째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였던 고린도후서 1-9장까지를 기록했다고 교우들에게 설명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7장은 바울이 디도로부터 대단히 기쁜 소식을 보고 받은 뒤에 쓴 네 번째 편지인 셈입니다. 이 배경을 선 이해하고 본문을 읽어야 명확한 본문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본문 8절을 읽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학자들은 여기에 기록된 ‘편지’에 대하여 어떤 이는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의 음란함을 질타했던 ‘서신 A’라고 말하는 학자가 있는가 하면, 또 다른 이견(異見)을 제시한 학자들은 이 편지가 세 번째 편지인 '서신 B' 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저는 선택해야 하는 입장이기에 후자 즉 '서신 B'에 동의하고 싶습니다. 이유는 오늘 본문으로 제시한 8-13절 전반에 흐르는 바울의 정서와 목회자로서 그가 고민했던 아픔과 기쁨이 너무 농후하게 들어있기에 ‘서신 B’가 더 가깝다는 동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8절에서 이렇게 본인의 심리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내가 편지를 너희들에게 썼는데 너희들이 그 편지로 인해 근심하게 되었던 것을 내가 후회했다고 표현했습니다. 동시에 바울은 본인의 양가감정을 드러내는 것 또한 숨기지 않았습니다. 편지를 보냈을 때는 후회는 했지만 지금은 그 후회를 거둬들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유부단한 바울의 성격 때문입니까? 그럴 리가 있습니까? 이어지는 본문 9절을 봅니다.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 구절은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번역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지금 내가 기뻐하는 것은, 여러분이 근심했기 때문이 아니라, 여러분이 아픔을 겪으면서도 상황을 호전시켰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근심하며 하나님께 멀어지기는커녕, 도리어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 결과는 모든 것이 유익이었지, 손해가 아니었습니다.” (메시지, 고린도후서 7:9) 이 구절을 통해 우리가 선 이해를 갖고 있었던 하나의 상황이 머릿속에 떠올라야 합니다. 세 번째 편지 즉 '서신 B'라는 ‘눈물의 편지’ 혹은 ‘분노의 편지’를 디도를 통해서 받고 읽었던 고린도교회에 있었던 바울의 적대자들이 돌아섰다는 감격적 보고, 그들의 상황이 복음적으로 호전되었다는 기쁨이 바울로 하여금 잠시의 근심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궁극적으로 성령 하나님께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셨던 그 일하심 때문에 기뻐하며 위로를 받았다고 본문 9절에서 4번째 편지에 담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에 제가 참 아끼는 집사님이 교회 예배에 출석했습니다. 헌데 이 친구가 지난 2주 동안 주일 예배에 결석을 했는데 혹시나 비대면 예배가 오래 지속된 탓에 조금은 흐트러진 것은 아닐까 싶어 예배 후에 인사 하는 시간에 반색하며 그 지체에게 야단을 쳤습니다. “주일 예배 오프라인으로 다시 시작했으니까 결석하지 말라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너무 성실한 지체라 제가 단 한 번도 싫은 소리나 야단을 쳤던 적이 없었던 본인이었기에 순간, 조금 당황스러워하는 느낌을 갖고 모기 소리 왈츠로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지난 주일에 너무 아팠어요. 사모님께는 말씀드렸어요.” 예배를 마치고 아내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더니 아무개 집사가 너무 몸이 그날 안 좋아서 도저히 주일 예배를 나올 수 없었다고 전언해 주었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나니 갑자기 그 지체에게 미안해졌습니다. 해서 다음 날 전화를 돌렸습니다. 반갑게 전화를 받는 그 지체에게 죄인 된 모습으로 이번에는 제가 모기 소리 왈츠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집사님, 몸이 많이 아픈 데 담임목사가 야단을 쳐서 미안해요. 몸이 아픈 줄로 모르고 버럭 야단쳤네요. 미안해요.” 그러자 전화기 저편에서 이런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목사님, 저는 오히려 감사했어요. 목사님이 저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시면 그렇게 하셨겠어요. 미안해하지 마세요. 도리어 저는 감사했는데요.” 목회를 하다보면 목사가 기도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성도가 있는가 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기도하게 하는 신자가 있습니다. “지금 내가 기뻐하는 것은, 여러분이 근심했기 때문이 아니라, 여러분이 아픔을 겪으면서도 상황을 호전시켰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근심하며 하나님께 멀어지기는커녕, 도리어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 결과는 모든 것이 유익이었지, 손해가 아니었습니다.” 이 구절을 실감나게 해 준 지체 때문에 지난 수요일 이후, 참 따뜻한 삼일을 보내고 오늘 주일을 맞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본인에게 임한 여러 불편함을 신앙적 역전의 발판으로 삼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목사가 기도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성도입니까? 아니면 처음부터 끝까지 기도하게 하는 신자가 입니까? 이어지는 본문 10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저는 바울이 선포한 이 구절 하나, 하나의 단어에 목이 메는 것 같은 정서적, 신앙적 공감 때문에 아멘 했습니다. 우리가 하는 근심은 두 가지가 있다고 바울이 역설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는 근심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세상 근심이라고 정의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행하는 근심은 구원에 이르게 하려는 하나님의 일하심이라고 분명히 적시한 반면, 세상 근심은 우리들을 영적으로 죽이게 하는 근심이라고 정의합니다. 본문에 그 다음의 스토리를 바울이 이어가지는 않았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 성도가 해야 하는 근심이 어떤 근심인지는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바울은 성도가 해야 하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행하는 근심에 대하여 긍정의 도를 전합니다. 본문 11절입니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바울이 말한 하나님이 하게 하신 근심의 긍정적 효과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복음의 궁극성에 대하여 간절하게 해주는 효과입니다. 간절함, 변증, 분함, 두려움이라는 치열함을 거친 뒤에 사모함, 열심, 스스로의 자책을 통한 벌함 등등을 느끼게 해주는 효과도 가져오게 했습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결국 이 치열한 영적 전투를 통하여 성결함의 은총까지 받는 긍정의 효과를 주었다고 바울은 자신 있게 역설합니다. 이제 우리는 본문의 마지막 부분을 살피겠습니다. 12-1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를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를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우리가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그의 마음이 너희 무리로 말미암아 안심함을 얻었음이라” 바울은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들(적대자들이었다가 회복된 고린도교회의 형제들)에게 쓴 편지는 하나님이 너희들을 위하여 전적으로 일하신 하나님의 계획이었고, 또 이 일을 위하여 계획하신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 받은 나와 디도는 이제는 기쁜 마음으로 근심이 아닌 안심하게 되는 감동을 받았음을 네 번째 편지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본문 해석입니다. 이제 이상의 본문 해석을 전제로 교우들과 나누고 싶은 영적 말씀의 레마를 공유하고 싶습니다. ※ 아슬아슬하게 보이는 영적 치열함은 근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복입니다. 이유는 이미 설명했습니다. 목회는 언제나 아슬아슬합니다. 바울이 말한 그대로입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어떤 때는 그 무언가 때문에 간절함, 변증, 분함, 두려움이라는 치열함을 느끼게 해줍니다. 그러다가 그 격정과 치열함을 거친 뒤에는 사모함과 열심을 내게 하는 효과도 가져오게 합니다. 해서 이 모든 과정이 결국 이루실 목적을 향한 하나님의 일하심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 줍니다. 목회가 치열하지 않으면 그건 직무유기이든지 나태함으로 오는 방치의 결과입니다. 목회는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을 떠나 그 사람의 영혼이 영생을 하는가, 영벌을 하는가의 차원이기에 생사의 문제보다 더 소중한 사역입니다. 이 소중한 사역을 치열하지 않게 구렁이가 담 넘어가는 것처럼 방관한다면 그게 어찌 목회일 수 있겠습니까? 이제 교우들에게 적용해 봅니다. 신앙생활이 치열하지 않은 자의 영적 상태가 어떻습니까? 둘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습니다. 죽었든지, 죽었는데 산 체 하든지입니다. 사도요한을 통하여 주신 사데 교회의 책망은 두렵고 떨리고 또 두렵고 떨리는 메시지입니다. 요한계시록 3:1-2절을 읽겠습니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6년 전에 소아시아 성지 순례를 통해 사데를 방문하였을 때 너무 놀랐던 것은 사데 지역에서 당시 섬기고 있었던 아데미 신전 터의 위용이었습니다. 사데 사람들은 이 우상의 제단을 실로 어마어마하게 건축했습니다. 지금은 지진으로 거의 대부분의 터가 무너졌지만 그 당시에 세워진 기둥들이 오늘의 사데 터에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을 보면 그 당시의 위용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가늠할 정도였습니다. 세속의 상징인 아르테미(아데미 신전)의 위용은 정말로 충격이었습니다. 거기에 비해 사데 교회의 흔적은 정말로 너무나 보잘 것이 없었습니다. 들어가는 입구 문에 십자가 표시가 있어서 이곳이 사데의 교회 터라고 짐작할 수 있지 도무지 이런 곳이 교회 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소아시아 교회의 큰 교회 터였을까를 의심할 수밖에 없을 정도의 초라함으로 남아 있어 충격이었습니다. 사데 교회 예배당의 초라함을 보면서 묘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 사데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을 가리켜 이름은 살았으나 실상은 죽은 자라고 했던 그 이유와, 행위의 온전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을 수 없었던 사데의 영적 상태를 보는 듯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존 스토트는 ‘예수님이 이끄시는 교회’에서 사데를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존 스토트, “예수님이 이끄시는 교회”, 두란노,pp,108-111.) “영적인 묘지 같은 교회” 이런 치욕이 또 어디에 있습니다. 성도가 영적으로 치열하지 않으면 묘지에 죽어 있는 시체와 별 다름이 없는 존재가 됩니다. 성도가 치열하지 않은 교회는 묘지 교회입니다. 하나님께 치열하십시오. 하나님께 치열할 때 그냥 깨지지 말고 복음성가의 가사처럼 부서지게 깨지십시오. 그 깨짐이라는 아슬아슬함을 갖지 않고 경험해 보지 않은 자에게 무슨 성령의 감동이 있고, 은사가, 영적 전율함이 있겠습니까? 한 푼 가치도 되지 않는 교리적인 도그마에 함몰되어 성령의 일하심에 눈감고 있는 자에게 무슨 깨지고, 부서지는 영적인 엔-카운터가 있겠습니까? 오래 전 마르틴 루터가 말한 글을 불의 사자 레오나드 레이븐힐의 책에서 읽고 밑줄 그었습니다. “우리는 피는커녕 땀도 나지 않는다.”(레오나드 레이븐힐, “부흥의 세대여 통곡하라”, 규장, p,20.) 영적인 아슬아슬함의 고비를 넘기는 자는 유람선에 승선한 관광객이 아닙니다. 영적인 아슬아슬함의 치열함을 갖고 사는 자는 군함에 승선한 그리스도의 군사입니다. 영적인 아슬아슬함이라는 치열함과 싸우고 있는 성도는 내가 옛날에 이런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는 썩는 냄새의 구렁텅이에 머물지 않는 자입니다. 영적인 아슬아슬함이라는 치열함에 맞서 싸우는 자는 내가 이전에 어떤 훈련받았고, 어떤 배경의 출신이고, 내 신앙의 경력은 이거야! 라고 내세우지 않습니다. 영적 치열함에 붙들려 사는 자는 나에게 임한 오늘의 아슬아슬한 치열함에서 패하지 않기 위해 성령을 붙는 자이고, 피와 땀과 눈물이라는 세 지 액체를 날마다 역동적으로 흘리는 제자입니다. 나는 오늘 영적 치열함을 먼저 갖고 산 바울을 나면서 이런 짜릿한 감동을 느낍니다. 그리고 이렇게 결단하게 실천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나도 이 아슬아슬한 치열함에서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지난 주에 황홍일 집사가 장협착 수술을 마쳐졌습니다. 저는 수술 시간에 집중해서 기도했습니다. 완벽한 수술을 위해서 말입니다. 아내 되는 집사님과 전통을 나누다가 황 집사님의 간병인이 경험한 내용을 들려주었습니다. 수술에 들어갈 때도, 수술을 하고 나와서도 불안과 통증으로 고통스러워하는 황 집사님에게 정말로 신비한 일은 이강덕 목사가 보내준 설교 영상, 그리고 세인지체들이 합심하여 중보 한 영상을 들려주면 고통을 이긴다는 보고였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무슨 신비주의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이 말씀을 드리려는 것입니까? 이강덕 목사의 기도가 마법적인 능력을 자랑하고 싶어서입니까? 그럴 리가요. 이것을 기억합시다. 제가 전해 준 설교 영상과 세인 교회 교우들의 중보의 음성은 황 집사님을 위한 영적 치열함의 도구임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학습된 습관, 한 치도 안 되는 들었던 풍월로 신앙생활을 다하는 것처럼 겉멋 들지 마십시다.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아슬아슬한 치열함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레이븐힐이 이렇게 사자후를 토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안다고 건방떨지 말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알기 위해 목을 걸라” (레이븐힐의 위의 책, p,146) ‘부서져야 하리’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부서져야하리 부서져야하리무너져야하리 무너져야하리깨져야하리 더 많이 깨져야하리씻겨야하리 깨끗이 씻겨야하리다 버리고 다 고치고 겸손히 낮아져도주 앞에서 정결타고 자랑치 못할거에요부서져야하리 무너져야하리깨져야하리 깨끗이 씻겨야하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