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27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제목: ad fontes (3) 본문: 에베소서 2:8-10 서론) 얼마 전, 의사협회와 국가 간의 치열한 기 싸움이 있었습니다. 공공의대를 만들어서 의사를 조금 더 많이 배출해 OECD 국가 중에 의사 1명이 100명의 사람들을 맡아야 하는 비율에서 가장 후진성을 보이고 있는 작금의 상태를 업그레이드 하겠다는 취지로 시작된 일이었지만 결과는 의사들은 밥그릇 쟁탈전으로, 국가는 국가권력의 힘 몰아붙이기 양상으로 확전되어 일반 국민들에게는 적지 않은 상처를 입힌 꼴이 되었습니다. 이 기막힌 전쟁을 지켜보던 저는 허준이 생각났습니다. "경남 밀양의 얼음골로 스승 유의태는 제자 허준을 부릅니다. 인체의 해부가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는 시절, 반위(위암)로 죽어가는 스승 유의태는 제자 허준이 도착한 얼음골 동굴의 왕골자리에 반듯이 누워 있었습니다. 스스로 자진했기 때문입니다. 스승의 시체 옆에 남겨진 유서가 황촉불에 빛나고 있었습니다. 사람의 병을 다루는 자가 신체의 내부를 모르고서 생명을 지킬 수 없기에 병든 몸이나마 네게 주노니 네 정진의 계기로 삼으라는 스승의 유서 앞에 무릎을 꿇은 허준은 의원의 길을 괴로워하거나, 병든 이 구하기를 게을리 하거나, 이를 빙자해 돈이나 명예를 탐하거든 어떠한 처벌이든 달게 받을 것을 맹세한 뒤에 스승의 시신을 칼로 가릅니다. (신영복, “나무야 나무야”, 돌베개, p,12.) 오래전에 읽었던 신영복 선생의 산문에 기록된 이 글을 읽다가 큰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허준, 그는 동의보감의 저자라는 교과서적인 이해 말고도 저에게는 적어도 그의 삶이 너무나 아람다운 삶을 살았던 선인으로 내 영혼 깊은 곳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진짜 의사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의사로서의 기본에 충실했던 스승 유의태와 제자 허준은 이런 의미에서 우리들의 주제인 ad fontes 의 정신을 충실하게 실천한 우리들의 선열임에 틀림없습니다. 본론) 오늘도 근본의 정신을 나누고자 합니다. 저는 오늘 교우들과 AD FONTES 즉 ‘근본으로’, ‘기본으로’, ‘초심으로’ 라는 종교개혁자들이 내 걸었던 슬로건의 행동 강령의 세 번째 주제인 ‘SOLA FIDE’ 대하여 공부하고자 합니다. ‘오직 믿음만으로’ 너무 멋있어 보이는 외침입니다. 허나 이 외침만큼 위험하고 조심스러운 외침도 없을 것입니다. 이 외침은 어떤 이에게는 눈물을 쏟게 하는 문장이 될 수 있겠지만 또 어떤 이에게는 독약 중에 가장 치사율이 높은 독약이 될 수 있는 칼날의 양면과도 같은 문장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믿음만으로’는 명제를 종교 개혁자들인 손에 든 이유는 말 할 것도 없이 중세 가톨릭이 성직주의와 교권, 그리고 성전중심적인 무소불휘의 종교적인 권력의 아성을 쌓아 올리기 위해 자행한 반신학적이며, 반성서적인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가르친 것에 대한 저항의 표시였습니다. 다음 주일에 살피겠지만 우리는 내가 무엇을 행함으로 인해 구원을 받은 존재가 된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적인 일하심이라는 은총으로 인해 구원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해서 몇 주 전, 우리 교회와 교단이 믿고 있는 존 웨슬리 신학의 개괄을 전할 때 대전제로 말씀드린 것이 우리는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임으로 단 0,1%도 내 스스로 구원이라는 자리에 오를 수 없는 죄인임을 천명했던 것입니다. 사정이 이런 데도 중세 가톨릭은 이것을 정면으로 속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면죄부 사건입니다. 교황 레오 10세는 지금 바티칸 시티에 우뚝 서 있는 베드로 대성당을 짓기 위해 건축에 필요한 자금 조달을 계획했는데 바로 면죄부였습니다. 면죄부를 구입한 돈이 금고에 떨어져 짤랑거리는 소리가 나면 연옥에 있는 부모들이 거기에서 빠져 나온다는 가히 유치하기 짝이 없는 막장 대본을 써서 수많은 무지의 사람들에게 돈을 갹출했고, 심지어는 면죄부를 사는 순간 자기 죄를 회개할 필요가 없이 구원을 받는다는 사기극의 절정을 보여주는 행태까지 자행하기까지 했습니다. 다시 말해 면죄부를 사는 행위는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마일리지를 쌓는 일이라고 가르친 셈입니다. 이런 극에 달하는 사기극을 벌인 가톨릭 당국에 대하여 젊은 사제였던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1517년 10월 31일에 내 건 소위 종교개혁문이라고 지칭되는 95개조항의 반박문은 엄격한 의미에서 종교개혁문이라는 성격보다는 면죄부에 대한 반박문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더 적확합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에게 그 반박문에 32항과 33항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32항 그들이 산 면죄부 증서로 자신의 구원이 확실하다고 스스로 믿는 사람은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들과 함께 영원히 저주를 받을 것이다. 33항 교황의 면죄부가 인간이 하나님과 화해하는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특별히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지금 이 글을 담임목사의 설교로 혹은 홈페이지에 수록된 원고로 그리고 설교 요약문에 있는 글로 확인하고 있어 그리 큰 느낌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비텐베르크를 비롯하여 로마가톨릭 권력의 천지였던 독일 지역에서의 이 글은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과도 비교할 수 없는 메가톤급 폭탄이었습니다. 이 선언한 영적 혁명이라는 파괴력을 갖고 있는 선언이었습니다. 우리들에게 주어진 구원의 조건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담을 쌓고 있는 벽을 허물 수 있는 믿음 즉 하나님과 화해하게 만든 믿음이고 그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는 점에게 가히 혁명적인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헌데 2020년 9월 27일 주일에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메시지는 경우에 따라 전혀 우리들을 감동시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왜? 그건 상식이니까요. 하지만 503년 전, 독일에서 이 선언은 상식이지 않았습니다. 이 명제는 화형 불에 타서 죽을 수 있는 이단적 사상의 핵심이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렇듯 믿음은 내가 갖기 위해 그 무언가를 행한 것의 결과물이 아니라 전적으로 주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이 명제는 기독교 교리의 뿌리이자. 오늘의 기독교를 기독교 되게 한 초석입니다. 오늘 본문은 여러 차례 귀에 인이 박힐 정도로 강조 또 강조한 바울의 에베소서 선언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육비에 새겨야 하는 교훈임은 물론, 또 심장에 새겨야하는 기독교 교리의 근간이자 핵입니다. 본문 8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분명히 바울은 말합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나와 너에 의해서 만들어진 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여기까지는 정상적인 기독교인들이라면 누구든지 감동으로 아멘하게 됩니다. 왜 감동적이라는 형용사를 붙였습니까? 내가 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그래서 바울이 고백한 고백은 절절한 감동을 내포한 신앙고백이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5:10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어떤 이에게는 오직 믿음을 선물로 받았다는 이 믿음의 정체로 인하여 눈물을 흘릴 것이라고 전제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눈물로 받는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이 반대로 칼이 되는 경우입니다. 이제부터는 아주 민감한 영적 긴장감을 갖고 집중해야 하는 대목에 도착했습니다. 선물을 받은 자는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그것은 선물을 받은 자는 선물을 준 자에게 실망을 시키지 않는 지속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당위성을 지켜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9절입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내 행위에 의해서 구원을 받은 자가 아니기 때문에 구원 받음을 자랑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이 단락을 마무리하는 바울이 아주 의미 있는 메시지를 에베소 교회의 지체들에게 남깁니다. 이어지는 본문 마지막절인 1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저는 10절의 말씀을 참 많이 접한 목사입니다. 맨 처음 이 구절을 강해의 성격으로 만났을 때, 다가왔던 충격은 이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천재다. 8-9절에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지체들이라는 제 1차 독자와 그가 예상을 했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2000년 뒤에 에베소를 접하고 있는 제 2차 독자인 세인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을 꼼짝하지 못하게 만드는 능력이 너무 탁월하다는 충격을 발견했기에 이런 편지를 쓴 바울은 천재라고 족히 인정했습니다. 바울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자가 크리스천들이라고 못 박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누구도 행위를 자랑하면 안 된다고 강하게 역설했습니다. 헌데 이 단락을 마무리하는 메시지에서 바울은 역설적이게도 이런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자들은 반드시 행동하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행함을 자랑하지는 말아야 하지만 행하는 것을 중단하지도 말라. 바울이 행함을 중단하지 말라는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분명히 10절에서 구원 받은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선하게 지음을 받은 ‘포이에마’ 즉 걸작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걸작들인 우리들은 그 선함의 영역 안에서 행하여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선하게’로 번역한 헬라어 단어 ‘아가도이스’는 영어로 번역하면 ‘the good’입니다. 악한 것과 정반대편에 있는 일체의 그 무엇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아가이도스’를 제일 잘 설명하는 성경적 내증의 구절은 바로 이것입니다. 누가복음 10:27-28절을 소개합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그렇습니다. ‘아가이도스’는 ‘이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제시하는 믿음은 말 할 것도 없이 나 혼자 예수 믿고 거듭나 구원 받음을 기뻐하며 감격해 하는 교리적인 믿음이 아니라 그 믿음으로 구원 받음에 감격하여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행동하는 믿음일 것입니다. 금년 상반기에 만난 뉴욕 리디머 장로교회의 팀 켈러 목사가 쓴 ‘하나님을 말하다.’라는 걸작에서 그는 칼 바르트가 말한 위험천만한 메시지를 인용하며 소개하고 있습니다. “스위스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말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세상이 아니라 바로 교회였다.” (팀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 두란노,p,109.) 비수입니다. 별로 듣고 싶지 않은 껄끄러운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바르트의 이 말에 동의하게 된다는 점에서 목사는 절절하게 아픕니다. 주군이신 예수께서 가신 길과는 전혀 반대의 길에 있었던 산헤드린 공회와 전혀 다를 바 없는 교회 공동체에 대하여 싸늘한 비난을 한 칼 바르트가 살고 있었던 당시 교회는 국가교회라는 괴물이었습니다. 국가적인 권력에 맛 들려 있는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니었기에 바르트는 이렇게 갈파한 것입니다. 우연히 유트브에 올라와 있는 영상을 헤엄치다가 2017년 KBS 아침마당에 출연한 베이직 교회 담임목사인 조정민 목사의 ‘기독교를 말하다’라는 프로그램을 만났습니다. 기독교 텔레비전이 아닌 공영방송인 KBS에서 현직 목사를 출연시켜 주제를 기독교라는 타이틀로 방영한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것임을 알기에 그 방송을 시청했습니다. I-MBC 대표이사를 역임하다가 회심하고 목사가 된 특별한 이력이 있는 앵커 출신의 목사라는 점이 감안되었겠지만 그래도 그가 출연한 이 방송을 시청하다가 참 많은 생각에 젖었습니다. 그는 대한민국 청년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직종 중에 하나인 언론사의 대표이사였습니다. 그랬던 그가 베드로처럼 그가 가졌던 모든 배를 버리고 미국 고든 콘웰 신학교에 입학하여 목사가 된 이야기를 공영방송에서 주저 없이 전했습니다. 아내가 온누리 교회의 새벽예배를 나가기 시작하자 의심을 갖고 혹시 아내가 다니던 교회가 이단인가를 추적하기 위해 잠입한 온누리 교회 새벽예배 시간에 하나님께 붙들려 회심을 경험하게 되고 그가 목사가 되기로 결심한 이유를 말하는 공영방송에서의 첫 멘트가 제 귓가를 세차게 때렸습니다. 성경을 읽다보니 예수는 진짜인데 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가짜가 많지? 예수는 진짜인데 왜 교회는 이 모양이지? 예수는 진짜인데 왜 기독교는 가짜가 많지? 그는 이것을 알아보기 위해 53세의 나이에 갖고 있던 세속의 모든 배를 버리고 신학교에 입학하여 목사가 된 이후 알게 된 답이 이렇다고 공영방송 프로그램에서 고발합니다. 예수에 대한 믿음이라는 것을 왜곡하기 때문이다. 내가 정녕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은혜로 인하여 선물로 받게 된 자라는 사실을 진정으로 인정한다면, 그 분이 나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신 주군이신 예수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예수께서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는 권면에 대하여 카멜리온식 반응을 하는 종교인이 아니라, 세속적 이익이 있는 곳이라면 언제나 달려가 그 존재에게서 피를 빨아먹음으로 생존하는 드라큘라 그리스도인 아니라 그 분이 말씀하신 것에 대하여 불편하지만, 치열하게 투쟁하며 살아내는 그리스도인이 진짜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진짜라는 그의 말을 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 ‘오직 믿음만으로’ 즉 ‘sola fide'를 갖고 ’ad fontes'의 정신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영적 교훈을 이렇게 받기를 원합니다. ※ 구원의 원인보다는 구원의 결과에 주목하는 것이 ‘sola fide’ 의 기본정신임을 명심하십시다. 이 말을 이렇게 바꾸겠습니다. 믿음의 선물로 값진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라면 막 살지 않고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을 날마다 인식하며 사는 성도들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선교신학자 레슬리 뉴비긴은 본인의 글에서 ‘신앙주의(FIDEISM)'를 이렇게 풀어 설명했습니다. “나는 신앙주의라는 이단을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 자신의 신념만으로 내게 충분히 좋다.’고 믿는 자들이다.” (레슬리 뉴비긴, “복음, 공공의 진리를 말하다”, SFC,p,36.) 믿음이라는 선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값없이 그러나 가장 값지게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도취나 자기 신념을 신앙으로 착각하는 신앙주의자들이 아닙니다. 믿음을 선물로 받고 감격해 하는 자들은 언제나 마음과 뜻과 정신을 주군이 원하시는 삶에 궤적을 맞추고 사는 자들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수가성에 살고 있었던 여인은 야곱의 우물가에서 예수를 만난 뒤에 자기의 신념의 상징이었던 물동이를 버리고 아픔의 흔적으로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사마리아로 들어가 그녀는 신념이 아닌 믿음으로 사는 인생을 택하였음을 요한 기자가 보고합니다. 요한복음 4:28-29절을 봅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제가 왜 이 험한 구절을 발췌했는지 아십니까? 여자가 말한 한 대목 때문입니다. ‘내가 행한 모든 일’ 결코 드러내고 십지 않은 여성성을 갖고 있는 여자들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에 대하여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녀의 삶의 기본은 이제 내게 말한 그 사람 예수 그리스도에게 궤적을 맞추고 살기로 결심했기에 물동이를 버린 것이었습니다. 본인이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는 사마리아 수가성에 살고 있었던 이 여인의 후속편은 성경에 등장하지 않지만 그녀가 걸었던 쓰라리고 쓰라린 그 아픔의 길에서 떠나 새로운 인생을 살았을 것을 추측하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는 간증거리입니다. 결론) 이제 저는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오직 믿음만으로’의 정신으로 산다는 것은 믿음이면 다 해결되는 것이기에 아무렇지 않게 정돈되지 않은 삶도 허락하여 용인하는 삶이 아님을 분명히 살폈습니다. 도리어 ‘믿음으로만’의 정신을 갖고 살아가는 자는 주님이 행하셨던 삶의 내용들을 치열하게 추적하여 나 또한 살아내는 행하는 믿음임을 살폈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주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삶이 무엇인가를 철저하게 경성하여 무너진 이 땅의 교회의 아픔을 치유하는 역동의 주인공으로 내가 택함 받는 신실한 종들이 우리 세인 지체들이 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세상 흔들리고 사람들은 변하여도 나는 주를 섬기리 주님의 사랑은 영원히 변하지 않네 나는 주를 신뢰해 믿음 흔들리고 사람들 주를 떠나도 나는 주를 섬기리 주님의 나라는 영원히 쇠하지 않네 나는 주를 신뢰해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내가 살리라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내가 살리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