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20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제목: ad fontes (2) 본문: 마가복음 9:2-8 서론) 우리는 지난 주일부터 종교개혁자들이 외쳤던 'ad fontes' 즉 ‘기본으로’ 혹은 ‘근본으로’라는 개혁 정신의 5가지 내용을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Sola Scriptura (오직 성경만으로) 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만으로) Sola Gratia (오직 은혜만으로) Sola Fide (오직 믿음만으로)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만) 이 5가지의 세부적 실천 강령 중에서 지난 ‘오직 성경만으로’를 살폈고 오늘은 두 번째 강령인 ‘오직 그리스도만으로’를 공부하려고 합니다. 토요일과 주일에는 아내가 식사를 준비함에 있어서 다른 여느 날과는 달리 신경을 쓰는 편입니다. 스테미너를 소비할 교역자 둘을 신경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일 저녁에는 게 찌개를 했습니다. 저는 아내가 음식을 무엇을 하든지 맛에 상관하지 않고 무조건 칭찬을 하는 편입니다. 더불어 맛있게 먹는 것이 제 삶의 태도입니다. 허나 아들은 아주 가끔 아내가 준비한 반찬에 대하여 가타부타 평을 하는 편인데 그날은 게 찌개에 대하여 잔소리를 하나 늘어놓았습니다. 본인이 원하는 게 찌개의 맛이 아니었는지 아내에게 이렇게 한 마디를 했습니다. “어머니, 게 찌개에는 아주 가끔 라면 스프가 들어가면 좋아요.” 약간의 MSG를 넣어서 맛을 더 나게 만들면 어떨까 싶었는데 아내에게 단호하게 거절을 당했습니다. 우리 집 음식의 특징은 맛이 없어도 인공조미료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엄마의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인공조미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입맛을 돋게 한다는 점입니다. 넣으면 신비의 맛을 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다음 음식에는 조금 더 많이 넣어야 맛이 난다는 점입니다. 말 그대로 중독을 일으킵니다. 그렇게, 그렇게 MSG가 첨가된 음식을 먹게 되면 우리는 몸에 치명적인 독소들이 체내에 쌓이게 되어 건강을 해치게 되는 부작용을 낳게 된다는 점에서 조미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저는 이런 공식이 기독교 신앙에도 너무나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오래 전, 진해로 사역지를 옮겨 부임을 했을 때 교회 구성원 중에 기도원파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 많은 인원은 아니었지만 기도원파 좌장이 때가 되면 추종하는 신자들을 데리고 산상 기도라는 명목으로 기도원에 데리고 올라가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그들의 명목은 대단히 교만했습니다. 은퇴하신 담임목사님이 갖지 못한 불같은 성령의 사역을 맛보기 위해서라는 그럴듯한 명목이었습니다. 5년을 목회하면서 그런 분파주의적인 아주 못된 습성들을 정리했지만, 과정 중에 적지 않은 저항을 받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대단히 과격한 은사주의에 빠져서 그것이 뭐가 잘못인지조차 모르고 복음의 정수에서 벗어난 일탈들을 즐기던 자들과의 싸움은 무감각의 정도가 심각해서 쉽지 않았습니다. 이미 영적 MSG에 중독된 자들의 그 독소를 빼내는 데에는 많은 에너지가 필요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또 다른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우리 세인교회의 상당수의 신자들은 뜨레스디아스 사역자가 전횡을 저질렀던 폐해를 직접 눈으로 목격한 자들이기에 더 설명이 용이합니다. 뜨레스디아스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가 너무 중요한 것은 알지만, 2%가 부족하다고 부추겼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교회를 뜨레스디아스를 경험한 은혜로운 성도들과 그것을 경험하지 못한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성도들로 이분화(二分化)시키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저질렀습니다.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기막힌 상황이 교회에서 연출되는가? ‘ad fontes’의 두 번째 강령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만으로)입니다. 본론) 저는 오늘 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만으로)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연구하고자 합니다. 본문을 나누어 보십시다. 오늘 본문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다 기록된 기사입니다. 공관복음에 병행되어 기록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예수님의 사역임을 알려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의 직전 장인 마가복음 8장은 가이사라 빌립보에서 베드로를 통해서 교회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신앙의 고백을 들으셨던 주님께서 당신 스스로가 십자가에서 죽게 될 것이라는 이른바 수난고지를 하는 장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이 시작됩니다. 본문 2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주님께서는 수난고지 엿새 후에 항상 중요한 사건이 있을 때마다 데리고 다니셨던 제자들이었던 제자들의 1그룹이라고 할 수 있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올라간 높은 산이 어디인가? 에 대한 학자들의 다양한 주장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다볼 산이라고 주장하는 데 다볼 산은 해발 588m이기에 높은 산이라고 지칭된 마가의 보고에 나름대로의 한계가 있습니다. 이외에도 메론 산(1208m)으로도 추측을 합니다. 이 산 역시 높은 산이라는 기록에 충실히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해서 학자들 많은 이들이 높은 산을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가장 지근거리에 있는 헐몬 산(2826m)으로 주장하는데 저 역시 이 의견에 동의합니다. 자,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오늘 본문의 무대인 헐몬 산에서 베드로외의 두 명의 제자는 눈을 의심하게 하는 놀라운 일을 목도하게 됩니다. 본문 2절을 봅시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세 제자들이 본 놀라운 광경이 무엇이었습니까? 주님의 모습이 변화되신 모습이었습니다. 어떻게 주님이 변화되셨습니까? 본문 3절입니다.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이 구절은 구약의 예언자였던 다니엘이 보았던 하나님의 형상을 염두에 둔 기록인 듯합니다. 다니엘은 환상을 통하여 본 하나님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다니엘 7:9절입니다. “내가 보니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셨는데 그의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의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 그의 보좌는 불꽃이요 그의 바퀴는 타오르는 불이며” 왜 구절이 중요합니까? 예수님께서 변형된 모습은 분명히 다니엘이 본 하나님의 형상이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만 더 첨가하겠습니다. 주님의 변형만으로도 형언할 수 없는 충격을 받기에 충분한 제자들이었는데 한 가지의 신비로운 일이 더 눈에 목격되었습니다. 본문 4절입니다.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 주님을 중심으로 좌우에 율법의 상징이었던 모세가 나타났고 선지자의 상징인 엘리야가 나타났다고 마가는 보고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절대적인 종교적 거두였던 이 두 존재가 나타나 예수님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지금 세 명의 제자들 눈앞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놀라운 현상은 꿈이 아니라 제자들의 현실에서 보여 지고 있는 생생한 드라마였습니다. 이 즈음에서 다시 직전 마가복음 8장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나는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제사장들의 음모로 인하여 십자가에서 죽게 될 것을 선포하셨습니다. 이 십자가의 수난 예고는 제자들에게 적지 않은 충격과 혼란을 야기 시키는 일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혼란 속에 있었던 제자 세 명이 보고 있는 주님의 변형의 형상은 제자들에게 그 분이 하나님이심을 확신케 해주는 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영적인 충격이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더 주목할 것은 제자들이 도무지 접근할 수 없는 열조의 영웅이었던 모세와 엘리야가 마치 주님에게 수종드는 모습으로 그 분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제자들은 헐몬산에서 지금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도록 만드는 충격적인 현상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앞서 두 가지의 예수님의 신성성(神聖性)을 해석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① 주님이 변형되실 때 그의 모습은 다니엘에 환상을 통해 보았던 하나님의 형상과 동일함을 강조함으로서 예수님도 하나님이심을 표현했습니다. ②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주님과 대화를 하는 것을 표현함으로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의 사실을 마가는 왜 강조했을까요? 재론하며 강조하지만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오신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빌립이 주님에게 요청했습니다. “우리들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이 빌립의 요청에 대하여 주님이 무엇이라고 일갈하셨습니까?요한복음 14:9절을 주목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현존하시는 하나님의 그림자이며 본체이십니다. 이것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오늘 설교를 통해 대단히 중요한 ad fontes 의 세부 강령으로 진입하는 교훈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올바른 목표설정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져야 할 올바른 목표의 방향성의 문제 말입니다. 무엇입니까? ad fontes 의 실질적 행동 강령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님만으로’ 라는 목표 설정입니다. 이 목표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가져야 합니다, 이 슬로건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방법이 본문에 있습니다. 저는 그 답을 7절에서 찾고 싶습니다.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듣는 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목표이자 방향성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을 사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에 대하여 우리는 작금에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염려하는 교회에 대한 분노는 복잡한 것 같지만 어떻게 보면 하나입니다. 말한 대로 살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분노요, 염려입니다. 체코슬로바키아 출신의 소설가인 밀란 쿤데라의 걸작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보면 조국 체코가 소련에 의해 점령당할 때 가졌던 정치인들의 그럴듯한 정치적 선동질을 하면서 잘못된 정치체제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던 자들(종교인들을 포함함)에 대하여 혀를 내두르면 내뱉었던 무서운 일갈이 있습니다. “중부 유럽의 공산주의 체제가 오로지 범죄자들의 창조물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근본적인 진리를 어둠 속에 은폐하는 것들이 있다. 범죄적 정치체제는 범죄자가 아니라,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을 발견했다고 확신하는 광신자들이 만든 것이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2009,p,287.) 저는 왜 일부 목회자들이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 휘둘림을 당해야 하는지, 심지어 휘둘림을 당하는 것도 최고의 수치인데 그 한 복판에서 도리어 극단적 정치주의자로 변질된 괴물이 되어야 하는지 가슴이 아프고 또 아픕니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섬기는 교회에서 갈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양들을 붙들고 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럴 시간이 있으면 생사의 기로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 지체들을 위해 엎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고린도전서 2:1-2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오늘 내가 섬기고 있는 교회의 위기는 주님이 하신 말씀에 대해 귀를 기울이지 않는 위기입니다. 역발상의 교훈을 삼아 보십시다. 오늘 한국교회와 한국교회의 목회자들과 한국교회의 신자들에게 오늘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원색적으로 선포합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말을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도 이렇게 증언한 것입니다. 계시록 1:2-3절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그런데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세 제자의 패착은 하나님이 들려주신 메시지와는 전혀 다른 행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본문 5-6절입니다.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 말대로 사는 것에 대한 결단과 행동이 아니라 초막 셋을 짓겠다는 베드로의 반응이 나옵니다. 저는 베드로의 이 심리적 상태를 충분히 이해합니다. 변화산상에서 예수님의 변형을 보았던 세 명의 제자들은 무슨 말을 할지를 모를 정도로 영적인 황홀경에 빠졌습니다. 두렵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 광경은 놓치지 않고 싶었던 체험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해서 이 놀라운 광경을 체험하고 있는 세 명의 제자들 중에 항상 다혈질적인 성격으로 일을 그르치게 하는 일등공신과도 같은 베드로가 역시 또 일을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초막을 짓겠습니다. 얼마나 좋았으면 이렇게 고백했을까? 심정적으로 이해는 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임을 본문 9절이 알려줍니다.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그렇게 아름다웠던 광경을 구름이 덮어버렸습니다. 그 뒤에 난 소리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왜 구름이 몰려와 그 아름다운 광경을 삼켰습니까? 재 강조하지만 하나님께서 제자들에게 원하셨던 방향성은 초막 셋을 짓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을 듣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나머지 2명의 제자들은 이 광경에서 영원히 머무르고 싶었겠지만 하나님은 베드로와 제자들의 이 고백을 조각내셨습니다. 그 꿈을 깨뜨려 버렸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것은 ‘오직 예수만으로’ 만족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예수를 빙자하여 자신들이 좋은 것을 유지하겠다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올바른 방향성을 갖는다는 것은 내가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좋은 것을 택하는 것입니다. 내 만족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신앙생활이 아니라 자기만족을 위해 종교를 하나의 도구로 삼는 레저 활동에 지나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베드로는 초막 셋을 짓겠다고 했습니다. 분명히 토를 달았는데 그 초막 셋의 용도가 이렇습니다.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짓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고백한 것은 그 전의 전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슨 전제입니까? ‘여기가 좋사오니’입니다. 자기들이 이 산에서 경험하고 있는 것이 너무나 좋다는 것이 대전제입니다. 산 밑에 있는 사람들은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자기들과 함께 동고동락하고 있는 나머지 제자들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다만 지금 본인들이 경험하고 있는 현 상태의 영적인 엑스터시만 있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자기들의 영적인 상태만 좋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기도원에 올라가서 마약 주사만 맞으면 오케이입니다. 결국에는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는 말이 됩니다. 이것을 아신 주님께서는 구름으로 그 황홀한 광경을 덮어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진정한 크리스천은 내 말에 집중하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집중하여 그 분의 말씀을 듣고 사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회복되지 않는 한 교회도, 성도도 희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ad fontes 의 절정을 알려주는 본문의 마지막 절을 만나야 합니다.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구름이 와서 황홀한 광경을 삼키고 하늘에서 아들의 소리를 들으라는 명령이 떨어진 뒤에 일어난 현상을 마가는 마지막으로 어떻게 보고하고 있습니까?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보아야 하는 것은 예수님뿐이어야 합니다. ‘SOLUS CHRISTUS’로의 회귀입니다. 명심하십시다. 지금 나와 한국교회에 필요한 것은 엘리야가 아닙니다. 모세도 아닙니다. 적어도 우리들이 세상을 향하여 인정받고 한국교회가 총체적으로 잃어버린 신뢰를 다시 한 번 회복하기 위해서는 오직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아니, 다른 것이 보이면 안 됩니다. 오직 예수님 한 분만 보여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희망이 있고 정상적인 교회로 회복할 수 있습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찬송가 94장의 작곡가인 베벌 세어는 전 세계 선교사 대회에서 자기가 쓴 이 곳을 특별찬양으로 불렀습니다. I'd rather have Jesus than silver or gold. (나는 은이나 금보다 오히려 예수님을 갖고 싶습니다.) I'd rather be His than have riches untold. (나는 말 할 수 없는 재물을 가지기보다는 그분의 것이 되기를 원합니다.) I'd rather have Jesus than houses or lands. (나는 집이나 땅보다는 오히려 예수님을 갖고 싶습니다.) I'd rather be led by His nail pierced hand, than to be the king of a vast domain.(광대 한 영역의 왕이 되는 것보다 차라리 그분의 손에 찔린 흔적에 이끌리고 싶습니다.) Or be held in sin's dread sway, I'd rather have Jesus than anything. (또는 죄의 두려움에 휘말리기보다는 나는 무엇보다 예수님을 갖고 싶습니다.) 이 찬양이 끝나자 수많은 선교사들이 기립하여 아멘을 하며 그의 찬양을 높여주었습니다. 박수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베벌 세어는 박수가 끝나자 이렇게 인사하였습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제 부족한 찬양을 격려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보내주신 이 뜨거운 격려의 박수와도 내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바꿀 수 없습니다.” 목양터 이야기 마당의 글을 나누고 싶습니다. 지난 주 월요일, 황홍일 집사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휴가지로 떠나려는 데 받았습니다. 재발 이후, 3주 전, 수술실로 들어가기 전, 황 집사께서 제게 부탁한 기도 제목이 있었습니다. “목사님,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이 두렵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 기도 부탁을 드립니다. 하나님은 물론 생각나는 사람이 목사님 말고는 딱히 없습니다. 깨어날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수술 당일에 새벽기도 시간은 물론 그날은 온통 시간이 기도의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 완벽한 수술 뒤, 정상적으로 깨어나게 하옵소서!” 후에 기도의 응답을 받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은혜로 수술이 잘 되어 퇴원을 앞두고 있었는데, 지난 주 월요일 의식불명 상태가 되어 중환자실로 급히 들어갔다는 전화였습니다. 아내 되는 집사님이 통곡하며 제게 들려준 말이 이렇습니다. “목사님, 의사 말이 못 나올 것 같다고 해요.” 청천벽력의 전언을 받고 병원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만나지도 못한다는 말을 듣고 두 가지를 준비하고 휴가지로 떠났습니다. 상복과 장례예식서입니다. 하지만 너무 하나님께 속상해서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했던 저의 나약함을 인정하면서 서재에서 펑펑 울며 하나님께 대들었습니다. “하나님, 도대체 제게 너무 하시는 것 아닙니까? 왜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제게서 먼저 데리고 가시는 겁니까? 하나님, 장말로 너무 하시는 거 아닙니까? 하나님, 살려내세요!” 월요일, 휴가처에 도착해서 순간순간 마음속으로 화살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수빈이도, 수빈엄마도 남편과 아빠 없이는 안 됩니다. 하나님, 제발 살려주세요!” 화요일 아침에 아내 집사의 전화가 울렸습니다. 전화를 받으면서 얼마나 부들부들 떨었는지. 아, 장례식장으로 가야하나! “목사님, 수빈아빠가 기적적으로 의식이 돌아왔어요!” 순간, 너무 울컥해서 쏟아져 나오는 눈물을 머금으려고 애를 먹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누가 뭐래도 난 예수님 말고는 없습니다. 아무리 하나님께 화가 나도 난 예수님 말고는 없습니다. 박물관 신앙이라고 해도 나에게 예수 말고는 아무도 없습니다. 바울도 저와 같은 마음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는 이렇게 빌립보서 3:8-9절에서 고백했습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찬송가 94장을 부르고 기도합니다. 1.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2.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명예와 바꿀 수 없네 이전에 즐기던 세상 일도 주 사랑하는 맘 뺏지 못해 3.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 유혹과 핍박이 몰려와도 주 섬기는 내 맘 변치 못해 [후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