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ad fontes (1)
본문: 사무엘상 15:24-27
서론)
지난주 목요일 KBS 9시 뉴스에 방탄소년단이 출연했습니다.
대한민국의 메인 보도 방송 시간에 대중음악인이 나온다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인데 BTS가 게스트가 되어 출연한 것은 지금 그들의 인기가 얼마나 천정부지로 올라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실례일 것입니다.
미국 빌보드 핫 100 이라는 차트에 2주 연속 방탄소년단이 부른 다이너마이트라는 곡이 1위를 차지한 것을 두고 전 세계가 들썩이고 있을 정도로 BTS는 지금 전 세계의 스타덤에 오르며 기염을 토하고 있습니다.
젊은이들 사이에는 이 남성 아이돌 그룹은 이미 이름이 나 있는 뮤지션들이지만 저 같은 기성세대들은 이들이 노래를 부르는 방송이 나오면 리모컨을 다른 방송을 돌리는 관심외의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BTS의 선전이 얼마나 엄청나면 국영방송 메인 보도 채널 시간에 초대가 되고, 대통령까지 나서서 그들의 선전에 축하 메시지를 보낼까를 생각하면 분명 그들은 엄청난 국위 선양자임에 틀림이 없고 그들의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지난 목요일 KBS 9시에 뉴스에 출연한 그들의 대담 중에 제 기억에 남은 대화를 하나 교우들에게 들려드리겠습니다.
앵커가 물었습니다.
어려웠던 시절과 전 세계의 스타가 된 지금을 비교해 볼 때 변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까?
그러자 이렇게 질문을 받은 멤버 중에 한 명이 다음과 같이 답했습니다.
“팬들을 향한 마음과 음악을 대하는 마음입니다.”
무엇입니까?
기본에 집중하는 마음을 토로한 것입니다.
지금 BTS가 소유하게 된 물질적인 가치는 계산할 수 없는 가치입니다.
이미 음원을 통해 거두어들인 수익이나 코로나 19의 발생 이전에 전 세계 투어를 통해 그들이 벌어들인 경제적 효과는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들 때문에 생겨나는 부가가치의 창출은 현재진행이라는 점에서 ‘PRICELESS’ 즉 계산 불가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날 멤버들이 추억하며 말했습니다.
“무명의 시절, 합숙소에서 초파리를 잡았습니다. 돈이 없어 살찌면 안 되기에 눈물의 닭 가슴살만 먹고 버텼습니다. 지금은 먹고 싶은 것은 먹을 수 있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것은 팬들을 향한 마음과 음악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미리 약속한 대본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그날 이들의 말을 듣다가 정말로 중요한 한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ad fontes”입니다.
이 문구를 그대로 직역하면 ‘근본으로’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대중문화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대중들의 인기를 먹고 사는 자들이기에 대중들의 관심이 사라지면 하루아침에도 한 순간에 거품 빠지듯이 그 인기는 사라집니다.
이 점은 BTS도 역시 예외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보도 프로그램에 출연한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적어도 그들의 마음가짐이 이렇게 초심 혹은 근본, 末이 아닌 本에 기초두기를 잃지 않는다면 당분간 이들의 시대는 이어질 것이라는 조심스럽지만 대단히 고무적인 예측을 해 보게 되었습니다.
본론)
오늘 설교 제목을 ‘ad fontes(아드 폰테스)’라고 정했습니다.
‘ad fontes’라는 이 라틴어 문구는 종교개혁자들의 종교개혁 당시의 슬로건이었습니다.
아마도 이 외침은 가톨릭의 심대한 타락과 비성서적인 일탈들에 반기를 들었던 종교개혁자들이 본인들도 시간이 지나면 기득권적인 편리함과 안락함에 머물고 싶어 하며, 안주하고 싶어 하는 그런 타락한 자의 길로 다시 돌아갈 것에 대한 자기 침의 복종이었을 것입니다.
즉 원본 혹은 근본인 성경에서 결코 떠나서는 안 된다는 대단히 결기에 찬 외침이자 다짐이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ad fontes의 구체적인 실행 강령을 제시한 것이 그 유명한 5대 원리였습니다.
Sola Scriptura (오직 성경만으로), 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만으로), Sola Gratia (오직 은혜만으로), Sola Fide (오직 믿음만으로),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만)입니다.
코로나 19로 인하여 모든 일상이 무너진 오늘, 이로 인해 교회마저도 갈 길을 잃었다고 아우성치는 오늘 우리 세인교회와 지체들이 걸어야 할 지침인 ad fontes 에 대한 다섯 가지의 실천적 내용들을 5주에 걸쳐서 나누어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의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교회가 추구하고 사수해야 하는 근본, 그리고 돌아가야 근본이 무엇입니까?
※ Sola Scriptura (오직 성경만으로)로의 회귀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너무 익숙히 잘 알고 있는 본문입니다.
하나님과 사무엘과 사울 사이에 일어난 일화를 소개하는 기사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하나님은 사사시대 이후 왕을 세워달라는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빗발치는 요구를 들어주시기로 합니다.
다만 왕을 세웠을 때 일어나는 부정적인 일들에 대하여 경고하시는 것을 전제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는 왕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왕을 세울 것을 명하십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세운 초대 왕이 사울이었습니다.
가장 작은 베냐민지파 출신의 기스의 아들 사울을 왕으로 세우라는 하명을 받은 사무엘은 그에게 기름을 부어 고대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우게 됩니다.
이렇게 세워진 사울은 집권 초기 왕으로서의 사역을 그런 대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통치를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는 자기의 정권욕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하명을 무시하는 일례들을 행하기 시작합니다.
한 예로 블레셋과의 전투를 앞두고 언제나 먼저 하나님께 드렸던 번제의 제사를 번제 장소에 사무엘이 늦게 도착한다는 이유를 들어 본인이 직접 번제를 드리는 월권을 저지른 것을 비롯하여 오늘 본문이 배경이 되는 아말렉과의 전투는 사울 범죄의 압권으로 소개됩니다.
아말렉과의 전투를 진행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하명은 진멸이었습니다.
명령을 받은 사울의 반응을 사무엘상 15:9절은 이렇게 보고합니다.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
하명에 대한 정면 거부입니다.
후에 이것을 안 사무엘이 대노하여 하나님의 심정을 사울에게 전한 메시지는 사울의 폐위 예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폐위 선언 이후로부터 시작됩니다.
본문이 시작되는 24절에서 폐위 선언을 당한 사울의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급거 자기의 불순종을 인정하고 회개하고 사무엘에게 다시 하나님께 예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요청하지만 이미 하나님의 뜻은 정해진 뒤였습니다.
싸늘하게 냉정한 사무엘의 답변을 본문 26절이 전합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이 구절에서 연거푸 두 번이나 계속 쓰인 단어 ‘버려’에 집중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어 ‘마아쓰’의 번역으로 ‘버려’라고 기록했지만 이 단어의 원 뜻은 ‘업신여겨 거절한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본문 26절을 이렇게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겨 거절한 것처럼 하나님도 사울을 가볍게 여겨 거절하셨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26절에 두 번에 걸쳐 등장하는 이 단어를 거울삼아 대단히 중요한 영적 레마로 삼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인으로서의 삶이 언제부터 허물어질까? 를 살피는 것입니다.
말씀을 업신여기면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스워집니다.
말씀이 우스워지면 그 말씀을 존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지 않으면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으면 신앙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신앙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원인 제공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울이 저질렀던 말씀을 버린 것이었스ᅟᅥᆸ니다.
왜 종교개혁자들이 ‘ad fontes’ 를 주창하면서 제일 먼저 일순위로 ‘sola scriptura'를 제시했는지 이해가 되실 겁니다.
어느 책에선가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개에게 돌을 던져 개가 맞으면 개는 돌을 따라가 문다. 그러나 사자에게 돌을 던지면 사자는 돌을 따라가지 않고 던진 사람에게 달려들어 문다.”
이 글이 무엇을 시사합니까?
적어도 어느 한 영역에서 승리하는 삶을 사는 주인공들은 결코 본질을 상실하지 않는다는 깨우침을 주는 문장입니다.
성도가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말씀을 경솔히 여기는 행위입니다.
중세 가톨릭의 치명적인 죄악은 하나님의 말씀을 구미에 맞춰 교권에 유리하게 해석한 죄악입니다.
이것을 안 종교 개혁자들은 말씀을 업신여기지 않겠다는 발로로 ‘오직 성서만으로’를 실천 강령의 제 일순위에 올려놓은 것입니다.
지난주간 새벽예배 텍스트 중에 아모스 8장이 있었습니다.
새벽예배를 드린 교우들에게 전했던 8장 말씀을 다시 전 교우에게 전합니다.
아모스가 네 번째의 환상을 봅니다.
여름 과일이 담긴 광주리의 환상입니다.
이 환상은 여름 과일은 더 늦으면 먹을 수 없는 긴박성이 있는 과일을 의미하는 것처럼 북 왕국 이스라엘의 심판이 그만큼 임박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환상이었습니다.
이 환상을 보게 하신 하나님은 아모스 8:4-10절까지의 말씀에서 북 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의 이유에 대하여 상세히 전해 주십니다.
물리적인 힘으로 가난한 자를 괴롭히며, 다시 일어서지 못하도록 악한 일을 도모한 죄.
거짓 저울로 힘없는 자를 속이며 폭리를 취하고 불의한 이들을 착취한 죄.
월삭이나 안식일을 지키는 종교적인 행위를 하면서도 그때 드리는 제물을 마련하기 위해 가난한자들을 속여 판 이득으로 종교적 제물을 드리는 가증한 죄.
그렇게 얻은 재력으로 가장 값싼 대가를 지불하여 노예를 사들인 죄.
이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비수를 던지셨습니다.
아모스 8: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두고 맹세하시되 내가 그들의 모든 행위를 절대로 잊지 아니하리라 하셨나니”
잊지 않으신 결과물이 주전 722-723년에 임한 북 왕국의 멸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회적 죄악과 더불어 아모스를 통해 던지신 북 왕국을 향한 종교적 범죄에 대한 심판성 메시지는 우리 교우들에게 무거운 책임감을 고취시켜 줍니다.
그 유명한 메시지 아모스 8:11절을 귀에 담기를 바랍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여러 차례 말씀을 드렸지만 아모스 예언서의 배경은 주전 8세기 북쪽 이스라엘의 최고 번성기였던 여로보암 2세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국력도 최고, 군사력도 최고, 경제력도 최고의 시대, 그러니까 당연히 이 백성들이 양식이 없을 리 없고, 최고의 수로(水路) 시스템이 잘 되었던 시기였기에 물 부족을 느낄 때도 아니었음을 하나님도 인정하신 셈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결정적으로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나님은 아모스를 통해 천명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아모스 8:11절의 후반절에 담긴 이 말씀을 아주 신중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이 문장을 그대로 해석하면 이런 해석이 가능합니다.
북쪽 이스라엘에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이름으로 횡행되고 있었던 말들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해석을 가능하게 합니다.
도리어 너무 많았다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모스 7장에 기록되어 있는 기사가 이것을 강력하게 뒷받침 해 줍니다.
여로보암 2세 치하의 북쪽 이스라엘에는 소위 말하는 吉 예언자들이 지천에 깔려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작자가 아마샤가 아닙니까?
아마샤는 아모스와 한판 승부를 벌인 대표자로 발탁된 것뿐이지 이런 종류의 예언자들은 즐비했습니다.
직업적인 선지자들이 우글거리던 북쪽이었지만 결국 하나님과 전혀 관계를 맺지 못하던 그들이었기에 여호와의 말씀이라는 레테를 가지고 백성들을 속였지만 북쪽은 들을 만한 여호와의 말씀이 전무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모스에게 전언하셨던 말씀은 대단히 의미심장한 메시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금년 5월에 류호준 박사의 ‘교회에게 하고픈 말’을 만났습니다.
책을 읽고 난 뒤에 한 참을 멍하게 있었습니다.
이윽고 정신을 가다듬고 후기에 이런 사족을 남겼습니다.
“아픈 은혜를 받았다. 너무나도 아픈 은혜를”
그가 일갈한 비수 한 대목을 소개합니다.
“세속적 대류의 근저에는 ‘성경무지’(聖經無知)와 ‘성경무시’(聖經無視)라는 근원적 일란성 쌍둥이 병원체가 자리를 잡고 있다.”(류호준, “교회에게 하고픈 말”, 두란노, p,89)
이렇게 비수를 던진 류 박사는 먼저 저 같은 목사들을 향하여 아프지만 메스를 대는 부연 설명을 남겼습니다.
“설교를 위하여 성경을 사용하지, 정으로 돌을 다듬듯 성경의 가르침으로 자신의 영혼을 깎아 만들어가도록 허락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준엄한 가르침에 겸손하게 자신을 내어 맡기는 습관을 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위의 책,p,93)
단 한 자도 부인할 수 없는 사랑하는 후배 목사들에게 던진 노학자의 메시지는 눈물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거론할 이유가 없습니다.
바로 내가 그 공범자라는 생각에 쓰라지고 또 쓰라리고 또 쓰라렸습니다.
그리고 급기야는 바로 서겠다고 다시 다짐해 보았습니다.
이른바 성경무시는 불신앙적인 담대함을 갖고 자행하는 범죄 행위입니다.
이렇게 성경을 무시하는 자들에게 배운 신자들은 너무 당연히 성경무지의 늪에 빠지게 됨은 공식입니다.
책이 이런 글이 담겨 있습니다.
“늙은 개는 기술을 배우려 하지 않는다.” (위의 책 같은 페이지)
교회에서 무언가 직분을 받으면서 생기는 못된 버릇이 하나 있습니다.
더 이상을 배울 게 없다는 교만입니다.
지난 주간에 레슬리 뉴비긴이 쓴 “변화하는 세상 가운데 숨 쉬는 소망”을 독서했습니다.
인도 선교의 위대한 족적을 남긴 신앙의 선배가 남긴 어록을 보다가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제 마음을 일렁이게 한 한 부분을 소개합니다.
“C S. 루이스는 사람들의 교만함을 ‘연대기적인 속물근성’이라고 표현했다. 단지 20세기를 살고 있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과거에 살았던 이들보다, 심지어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있었던 이들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소위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에 나서고 있다.”(레슬리 뉴비긴, “변화하는 세상 가운데 숨 쉬는 소망”, 서로사랑 간, p,37.)
레슬리 뉴비긴이 이렇게 말한 이유는 ‘역사적 예수’ 대한 비평적 성찰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그의 이 글을 읽고 난 뒤에 밑줄을 그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무대뽀식으로 강변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런 지성적 성찰과 공부를 하지 않고 반대편의 말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소위 말하는 반지성주의의 횡포로 이렇게 일갈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담았습니다.
레슬리 뉴비긴은 이렇게 말하기까지 자기의 입장을 분명히 선언합니다.
“역사적 예수는 계몽주의 운동의 합리주의적인 입장에서 바라본 모습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역사적 예수는 믿음의 그리스도이시며, 오직 한 분이신 예수님이시다.” (위의 책, p,58)
내가 아는 뉴비긴은 보수도, 진보도 함께 인정하는 선교신학자입니다.
왜냐하면 양쪽에서 그를 이렇게 평가하는 이유는 성경에 대하여 무시해 공부하지 않는 선교사가 아니라 성경을 그 무엇보다 존중해 공부하는 선교사였고, 인도라는 선교 현지에서 서구 문명적, 문화적 우월감이나 폭력적 서구의 선교마인드에 빠져 성경을 힘으로 접목한 선교사가 아니라 가장 낮은 자의 모습에 서서 전혀 성경에 입각하지 않은 폭력으로 본인의 조국인 영국이 인도에 대하여 자행했던 일체의 일에 반대하며 인도를 섬겼던 다시 말해 성경을 무시하지 않은 삶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재 강조하지만 ‘ad fontes’ 정신의 제일 순위는 ‘오직 성서만으로’였습니다.
적어도 한국교회가 다시 일어서려면 Sola Scriptura의 정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경을 무시하거나, 성경에 대하여 무지한 한 한국교회는 다시 일어서지 못합니다.
형식적인 구호가 아닌 정말로 성경의 진리에 사로잡혀 성경대로 살기를 다짐하는 그 근본정신인 ad fontes의 삶을 이루어 갈 때만 한국교회는 다시 살 수 있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저는 이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세상이 교회를 염려하는 시대라는 말은 이제 희귀성 멘트가 아니라 현실입니다.
해서 교회가 집중하려고 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세상 버전에 부합한 교회를 만들까에 천착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느 경우에 세상이 무엇을 교회에 원하는가에 대한 코드를 못 읽어서야 되겠습니까?
하지만 이것보다 더 경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에 무지하여 성경을 무시하는 절망입니다.
저는 지난 수요일 설교인 욥기를 마감하는 강해에서 욥기 공부의 결론을 이렇게 맺었습니다.
“성경적인 일체의 교훈들을 내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지 말고, 하나님의 실존적 영역이라는 여백을 존중하는 것이 신앙이다.”
이 교훈의 맥은 결국 성경에 무지하지 말며, 성경을 무시하지 말라는 권면이기도 한 것입니다.
바라기는 나는 세인교회를 포함한 한국교회가 성경의 근본을 다시 붙드는 ad fontes 정신의 교회가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나 지금은 비록 땅을 벗하며 살지라도 내 영혼 저 하늘을 디디며 사네
내 주님 계신 눈물 없는 곳 저 하늘에 숨겨둔 내 소망 있네
보고픈 얼굴들 그리운 이름들 많이 생각나
때론 가슴 터지도록 기다려지는 곳
내 아버지 넓은 품 날 맞으시는 저 하늘에 쌓아둔 내 소망 있네
주님 그 나라에 이를 때까지 순례의 걸음 멈추지 않으며
어떤 시련이 와도 나 두렵지 않네 주와 함께 걷는 이 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