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오늘은 하박국이 더 필요합니다.
본문: 하박국 1:12-2:1
서론)
베드로는 예수님과 3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동고동락한 제자였습니다.
동고동락하면서 베드로는 갈릴리에서 사셨던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행하셨던 일체의 사역들을 눈으로 보고 느끼고 체감했던 사람입니다.
더불어 그는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지역에서 그 유명한 신앙고백, 주는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 고백을 행함으로 천국의 열쇠를 거머쥐는 행운아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은혜의 수여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을 부인한 배은망덕의 대명사가 되는 추락도 경험한 소위 시쳇말로 천국과 지옥을 오고가며 산전수전 공중전을 경험한 베테랑 신앙의 이력을 갖고 있는 자였습니다.
이렇게 좌충우돌하며 불안 불안했던 그가 우여곡절 끝에 예수께서 승천하시고 맞이한 첫 번째 오순절 날, 전인격적인 성령의 체험을 하고 온전한 주님의 제자로 거듭났습니다.
이후 그는 예수를 죽이는 데에 공범의 죄를 범했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을 향하여 불같은 사자후의 설교를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의 핵심적인 사자후가 무엇이었는지를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22-24절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소위 말하는 예수님의 사역 내용 즉 캐리그마를 거침없이 전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전한 캐리그마 설교의 압권은 사도행전 2:36절입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이 설교를 마치자 베드로가 전한 불의 소리를 들었던 당사자 즉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던 자들과 불과 얼마 전, 나사렛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던 그들 중에 상당수의 사람들이 반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사도행전 2:37)
여기에 ‘찔려’ 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 ‘카타뉫쏘’는 ‘아주 예리한 송곳으로 찌른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NASB 성경에는 이 단어를 ‘pierce’ (꿰뚫다. 관통하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이런 예리한 아픔을 느낀 유대인들이 베드로에게 말한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우리가 어찌할꼬?”였습니다.
유대인들의 질문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이 질문을 받은 베드로가 뭐라 답변했습니까?
사도행전 2:38절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기독교 교리의 함축 판 메시지가 바로 베드로의 응답이었습니다.
이 메시지에 응답은 우리가 곧잘 초대교회 부흥의 대명사로 이해하는 3,000명의 회심이었고, 그 결과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다고 기록함으로서 사도행전 2장을 해피엔딩의 스토리로 적시하고 있습니다.
셀 리더들의 비대면 성경공부의 텍스트로 사용하고 있는 강영안 교수의 ‘믿는다는 것’을 보면 그는 이렇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굳건한 믿음은 물음(질문)에서, 그리고 물음에서 비롯된 열망에서 시작합니다. 찾아 나서지 않고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강영안, “믿는다는 것”, 복 있는 사람 간,p,56.)
제가 이 담론을 설교의 서두에 끄집어낸 이유는 오늘 본문의 주인공이 이렇게 하나님께 질문하고 있는 사람임을 공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본문의 주인공은 하나님께 그냥 상투적으로 질문한 사람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을 갖고 사생결단, 주기철 목사님의 표현으로 말한다면 일사각오의 심정으로 질문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해 본문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본론)
오늘 우리는 믿는 그리스도인들조차 잘 보지 않는 하박국 예언서를 본문으로 읽었습니다.
하박국이 누구입니까?
정경으로서의 성경 하박국 안에서 얻을 수 있는 하박국의 정보는 그가 예언자 (나비)라는 것 말고는 없습니다.
다만 그가 옛 이스라엘 예언의 전통과 시가(詩歌) 전통에 능한 사람이었다는 정도로만 접근하는 것이 위험하지 않은 그에 대한 해석입니다.
구약 정경 이외 (외경 ‘벨과 큰 뱀의 이야기’, 주후 1세기 작품인 위경 ‘예언자의 생애’, 주후 2-3세기의 작품인 유대교 문헌 ‘세데르 올람 랍바’, 주후 1,300년경에 쓰인 유대교 신비주의 문헌인 ‘세베르 하조하르’ 등등에 여러 가지의 하박국에 대한 소개가 등장한다.) 해석은 조심해야 할 이유가 있어서 생략하겠지만 하박국이 예언자였다는 사실 하나만 갖고서도 우리는 오늘 본문 성경을 통한 교훈 찾기에 충실할 수 있을 것 같아, 본문 정경 안에서 주시는 레마를 찾고자 합니다.
예언자 하박국은 하박국 전편에서 하나님과 적극적으로 대화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고무적인 은혜를 먼저 생각해 낼 수 있습니다.
특히 시작하는 1장은 전체가 하박국이 하나님께 질문하고 하나님은 답하시는 형식입니다.
첫 번째, 두 번째 질문의 시작은 대단히 은혜로운 시작이었습니다.
① 첫 번째 질문입니다.
1:2절을 볼까요?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박국은 하나님께 드린 첫 번째의 질문의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은 왜 내 부르짖음에 무관심하신가?”였습니다.
지금 유다의 죄가 극심해서 내가 하나님께 뭔가를 중보하려고 하는데 하나님이 듣지 않으신다는 불만의 질문이었습니다.
해서 하박국은 강도를 높여 두 번째로 하나님께 질문했습니다.
② 두 번째 질문을 살핍니다.
본문 3절입니다.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결국 하박국은 유다의 패역함을 이대로 지켜보고 계실 거냐는 항변의 질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언자의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5-11절에서 이렇게 답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여러 나라를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지어다 너희의 생전에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할 것이라 누가 너희에게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리라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이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가 아닌 거처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그들은 두렵고 무서우며 당당함과 위엄이 자기들에게서 나오며 그들의 군마는 표범보다 빠르고 저녁 이리보다 사나우며 그들의 마병은 먼 곳에서부터 빨리 달려오는 마병이라 마치 먹이를 움키려 하는 독수리의 날음과 같으니라 그들은 다 강포를 행하러 오는데 앞을 향하여 나아가며 사람을 사로잡아 모으기를 모래 같이 많이 할 것이요 왕들을 멸시하며 방백을 조소하며 모든 견고한 성들을 비웃고 흉벽을 쌓아 그것을 점령할 것이라 그들은 자기들의 힘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는 자들이라 이에 바람 같이 급히 몰아 지나치게 행하여 범죄하리라”
한 마디로 말하면 내가 유다에게 생전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무시무시한 심판을 내리겠다는 경고였습니다.
표범 같고, 저녁 이리보다 사납고, 먹이를 낚아채는 독수리처럼 민첩함까지 갖춘 갈대아 사람을 선택해서 멸망시키시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시며 답하셨습니다.
그러자 이제는 예언자 하박국이 급해졌습니다.
본문 12-17절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하박국이 겁을 먹고 이렇게 재차 하나님께 질문겸 하소연을 합니다.
③ 세 번째의 질문이 13절입니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13절)
④ 이어 네 번째의 질문이 나옵니다. 본문 17절입니다.
“그가 그물을 떨고는 계속하여 여러 나라를 무자비하게 멸망시키는 것이 옳으니이까” (17절)
종합하면 이런 질문이 됩니다.
내가 당신이 택한 백성들의 죄를 고발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갈대아 즉 바벨론이라는 유다보다 더 악한 나라를 사용하셔서 당신의 백성들을 멸망시킨다는 것이 말이 되냐는 항변이자 이제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말라는 간청을 포함하여 하나님께 질문한 것입니다.
아마도 하박국은 자기가 한 말이 있었기 때문에 대단히 겁을 먹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대로 행하시면 대참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말을 내뱉어놓은 하박국은 대단히 염려하는 마음으로 본문 2:1절에서 그 절박한 심정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
점잖게 표현한 글이지만 그 안에 내포되어 있는 하박국의 절박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타들어가는 마음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이 내 간절한 간구를 들어주실 지를 보기 위해 눈 크게 뜨고 성루에 올라가서 지켜보겠다는 반 협박이었습니다.
안 들어 주시면 안 된다는 시위를 벌인 것입니다.
2:1절에 기록된 ‘보려고’ 라는 단어에 저는 아주 중요한 관심을 가져보았습니다.
예언자는 귀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쉐마) 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귀로 들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대신 말하는 자가 예언자 나비입니다.
그런데 오늘 2:1절에서는 듣지 않고 보겠다고 아주 의도적인 예언자의 행위를 저자가 기록합니다.
무엇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었을까요?
하박국의 태도가 수동적일 수 없다는 사태의 긴박성을 알려주는 단어로 ‘보려고’를 사용한 것입니다.
또 하나의 단어는 히브리어 ‘칩파’ 즉 ‘기다리다’라는 단어가 주는 중요성입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의 철회를 반드시 받아내겠다는 의지가 이 단어 안에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철회하지 않으면 이 망루에서 내려가지 않겠다는 시위와 엄포, 그리고 결단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말 그대로 사생결단, 일사각오의 심정이었다는 말입니다.
하박국이라는 예언서에 관심이 있는 성도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어떻게 나왔는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박국 2:2-4절이 하나님의 답변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구절을 공동번역 성경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야훼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가 받은 말을 누구나 알아보도록 판에 새겨라. 네가 본 일은 때가 되면 반드시 이루어진다. 끝 날은 반드시 찾아온다. 쉬 오지 않더라도 기다려라. 기어이 오고 만다. 멋대로 설치지 말라. 나는 그런 사람을 옳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의로운 사람은 그의 신실함으로 살리라.”
어떤 의미로 보면 하박국이 원하는 요청에 대한 하나님의 거부 메시지입니다.
단지 하나님이 하박국에게 여백을 남겨 두었다는 사실로 하박국은 아쉬움을 달래야 하는 하나님의 단호하신 통보입니다.
그런데도 오늘 저는 이 메시지가 저의 절박한 목양의 심정을 교우들과 나누기에 적합한 요소를 갖추었다고 믿었기에 교우들에게 담임목사의 영적 소회를 설교의 레마로 전하고자 합니다.
※ 무너져 가고 있는 교회를 보며 하박국이 가졌던 동통(同通)의 마음을 갖고 있습니까?
어느 정도로 아파합니까?
높은 망루에 올라가서 눈을 부릅뜨고 주님께 따졌던 하박국의 심정으로 아파합니까?
“하나님, 나는 하나님께서 내 요구에 응답해 주시지는 눈을 크게 뜨고 기다릴 것입니다.”
이 집요한 아픔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그건 목사님이나 하는 일이고요, 나는 평신도니까 그 일에 대해서 그렇게 큰 관심이 없습니다.”
이렇게 피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몇 달 전, 우리 교회 지체의 자녀 중 한 명이 신천지 집단의 교묘한 유혹에 빠져서 문턱에 섰다가 우리 교회 부교역자의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케어에 힘입어 다시 바로 서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 자녀의 부모와 잠간 담소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지체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자칫 잘못했으면 자녀를 영적으로 잃을 뻔 한 위기일발에서 빠져 나오게 된 안도의 눈빛을.
코로나 19 이후 한국교회의 정황을 예측하는 사이트의 글에서 이런 비관적인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교회 반 토막, 신자 반 토막”
여러분 가운데, 나는 목회자가 아니고, 나는 목회를 하는 자녀가 없으니까 그러든지 말든지, 방관의 자세를 견지하는 자가 혹시 있습니까?
그것이 얼마나 크고 어리석은 짓인지는 알고는 있습니까?
장년 교우 여러분!
잠시 추억에 잠겨 보십시다.
아주 오래전, 그대들이 휘청거릴 때 있었지만 그래도 어줍지 않게 지금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잃지 않고 다시 오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기대하며 살 수 있었던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비록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그래서 무식하기에 짝이 없었던 부모님들이었지만, 그대들의 그 부모님들이 가난하기 짝이 없어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는 교회에 나와 입을 열어 기도할 때 그대들의 신앙적인 승리를 위해 그 입김이 얼어붙는 고통을 머금고 중보 했기에 그대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습니까?
가난하기 그지없어 냉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는 열악한 환경이라도 마음 놓고 그대들을 위해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교회가 있었기 때문인 것을 알고는 있습니까?
당신들의 승리를 위해 눈물로 중보했던 주의 종들이 있었기 때문인지는 알고는 있습니까?
그런데 매우 유감스럽게 이제 10. 20년 뒤에 이런 소중한 교회가 사라진다는 데에 느낌이 없다면 그게 정상입니까?
내 자녀들이 그래도 이 미친 세상에서 버틸 수 있게 만들어준 유일한 보루가 교회인데 그 교회가 사라질 수 있는 그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신자가 제대로 된 신자입니까?
이제 불과 10, 20년 뒤에 당신의 자녀와 손자손녀들이 삶의 일탈 속에서 유일하게 기대를 걸고 붙들 수 있는 보루인 교회가 이 땅에서 사라진다는 데, 손 놓고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언젠가 우리 교회의 교육 담당 교육자 청빙이 하늘에서 별 따기로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은 지체 한 명이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게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손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제 손자가 주일학교에 다닐 즈음, 교회학교가 없는 우리 교회가 되는 것은 상상하기도 싫습니다. 교육전도사 사례가 부족하면 더 많이 월급을 주어서라도 교회학교를 살릴 교역자를 청빙해야죠. 교회학교가 없는 우리 교회 끔찍합니다.”
정말로 끔찍하십니까? 세인 교회 지체들에게 선포합니다. 아파해야 하는 것이 무엇이어야 합니까?
교회학교가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사라진다는 것에 아파해야 합니다.
언제? 먼 미래? 아니요, 코로나 19 이후라는 아주 가까운 시기에.
지금 우리 세인 교회에 누가 필요합니까?
하박국이 필요합니다.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지난 주간, 광고를 통해 대면 오프라인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기막힌 상황이 벌어졌으니, 개인이라도 교회에 나와서 작금의 교회 현실과 개인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라고 광고했습니다.
누가 순종했습니까?
하박국은 유다의 범죄를 인정했습니다.
해서 그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몰라라하는 유다에 대하여 하나님의 일하심 즉 만지심을 기대했습니다.
재 강조하지만 그래서 하박국은 앞서 설명 드린 대로 ①②의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하나님, 유다를 이대로 두실 겁니까? 야단 치셔서 돌아오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예언자적인 소명의 진정성이 하박국에게서 보입니다.
이렇게 유다를 그대로 방관하시겠냐는 질문에 하나님은 갈대아 사람 즉 바벨론을 들어 멸하시겠다고 그의 기도에 즉각적으로 답변하셨습니다.
이 놀랍고 또 놀라운 답변을 받은 하박국은 기절할 만큼 충격을 받습니다.
하박국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첫 질문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이제는 유다의 보호를 위해 옷소매를 걷어 올리고 긴급함으로 다시 하나님께 ③④를 따지며 질문합니다.
“아니, 하나님! 제가 조금 걱정이 돼서 적당히 야단이라도 쳐서 올바른 방향으로 선회하라고 한 것을 갖고 이렇게 박살을 내서야 되겠습니까? 하나님, 이건 아니죠? 당장 생각을 거두어 주세요!”
저는 하박국의 이 갈급하고 절절한 동통(同通)의 영통(靈通)을 내내 앓았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앓고 있습니다.
지난 주간, 너무도 급한 기도제목이 생겨서 그 기도제목의 응답을 놓고 하박국의 심정으로 가슴앓이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새벽에 설교를 마치고 기도하는 시간이 되면 그 가슴앓이 때문에 눈물을 닦습니다.
창세기 32장에 무슨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까?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는 야곱의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것처럼 야곱이 이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야곱에게 져주셔서 야곱은 이스라엘이 될 수 있었고, 형 에서로 임해 일할 죽음의 위기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했던 야곱의 최상의 선택이 무엇이었습니까?
말 할 것도 없이 하나님과 벌인 씨름 한 판이었습니다.
진짜 이만기와 강호동이 붙었던 씨름입니까?
그럴 리가요.
‘씨름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아바크’는 어원적으로 먼지에 쌓여 안 보일 정도로 상대방에게 떨어지지 않으려는 ‘간절한 붙듦’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야곱이 하나님의 천사를 그렇게 간절하게 붙들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간절하게 하나님의 천사를 붙들었던 장소가 어디였습니까?
얍복(야보크)입니다.
번역하면 퍼붓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천사를 만나기전에 야곱에게 야보크는 걱정, 근심, 두려움 등등이 폭우처럼 쏟아지고 퍼붓는 절망의 땅이었습니다.
그런 그곳에서 먼지가 날 정도로 결코 놓지 않겠다는 일사각오의 심정으로 하나님의 천사를 붙든 끝에 얻은 이스라엘이 된 야곱은 그 땅의 이름을 ‘브니엘’ 즉 ‘하나님의 얼굴’이라 고쳤다고 창세기 32:31절이 보고합니다.
절망의 땅이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희망의 땅으로 바뀌었다는 보고입니다.
다시 마지막으로 본문 하박국에게로 시선을 돌리겠습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에게 자신의 간절한 요구를 들어달라고 망루에 올라가서 압박합니다.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그러니 유다를 바벨론의 손에 맡기지 마십시오. 유다가 악하지만 더 악한 바벨론에게 망하지 않게 하옵소서!”
하박국은 야보크의 밤이 두려워 망루에 올라가서 눈을 크게 뜨고 하나님의 뜻 철회를 지켜보겠다고 하나님께 승부수를 던진 것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교회는 야보크의 상황입니다.
무너져 내리고 있기에 말입니다.
망루에 올라갈 하박국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합니다.
지금 망루에 올라가 한국교회를 용서해 달라고, 한국교회를 다시 살려달라고 외칠 이 땅의 하박국이 그 어느 때보다 더 절실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온통 흑암이 뒤덮어 갈 길을 찾지 못할 때, 문 닫힌 교회 때문에 절망하는 날이 오지 않도록 당신이 하박국이 되십시오.
여러분의 손자손녀들이 도대체 무엇이 옳은 삶이고 그릇된 삶인지 방향조차도 알지 못하는 기막힌 세대를 살면서 살려달라고 눈물을 흘릴 때,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손 붙잡아주는 교회가 남아 있도록 오늘 당신이 하박국이어야 합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야보크의 절망에 있는 한국교회를 위해 망루에 올라가십시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께 하박국처럼 눈을 크게 뜨고 기도하십시다.
대한민국의 교회를 다시 살려달라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박국의 외침과 간절한 절규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때입니다.
당신이 하박국이어야 이 땅에 교회가 브니엘이 될 수 있습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우리에겐 소원이 하나 있네
우리에겐 소원이 하나 있네 주님 다시 오실 그 날까지
우리 가슴에 새긴 주의 십자가 사랑 나의 교회를 사랑케 하네
주의 교회를 향한 우리 마음 희생과 포기와 섬김과 고난
하물며 죽음조차 우릴 막을 수 없네 우리 교회는 이 땅의 희망
교회를 교회되게 예배를 예배되게 우릴 사용하소서
진정한 부흥의 날 오늘 임하도록 우릴 사용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