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4일 월요일 성서일과 묵상 watch to carefully 오늘의 성서일과 시편 75편, 나훔 1:1-13, 계시록 14:12-20, 시 편139:13-18, 창세기 32:3-21 꽃물 (말씀 새기기) 나훔 1:1 니느웨에 대한 경고 곧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 마중물 (말씀 묵상) 구약학자들이 성서해석의 곤란함을 호소하는 소 예언서 중에 하나가 오늘 성서일과인 나훔이라고 동의한다는 것을 어느 세미나에서 들은 적이 있다. 나훔에 대한 이해를 위해 나훔 내증이 주는 자료들이 여타 다른 예언서에 비해 극히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예언자의 이름과 고향 정도, 그리고 내용 자체가 니느웨에 대한 가차 없는 멸망을 선포한 정도가 전부다. 주전 7세기 예언자라는 것도 니느웨에 대한 경종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기 때문에 추론하는 정도다. 물론 나훔 3:7-11절은 나훔 예언서를 읽는 독자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부여해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타 다른 예언서에 비해 나훔 강해를 할 때, 2차 자료의 빈곤을 경험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하지만 오늘 성서일과로 택한 1:1절을 통해 나훔이 전하고자 했던 예언의 소리로 교우들과 영적 의미를 공유했던 것 같다. 히브리어 두 단어 때문이었다. 하나는 ‘경고’로 번역된 ‘마싸’와 ‘묵시’라고 기록된 ‘하존’에서 그 의미를 찾았다. 나훔에 야훼로부터 받은 신탁은 두렵고 떨리는 ‘마싸’였다. 왜 아니 그러겠나 싶다. 주전 7세기 이스라엘은 백척간두의 위기 앞에 있었다. 최대의 강대국 신 앗시리아는 이스라엘이 감당할 만한 카운터 파트너가 아니었다. 이미 게임이 진행될 수 없는 막강한 위협 자체였고, 짐이었다. 그런 앗시리아에게 전해야 하는 야훼의 신탁은 그들의 멸망이었다. 왜 경고라는 단어를 히브리어 ‘마싸’로 기록했을까 십분 이해되는 부분이다. 아마도 예언자 나훔이 무시무시한 짐을 경고라고 해석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야훼께서 시분초마다 주시는 ‘하존’을 의지했기 때문이다. 설교 준비 때 참고하는 9개의 영어성경 버전에 한곳도 예외 없이 ‘묵시’ 즉 ‘하존’을 ‘vision’이라고 번역했다. 시의적절하다. 어느 주석서에서 ‘하존’이 ‘무엇을 보다’라는 의미의 ‘하자’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단어이기에 때문에 이렇게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 저자가 글을 담아두었다. ‘watch to carefully’ 시대가 암담할 때 야훼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는 말씀, 조명은 더욱 선명하다. 당신의 백성들을 위한 배려다. 중요한 것은 내가 주께서 주시는 ‘마싸’를 ‘하자’로 민감하게 느끼고 있는 영혼의 촉수를 갖고 있는가이다. 그러므로 나의 삶의 정황을 만들고 있는 바로 ‘지금 여기’(here and now)에서 얼마나 영적 민감성을 갖고 사느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너무 중요한 미션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얼마나 민감한 영적 긴장감을 갖고 사는가에 답해야 한다. 두레박 (질문) 나는 주님이 보여주시는 ‘하존’에 영혼의 촉수를 드리우고 있는가? 손 우물 (한 줄 기도) 둔감하라고 종용받는 시대입니다. 하나님, 굴복하지 않게 하옵소서. 이 공포에 굴종하지 않게 하옵소서.
나비물 (말씀의 실천) 오늘도 내게 조명해 주시는 묵시에 대해 철저하게 반응하자. 하늘바라기 (중보기도) 오늘 골절상을 당해 수술을 앞두고 있는 지체가 있습니다. 수술 현장에 함께 들어가셔서 지체를 위로해 주시고 안아 주십시오. 더불어 집도하는 이들이 실수하지 않게 하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