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보이지 않는 위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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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여름 언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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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4-10-11 18:26: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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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0월 6일자에 상당히 의미 있는 창간 기획 진단이 실렸다. 당신은 지금 어떤 사회에 살고 있는가? 이 질문을 던진 경향신문의 의도는 한국 사회는 ○○ 사회이다. 진단하고 싶은 의도에서였다. 서울에 거주하는 한 평범한 1남 2녀를 둔 50대 초반의 가장인 아무개씨 가정의 24시간을 추적한 결과 나온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시대는 절망적이었다. 대입을 위하여 일찍 등교하는 큰 딸이 바라보는 사회는 절벽사회였다. 가장인 아빠가 달고 있는 노란 리본은 위험사회를 알린다. 맞벌이 부부의 생존을 위한 출근은 피로 사회임을 암시한다. 강남을 연고로 하는 대학 동기생들 전부가 거의 해외로 유학을 나간 상태인 아들이 바라본 사회는 영어사회였다. 자가 영업을 하는 가장인 아무개씨가 직원들과 날마다 외치는 손님은 왕이라는 슬로건을 뒤돌아보면 그의 사회는 감정 사회다. 아들은 집에 돌아와 다시 스펙을 쌓기 위한 공부에 박차를 가한다. 이로 인해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포기해야 했다. 잉여 사회에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이다. 둘째 딸은 학교에서 돌아와 거침없이 들고 있는 스마트폰과 연애를 한다. 카톡, 페이스북, 웹툰, 유투브를 오가며 손에서 스마트폰을 떼지 못한다. 둘째 딸에게는 대한민국은 중독사회다. 큰딸은 학교에서 학원으로 이동한다. 흐릿한 눈으로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하여 학원가에서 선생들이 말하는 영어 단어를 하나 더 외우려고 머리를 쥐어 감싼다. 그녀에게 저녁 시간은 학벌 사회이다. 늦은 저녁 시간에 돌아온 맞벌이 부부는 더운 날씨에도 창문을 활짝 열지 못한다. 소위 말하는 집주인들의 담과 맞대고 있는 저택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저택은 지대가 낮아 모기가 해가 지면 들어온다. 그들은 지금 주거신분 사회에서 산다. 극단의 표현이라고 항의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 역시 앞에서 설명한 아무개씨의 일상에서처럼 그리 자유롭지 못하는 것이다. 10월 독서를 위하여 몇 권의 책을 주문했다. 제일 먼저 손에 든 책이 ‘반란의 조짐’이었다. 이 책은 내가 구독하는 시사 IN의 기자가 추천한 책이다. 지금 박근혜 정부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아주 불온한 책이다. 이유는 간단한다. 보수적인 정권하에서 극좌 편향을 갖고 있는 자가 쓴 책이라면 색깔논쟁으로 치부하여 폄훼하면 간단할 텐데 이 책은 극좌향적 사고를 갖고 있는 자가 쓴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리어 아나키스트적인 성향의 누군가들(?)에 의해 주장된 글들이기에 제목은 ‘반란의 조짐’이지만 물리적인 혹은 무기를 들고 폭력을 자행하여 정권을 탈취하는 소위 말하는 공산주의적인 코뮌들의 반란이 아니라 극히 평범한 것 같은 삶을 유지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우리 시대의 비극적인 사회에 대하여 거침없는 선의(善意)의 반란을 감행하라는 지침서이기에 더 불온해 보인다. 서평자는 개인적으로 폭력을 전제한 코뮌들의 공격적 성향에 신물이 나 있다. 심지어 정말로 주목할 ‘역사적 예수’에 대한 고찰과 연구를 오늘의 교회 현장에서 아주 현실적으로 적용하여 아름다운 기여를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부라고 이야기를 할 수는 없지만 과격한 진보(보수에서 말하는 종북 세력-인정하지는 않지만)들의 공통분모가 어쩔 수 없는 폭력과 적당한 테러 등등의 방향성으로 나아갈 때 실망을 금할 길이 없던 차에 ‘반란의 조짐’은 개인적으로 나에게 많은 도전과 가르침과 방향성을 제시해 주었다. 책을 시작하는 머리말에서 이 책은 번역자에 의해 테러리즘의 매뉴얼이라고 덧붙임을 당했다. 테러리즘이라는 단어의 고정의식으로 인해 부정적인 접근을 하는 분들에게 말한다. 선입견으로 이 책을 읽지도 않고 판단하는 미련함은 버리시는 것이 좋을 듯. 미국의 전원책, 문창극 정도로 보면 괜찮은 글렌 벡이 내가 읽어본 책 중에서 가장 사악한 책이라고 불온함을 지적했지만 그러나 꼭 한 번 반드시 읽어보아야 할 책이라고 말할 정도로 무언가의 무게감을 여운으로 남겨 둔 이 책을 지성인들이라면 좌우와 상관없이 한 번은 읽어보아야 할 것 같다. 특히 보수적 성향이 많은 목회자들은 더 더욱. 단테의 신곡의 구조를 이미테이션해서 7개의 동심원으로 구분한 이 시대의 절망들을 1부에서 아주 예리한 필채로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적절한 고발과 더불어 저자군 (著者群)은 맞설 수 있는 대안을 2부에서 제시한다. 이 대안은 마땅히 반란이다. 그러나 반란(VIENT)을 전술했듯이 폭력적으로 고정화되어 있는 폭력의 도구로 이해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 책의 저자들로 보이는 보이지 않는 위원회의 주인공들이 아니키스트들이기 때문이다. 저자군은 지금의 국가 체제를 깨기 위해 공산주의적인 코뮌이 아닌 아나키스트적인 코뮌을 형성할 것을 제시한다. 이 말은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의 입장에서 볼 때 좌든 우든 지금의 위기와 무너짐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아님을 분명히 한 것이다. 심지어는 책의 저저군은 공산주의를 우리의 최고의 적이라고까지 강하게 비판한다. 서평자가 저자군의 일설에 주목하는 것은 책의 저자들이 말하는 아나키즘적인 코뮌을 지지해서가 아니다. 목사로서 도리어 책에서 말하는 망가져 대안이 없는 단테가 시사하고 있는 일곱 개의 지옥의 동심원과 같은 이 땅의 모순과 공평하지 않음과 정의롭지 못함에 대한 치료가 물리적, 정치적, 군사적 힘의 우위를 통한 또 다른 세력의 등장으로 보지 않고 그 유일한 대안이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신앙 공동체로의 회복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펀더멘탈리스트가 아니다. 나는 축자영감을 주장하는 보수꼴통은 더더욱 아니다. 나는 광신적인 신자도 아니다. 다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텅 빔’ 이라는 절망의 치유는 텅 빔 속에서 성령의 영으로 충만을 주시는 하나님의 나라에서만 가능하다고 믿는 소시민적인 현장 목회자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책을 세밀하게 읽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유는 주마간산으로 읽으면 이해하기 쉽지 않은 책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 아나키스트적인 코뮌을 저자군은 혁명적으로 선동한다. 그들의 입장을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에 대한 한 편의 지지 입장이 아니라는 점에서 동의한다. 그러나 그들이 궁극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코뮌의 형성을 통한 체제의 전복은 지지할 수 없다. 그 또한 이루어질 수도 없겠지만 이루어진다 해도 또 다른 조직에서 행해지는 불완전한 대안일 것이기 때문이다. 도리어 나는 그들이 말하는 이상적인 코뮌이 교회 공동체라고 믿는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이 나라에 대한 교회는 이미 온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더 많이 가르치고 그래서 이 땅에서 하늘처럼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더 많아지도록 몸부림치는 지향도로 변환해 주어야할 것을 나는 책을 읽는 내내 더 간절함 마음으로 기대해 보았다. 목사들이 읽기에는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오늘의 시대를 정의하면서 섭렵해 볼 만한 수작이다. 최고로 불온한 테러리즘의 교과서에서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배웠다. 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 사회다. 라는 정의를 하면서 이렇게 진단되기를 소망해 본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넘실거리는 사회이다.” 보이지 않는 위원회저, 반란의 조짐, 여름 언덕, 2011년 2014년 10월 6일 오후 5시 40분 즈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