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김대식, 김두식 공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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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창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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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4-05-28 18:31: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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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 김두식 공저, ‘공부 논쟁’ (창비)을 읽고 국민은 어떤 경우 참 단순하다. 대세를 따르기 때문이다. 국가권력은 대세를 잡으면 국민들을 통치하기가 그래서 쉽다. 아, 물론 근대사적인 시기에 그랬다는 것이다. 헌데 근래에도 이런 위상들은 있었다. 명비어천가!, 박비어천가! 등등이 증거이다. 역사는 성공한 자의 궤도로 가지 않고 언제나 바른 것을 향해 달려가는 데도 말이다. 이 일은 주후 4세기, 로마 제국에서도 있었다. 이렇게 말을 만들면 과유불급일까? “콘스탄티우스 어천가!” 시오미 나나미는 콘스탄티우스의 기독교 공인에 대하여 오늘의 기독교인들이 추앙하는 바대로 콘스탄티우스 어천가의 심정으로 말하지 않는다. 도리어 상당히 냉정항고 싸늘하다. 그녀는 콘스탄티우스의 기독교공인의 불을 놓았던 밀라노 칙령을 해석하면서 이렇게 논평했다. “밀라노 칙령을 한번만 읽어보아도 분명히 알 수 있듯이 콘스탄티우스가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뜻을 밝힌 것은 결코 아니다. 또한 이 칙령으로 기독교가 다른 종교에 비해 우대를 받게 된 것도 아니다. 로마 제국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그것을 공표한 칙령이었을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밀라노 칙령의 전문을 살피면 대략적인 내용이 사두정치 체제에서 로마라는 대 제국을 통치하는 정제가 기독교에 대하여 호의적이었던 리키니우스와 콘스탄티우스라는 두 명으로 축약된 상태에서 두 사람이 정치적인 협치를 위해 내린 결단을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기독교인들이 콘스탄티우스 어천가를 부르는 것이 어찌 보면 경박한 일일 수 있다는 조심스러움이 내포되어 있는 근거이다. 서평자는 이 정도의 교회사적인 지식으로 기독교 공인의 총론을 알고 있다. 그러던 중, 너무 솔직하게 정통 기독교 교단이 가르치고 있는 콘스탄티우스의 기독교 공인의 화두에 날카로운 돌을 던진 평신도를 우연히 책에서 만났다. “황제는 다만 제위를 향한 편의적 발판으로 교회 제단을 이용했을 뿐이다.” 서평자는 로마라는 대제국이 기독교를 國敎化(국교화) 하는 대사건을 통해 이 일의 한 복판에 서 있었던 콘스탄티우스 대제의 숨은 야망을 에둘러 비판한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의 이 이야기를 본인의 책에서 소개한 김두식 교수 (경북대학교 법학 전문대학원 교수)를 만났다. 그가 쓴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에서. 그는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역사의 주류적인 해석보다는 그 뒤에 감추어진 비주류적인 실상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던 학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이렇게 성공한 자들의 역사관보다 바른 역사관에 따랐던 자들에게 천착하려는 시도는 서평자인 내가 그에게 호감을 갖게 한 이유였다. 그래서 그랬나! 신학을 하지 않은 기독교 지성으로 서평자의 영역에 대해서도 거침없는 비수를 던졌는데 놀라웠지만 왠지 통쾌했다. “‘예수의 십자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십자가 위의 예수’가 더 중요하다. 특히나 예수와 분리된 십자가 그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하나님의 형틀에 불과하다.” 이 책을 읽을 때까지만 해도 서평자는 김두식 교수를 잘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는 내내 평신도인 그가 알고 있는 놀라운 교회사적인 역사의식 그리고 교회 현장에서 금기시 되는 말을 포함하여 목사가 들어야 할 그리고 목사가 반드시 해야 할 말까지 거침없이 독설하는 그를 보면서 많은 도전과 긴장감을 가졌던 기억이 생생하다. 건강한 보수에 기뻐하다. 이렇게 그의 글을 만나고 그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기에 가끔 온라인상에서 그가 쓴 ‘불편해도 괜찮아’ ‘욕망해도 괜찮아’ 등등의 책들을 웹 서핑을 하는 가운데 만나 주저하지 않고 구하여 읽기 시작했다. 그의 글을 섭렵하면서 어느 경우에는 아슬아슬한 경우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특별히 서평입네 하고 글을 쓰고 있는 나 같은 목사들이 경청해야 할 진보적인 도전들을 때때마다 직간접적으로 공급받게 해주는 그에게 감사했다. 그러던 중, 그의 뜻밖의 책을 또 만났다. 그의 형인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인 김대식 박사와 함께 대화체 형식으로 나눈 글모음을 출간한 ‘공부 논쟁’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뒤에 책 말미에 항상 적어 놓는 글인 완독 사족을 서평자는 이렇게 기록했다. “처음으로 보수주의적 관점을 갖고 있는 학자에게 호감을 느꼈다. 근래 들어 상식 이하의 망발을 늘어놓는 듣보잡 같은 비인격적인 골통 보수가 아닌 아주 상식적인 수준에서 그러나 상당히 날카로운 지성을 근거로 한 보수적 학자가 갖고 있는 나름대로의 분명한 철학적, 과학적 고집을 배웠다. 중요한 것은 그런데도 불쾌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일로 인하여 보수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는 편향된 스펙트럼을 나름 상당히 많이 인정할 부분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좋은 독서의 시간을 보냈다. 더불어 공저자인 두 형제들의 주고받는 분야별 지적 통찰력을 보수와 진보의 관점에서 공히 접함으로 인해 오늘의 시대에 첨예한 사회적 이슈들에 대하여 균형 잡힌 시각을 배울 수 있어서 감사했다. 또 좋은 책 한 권을 내 것을 만들었다. 감사한 밤이다. 우리 교회 학생, 청년들에게 꼭 읽혀야지. 2014년 5월 26일 오후 10시 20분”
형 김대식 박사는 서울대 물리과를 졸업한 뒤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버클리에서 물리학 박사를 취득하고 지금은 모교인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나노광학을 연구하는 전형적인 대한민국 엘리트 군에 속한 0.1% 부류이다. 누가 보더라도 그는 기득권자이다. 누가 보더라도 그는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존경 받는 명예를 가진 자이다. 그런 그는 당연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보수주의적인 색채의 학자이다. 그는 책에서 대담의 상대이자 진보적 색채를 갖고 지금 현장에서 역동적으로 활동하는 동생이 속한 진보주의자들을 맹공 한다. 그가 진보주의자들을 공격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진보주의자들이 양보하지 않는 엘리트주의 때문이다. 형 김대식 교수는 가난에 대한 지론 즉 가난에 대한 차별은 인종주의적 차별보다 더 악질적이라고 일갈한다. 이런 면에서 보수적인 그에게서 아이러니하게도 진보적인 냄새가 난다. 그는 동생인 김두식 교수가 대변하고 있는 진보주의자들에게 칼을 댄다. “강남에 사는 소위 말하는 강남 좌파들과 목동에 사는 진보 교수들은 행복주택 그리고 보금자리 주택이 자기들 지역에 들어온다고 하니까 침묵했잖아. 그런 님비, 차별 앞에서 침묵하는 그런 자들이 갖고 있는 진보 엘리트 의식주의자들 나는 그런 자들을 믿지 않아요. 그런 자들을 절대로 찍지 않아요.”(pp,20-21) 물론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치사한 존재들을 선별한다면 보수주의자들은 트럭을 실어 올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식 박사의 이런 포문에 대하여 서평자는 나름 수긍했다. 이유는 진보적인 대열에 있는 자들 중에 이런 이율배반은 더 무거운 경종을 주는 일탈인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는 지속해서 이렇게 비판을 가한다. “진보가 가진 계몽주의적인 태도의 배후에 자리 잡고 있는 엘리트주의가 있다.”(p,25) 이에 반해 진보적인 지식인인 김두식 교수는 형의 발언에 대하여 이렇게 반론한다. 형이 보는 관점의 진보적인 사람들의 부정적인 면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도리어 과거 독재 정권 하에서 이만한 구도를 만드는 데에 한 몫을 감당한 영역이 바로 진보주의자들이었다고. 이런 이유를 전제로 동생은 한 꼭짓점을 그리고 있다. “정보의 왜곡이나 독점을 통해 더 위험한 상황이 만들어지고 있는데 그걸 지적하는 것은 지식인의 의무예요. 군사 독재 정권 시절부터 꾸준히 이런 목소리를 내고 있는 분들이 있지요.”(p,24) 이렇게 그들의 논쟁은 시작되었다. 형은 진보든 보수든 자기들의 색깔만이 옳다고 거품을 내뿜는 그런 사회 즉 획일화된 사회가 독재국가라는 생각에서 한 발로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 물론 그런 획일화의 고집은 진보적 사상을 갖고 있는 엘리트 집단이 더 견고함을 주장하면서 말이다. 서평자는 이 세션에서는 듣는 것에 더 집중한 편이다. 천박해 보이지 않는 보수적 지성의 자기 목소리 냄에 왠지 처음으로 희열을 느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무식한 종교(?)
형 김대식은 현직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이다. 그는 舌戰(설전)에서 대한민국 이공계 교수들이 처해 있는 정치적인 조직과 구도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한다. 예를 들자면 네이처나 사이언스 같은 세계적인 학술 논문집에 연구 논문을 발표하는 것이 정말로 중요한 학자들의 의무요 몫인데 학문적인 업적을 인정받기 위해 나의 집을 짓는 연구의 과제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외국적인 인프라를 토대로 무언가 연구 결과를 만들려고 하는 학문적인 종속주의에 대하여 비판한다. 그러다 보니 황우석 같은 일들이 반복된다고 지적한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지성적 종속’ 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서평자는 목사라는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목사를 가리켜 세인들이 이렇게 공격한다. 이성을 무시하는 반이성주의자들이라고. 그들이 그렇게 공격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들의 공격에 동의할 수 없다. 목양의 현장에서 말씀과 부대끼며 살았던 26년 동안 신앙을 근거로 하여 이성을 무시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도리어 참된 기독교는 이성을 존중하는 종교임을 개인적으로 사유해 왔다. 언젠가 로마서를 섬기는 교회에서 강해할 때 12장을 연구하면서 벼락 치는 소리로 들었던 구절이 있었다. 바울은 기독교인들이 알아야 할 기본적인 교리 해석을 1-11장까지 내놓은 뒤, 이제는 그 교리를 중심으로 살아야 하는 현장 지침을 12-16장까지 발표했다. 그 시작을 알리는 12:1절을 이렇게 기록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이 구절을 해석하기 위해 열람했던 스테파누스 헬라어 성경에서 ‘영적’ 이라는 단어를 보면서 소스라치게 놀랐던 기억이 생생하다. ‘logikh;n’ (로기켄) 이었다. 주지하다시피 이 단어의 원형 형용사 ‘logikov"’는 ‘이성과 관련된, 이성과 연관되어 있는, 이성적인’이라는 의미의 단어이다. 그래서 그랬나! 영어 성경 중에 현대인들이 많이 보는 웹스터 성경은 ‘영적 예배’를 ‘reasonable service’라고 번역했는데 무릎을 쳤다. 하나님의 말씀의 현현인 로고스는 이성을 무시하지 않는다. 이성을 뛰어넘는 신비적 요소들은 종교적인 핵심이다. 이성을 뛰어넘는다는 의미는 이성을 무시한다는 개념이 아니다. 이런 일설을 서평자의 주관성이 담보되어 있는 주장으로 독자들이 여기면 논쟁의 자리가 만들어지기에 이 대목은 이 정도로 마무리하지만 분명한 것은 기독교는 초월성을 합리적인 요소를 배제하는 수단으로 삼는 천박한 종교가 아니다. 신영복 선생의 담론을 읽다가 그가 말한 한 촌철살인을 가슴에 담았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승인하고 존중하는 정서를 키워야 한다. 그것이 바로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다. 그 여행은 참으로 먼 여정이다.” 선생의 지성적 성찰을 만나면서 이런 사유가 나에게는 있었다. ‘종교의 초월성은 가슴이다. 그런 그 가슴에 도착하는 데에는 반드시 이성이라는 머리로부터 출발한다.’ 목사가 추천한 책 서평자는 이 책을 시무하는 교회 학생들에게 추천도서로 발표했다. 심지어 주일에는 장년들에게 먼저 사서 읽고 자녀들에게 주라고 광고까지 했다. 그 이유가 3장에 있다. 두 형제가 어떻게 그렇게 공부를 잘 하는 수재들이 되었는가? 를 진솔하게 적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론을 말한다. 서울대학을 졸업한 형 대식은 머리가 나빴다. 본인은 이렇게 말한다. “동생도 알다시피는 나는 머리가 아주 나쁘잖아요.” 흔히들 학력고사 전체 수석한 사람들이 “교과서만 봤어요.” 라고 말하며 놀리는 말이 아니다. 그는 분명히 말하고 있다. “반에서 20등이 꿈이었다.”(p,86)고 그랬던 그가 전국 수석을 할 정도 뛰어난 성적을 거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에둘러 말한다. “공부를 해야 하겠다는 동기부여가 공부를 잘하게 한 일등공신이다.” 라고. 물론 그는 어려서 다양한 책을 접했다. 유명한 작가들의 책들은 전부 그리고 나중에는 읽을 책이 없어서 무협지와 심지어는 ‘김성주의 침실’이라는 성인 만화까지. 독서의 내공은 공부를 잘 하도록 만드는 길이다. 형은 말한 자기의 공부 인생을 요약하면 대체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악동으로 학교를 다니면서 반에서 가장 밑바닥도 해보고 1등도 해보았는데 전교 1등을 하려는 마음이 생기고 결국은 그렇게 1등이 되니까 모든 부분에서 용서가 되는 것을 알았지. 술을 먹어도, 담배를 피워도 선생님들이 용서를 해주고 만사가 오케이 인 것을 알았지. 그런 호의를 경험하다보니 그것은 나의 방어기제가 되었고 그 분명한 동기(나쁘든 좋든 상관이 없음) 넘사벽(넘을 수 없는 4차원의 세계: 다른 사람들이 제는 넘을 수 없는 그냥 일등)의 수준에 이르니까 공부가 그렇게 된 거지.”(p,97) 그렇다. 동기부여가 관건이다. 서평자는 김대식 교수의 이 대목을 읽다가 두 가지의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전교 1등은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본인의 입으로는 자신이 머리가 나쁘다고 했지만 분명 그는 이런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정도의 수준을 뛰어넘는 지적인 능력이 있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1등을 해 본 뒤 그 1등의 맛을 본 자로서 분명히 1등에 있어야 하는 동기부여를 자기에게 스스로 고취시켰다는 용기가 있었다는 것이 또 다른 그림으로 다가왔다. 사람에게 있어서 동기부여는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승과 패를 가르는 최고의 요소이다. 그의 솔직한 추억의 고백 속에서 서평자는 날마다 목회라는 하나님의 미션에 대한 동기부여를 하고 있는가? 곱씹는 순간을 가져보았다. 우리 것은 좋은 것이야! 두 형제는 책에서 또 하나의 도전을 주었다. 왜 대한민국은 노벨상을 받지 못하고 민족인가? 에 대한 접근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한다. 외국 유학파가 장악한 대학가와 지성적 그룹이 한국적 지성의 그룹으로 변화되지 않는 한 이 비극은 계속 될 것이라는 그들의 진단이다. 김대식 박사는 버클리 유학파 출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대목에서 열변을 토한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아시아권에서 가장 많은 노벨상 수상자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국내 박사들 간의 동종교배 즉 풀어 말하면 일본적인 냄새가 나는 집요한 지성적 그룹들의 연합적인 노력의 결과라고 진단한 점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 대목이다. “한국 사람이 노벨상을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한국 박사가 노벨상을 받는 것이에요.”(p,133)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같은 교수들은 물론, 하이클래스에 있는 직종의 사람들이 자녀들을 외국으로 보내 박사를 따게 하는 학문적인 사대적 근성으로 뭉쳐 있는 기러기 父母群(부모군)들이 산재해 있는 한 노벨상을 따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라는 그의 갈파는 목사인 서평자에게 무겁게 다가왔다. 왜? 독창성, 창의성 제로의 목회자 군들이 많이 보이는 것은 부인하지 못하는 아픔이다. 설교 표절, 가짜 박사들이 제일 많은 직종이 목사라고 하는 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주일 강단에 박사 가운을 입고 단 위에 올라가는 목사들을 보면서 3류 개그콘서트보다도 못한 천박함이 보고 있는 한국교회의 자화상은 슬프다. 두 형제 저자들은 사대주의적인 학문적인 종속을 기뻐하는 대한민국 대학의 현 상황을 하버드 대학교 한국 분교이고 또 교수들은 그 학교에 임용된 교수들이라고 까지 비아냥된다. 씁쓸한 마음 금할 길이 없는 비수다. 이들 형제의 한국 교육에 대한 칼날은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더 살벌하고 거침이 없어 보였다. 그 동안 우리나라 사람들이 갖고 있는 꿈과 같은 신기루 중에 하나 한 명이 만 명을 먹여 살 수 있다는 ‘장원급제 DNA’ 는 이제 척결되어야한다고 논설한다. 대신 사회가 정말로 공부를 하는 국가적인 분위기로 가려면 ‘장인 DNA’ 정신을 가진 자가 공부를 하도록 하는 분위가 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또 그런 자들이 배출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특수한 계층을 돈과 자본주의적인 투자 방식으로 급도하고 있는 특목고, 과학고 폐지에 대한 강력한 드라이버가 필요하다는 진단한다. 뜨거운 박수를 보내고 싶다. 특히 형은 특목고, 과학고에 입학한 아이들을 진심으로 염려한다. 수재로 만들고 싶어 보낸 그들이 일찍이 번-아웃되어 학계에서 혹은 지성계에서 사라지는 비극들을 너무 많이 보아 왔기 때문에 하루빨리 이런 악한 제도는 반드시 척결되어야 한다는 역설은 공감하기에 충분하다. 우리 것을 포기한 학문과 방법론은 아무리 그것이 뛰어난 학문적 질이 높다하더라도 그것은 차용된 것이지 내 것이 아니라는 그들의 권고함이 귀를 열리게 한다. 이 두 형제들은 때로는 첨예하게 그러나 진보와 보수의 틀을 뛰어 넘어 같은 공감대로 특별히 공부와 관련된 영역에 대한 의견을 개진해 주었다. 둘은 우리 것을 찾기 위한 이런 대안을 제시한다. 창의성을 키우는 나라와 교육 그리고 제대로 공부하는 학교가 되기 위해 다음을 생각하자는 것이었다. * 장원급제 DNA 틀에서 장인 DNA 틀로 패러다임 쉬프트를. * 한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이 노벨상에 도전하는 나라로. * 과학고나 특목고 같은 편법적인 테두리 안에서의 교육이 아니라 더 평등한 제도 안에서의 우수한 인재를 양성하는 틀로.(pp,269-270) 두 사람의 대담은 우리 조국에 대한 교육을 재조명해 주었다. 많은 생각하고 성찰하는 시간이었다. 이들의 진단이 우리나라 교육에 진일보하는 도움으로 전진되기를 기대해 본다. 서평자는 두 형제의 글을 통해 많은 도전을 받았다. 글을 읽으면서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지성적 보수주의자인 형 김대식 박사에게 더 많은 도전을 받으며 그를 진단하려고 노력했고 성찰했다. 결과, 많은 부문에서 이런 건강한 보수적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기를 나왔으면 좋겠다는 소회를 밝혀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로 사역하는 서평자는 신앙적인 사족을 건드리지 않을 수 없다. 목사라는 직업적인 모드로 말이다. 두 형제는 아버지가 장로인 가정에서 자라난 공통분모가 있는데 아쉽게도 과학자로 명성을 높이고 있는 형 김대식 교수는 신앙을 떠났다. 이런 일들은 자연과학에 입문한 자들이 선택하는 코스워크 같아서 내심 씁쓸하다. 설상가상으로 냉철한 이성적 판단과 건강한 보수적 지성을 가고 있는 형 김대식 교수가 신앙을 떠난 이유를 책에서 소개하는데 사실은 읽다가 순간 지성과 영성의 교집합을 아우르려고 노력해 왔던 서평자는 약간의 코마 상태에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재론하지만 이들 형제는 아버지가 장로였기에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닌 전력의 소유자이다. 그런 형제가 신앙적 차원에서 서로 다른 각을 세운 것을 보면 신앙은 분명히 개인적인 영성에 의해 좌우되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내를 따라 그냥 무늬만 교회를 나가는 무늬만 그리스도인이라고 스스로 말하는 김대식 교수가 이 책에서 본인이 무늬만 그리스도인이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는 내세가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간단하다. 사자한테 쫓겨 도망가는 물소를 생각해 보세요. 물소는 내세가 없다는 것을 아는 거야.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니까 죽을 힘을 다해 도망가는 거야. 예외가 없어요. 그걸 보면 내세는 없는 거야. 동물적인 나한테는 그게 너무 단순하고 확실해. 남에게 강요하지는 않지만 나에게 확실한 거예요.”(p,104) 그의 이 고백을 읽다가 만감이 교차했다. 우리나라 최고학부를 졸업한 수재, 그리고 지금도 최고 학부에서 최첨단의 나노광학을 연구하는 학자가 내린 내세가 없다는 최종적인 결론이 너무 허무하다는 생각을 하게 했기 때문이다. 서평자가 왜 허무한가? 그가 내세가 없다고 단적으로 확신한 것은 그가 그렇게 중요시 여기는 이성적인 판단이 아니라 물리학자가 가지고 있는 느낌과 그만이 가지고 있는 상상력 때문이라고 진단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다가 C.S 루이스가 쓴 걸작인 ‘순전한 기독교’에서 읽은 글이 생각났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나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것이 이성이라고 생각하는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내 믿음을 무너뜨리는 것은 저의 상상력과 감정입니다.” 서평자로서 형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생겨났다. 왜 신앙의 내용은 이성적이지 않고 상상력을 동원한 산물인가? 를 말이다. 하나님을 그가 줄곧 주장해 왔던 이성적 평가가 아닌 상상력의 산물로 평가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무서운 일인가를 그가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 말이다. 나의 감정의 느낌으로 하나님을 판단한다는 것이 또 다른 지성적 교만은 아닐까 싶어서. 서평을 마치면서 형에게 프랑스가 낳은 걸출한 기독교 지성인 자크 엘륄의 고언을 하나 전하고 싶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에게 요청되는 행동 사이의 관계를 인간은 독자적으로 자기에게 부과된 몫의 일을 하고 하나님께서는 나머지의 일을 행하신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실제로는 인간이 그리스도인으로서 해야 할 일을 행하고 하나님께서 그 일에 의미, 가치, 효과, 비중, 진리, 정의, 생명 등을 제공해 주심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일을 그와 같이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어 주지 않으신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일은 어느 정도 가치와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식으로 잘못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 가치 있는 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죽은 것이며 무의미한 것에 불과하다.” 이성마저도 하나님께 붙들리지 않을 때 상상력에 의존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존재 유무를 판단하게 되는 유치함은 인간이라면 그 누구도 예외 없이 갖게 되며 그것은 인간이 천박해지는 지름길임을 서평자는 믿기 때문이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형이 농담한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사인은 지독한 변비였다고 한다. 나는 아직 그럴 염려는 없다.”(p,286) 서평자가 그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최고로 무서운 변비는 영혼의 변비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것을 배우게 해주고, 느끼게 해주고, 시각을 넓혀준 형제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