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함께

제목세상에 예쁜 것2024-06-10 15:09
작성자 Level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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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지은이 박완서
ㆍ출판사 마음 산책
ㆍ작성일 2014-06-11 21:47:26



박완서 작가의 ‘세상에 예쁜 것’을 읽고 (마음 산책, 2014년)


딸이 선생님의 1주기가 지난 어느 날, 우연히 엄마의 책상 서랍에서 어떤 산문집에도 들어가지 않은 글들을 잘 정리하여 모아놓으신 묶음을 발견했다. 평소 컴퓨터 저장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종이의 정직함에 의존하여 A???? 용지에 프리트 해놓으신 것들이었다.
“그 때는 보이는 것이 왜 그리도 아름다웠던지. 젊은 내 새끼들의 옷깃과 검은 머리칼을 나부끼게 하는 바람조차도 어디 멀고 신비한 곳으로부터 그 애들이 특별히 아름답게 보이라고 불어온 바람처럼 느꼈으니까.”
 
원고를 정리하며 눈물을 쏟았던 이 구절처럼 이제 어머니는 정말로 멀고 신비한 곳에서 특별한 바람을 보내 주시는 것 같아 세간에 소개하는 용기를 냈고 그 결과 탄생한 마지막 유고 산문집이 바로 ‘세상에 예쁜 것’ 임을 딸이 에필로그에서 밝히고 있다.
그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왜?
그 용기가 없었다면 이 아름다운 작가의 글들이 사장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2011년에 선생님의 글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읽으면서 교회를 개척한 뒤에 때로 엄습하는 고독과 분노와 아픔들을 치유 받는 데 정말로 많은 도움을 받았던 감동이 있었기에 선생님의 마지막 산문집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알고 대단히 기뻤다.
읽어본 독자들은 이미 알고 있겠지만 선생님의 작품들은 거의 대부분 작가의 전기적 성격의 글들이 내재되어 있다.
그러나 그 내재된 전기적인 내용들이 천박하거나 싫증이 나지 않는다.
도리어 아, 그랬어, 그랬고말고! 의 공감을 유도하는데 탁월한 멋이 글을 읽을 때마다 느꼈던 바였기에 선생님의 글들에서 삶의 교훈을 배운다.
특히 나 같은 정형화되어 있는 목회자는 더 더욱.
나는 제일 먼저 그 기쁨을 섬기는 교회의 지체들에게 뽑아주는 영광을 가졌다.
책에 앞 부분에 기록된 선생님의 글 중에 한 대목을 뽑아 지난 주일 설교의 예화로 삽입했다.
 “할머니는 푸성귀를 데치거나 국수를 삶고 난 뒤 더운 물을 시궁창에 버릴 때 반드시 큰 소리로 ‘더운 물 내려간다.’ 고 소리를 치고 나서 잠시 머뭇거린 뒤에 버리셨다. 누구 들으라고 하는 소리냐고 여쭤보면 시궁창에는 온갖 미물들이 살고 있는데 미물 중에는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독종들이 많다고 하셨다. 못된 독종들이 죽으면 좀 어때서라고 물으면 독종만 죽는 것이 아니라 지렁이도 죽을까봐 그런다고 하셨다. 지렁이는 바보 같아도 그런 미물 독종을 잡아먹을 수 있으니 호랑이보다 더 힘이 셀 뿐  아니라 땅을 기름지게 하니까 농사꾼들이 잘 보살펴야 한다고 하셨다. 도망갈 시간을 주고 더러운 물을 버리는 행위를 통해서도 사람이 사물을 자연 질서 그대로 지킬 수 있는 도리가 담겨 있음을 할머니의 지혜를 통해 배울 수 있었다.” (p.37.)

 

세상을 떠난 승려 법정은 ‘아름다운 마무리’(문학의 숲, 2009년)에서 당시 정권이었던 이명박 정권을 향하여 이렇게 맹공을 한다.
“자연을 수단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생명의 근원으로서 하나의 생명체로 바라보아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의 공약 사업으로 은밀히 추진되고 있는 한반도 대운하 계획은 이 땅의 무수한 생명체로 이루어진 생태계를 크게 위협하고 파괴하는 끔찍한 재앙이다.”
범인(凡人)들도 아는 가장 평범한 진리가 외면되고 있는 이 땅을 향하여 박완서 선생님은 할머니의 추억을 되살림으로 오늘의 자연을 향하여 무자비하게 휘두르는 폭력을 에둘러 비판하고 있는 데 이 외침을 폭력의 주범들은 물론이거니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들을 귀로 들었으면 좋겠다.  
이제 감동들을 나누어 보자.
작가는 새까만 문학 지망생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내린다.
“거듭 이야기하지만 좋은 글을 쓰려면 좋은 글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읽어야 한다.”
교과서적인 내용인데 너무 선명한 답이 아닌가?
소설가 중에 위대한 소설가가 젊은 층에서 나오기기 어렵다는 말이 있다.
어떻게 해석이 가능할까?
삶과 공부가 내공으로 쌓이지 않은 자들에게 사람의 심장을 고동치게 하는 글이 탄생하지 않는다는 말이리라.
작가는 이렇게 이어간다.
“글을 쓸 때 늙었다고 하는 것은 속도가 느려졌다는 것이 아니라 감수성이 경직되고 진부해 졌다는 것이다. 내 감수성이 진부해지지 않도록 노력을 많이 해야 한다. 어떻게 노력하느냐 하면 좋은 글을 많이 읽는 것이다.”(p.59.)
이 대목을 읽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인문계를 선택하여 영문학을 공부하고 신학에 도전하여 목사까지 된 사람으로 얼마나 많은 좋은 글과 친구가 되길 원했던가?
나는 얼마나 대가들을 다양한 독서를 통하여 만났는가?
매일 다지는 결심이지만 부끄럽다.
그래서 결론은 최선을 다하는 공부에 전념하리라 다짐하는 것이다.
선생님은 이것을 후학들에게 당부 또 당부하고 있는데 지당하다.
책에서 작가는 박경리 선생님과의 만남에서 배웠던 배움을 소개한다.
예상하기를 같은 소설가로 이어지는 노하우, 소설 기법의 나눔 및 전수 등등을 읊으리라 예상하겠지만 그렇다면 빗나갔다.
저자가 박경리 선생에게 배운 교훈은 노동이다.
“제가 박경리 선생님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살리라고 마음먹었던 것 중에 하나가 육체노동이다. 육체노동은 다른 사람에게 시키고 정신노동을 더 중요시 여기는 것 같은 풍토에서 균형 잡힌 인간상은 실생활 속에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이 조화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pp.61-62)고 설파한다.
루터가 말한 대로 노동이 성직이라는 말을 굳이 되새김질 하지 않아도 육체적인 노동을 통해 삶을 영위하는 자들이 존중받는 이 땅, 그들이 정말로 대우 받는 이 땅이 될 때 그것이야 말로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이겠는가 하는 마음은 양보하고 싶지 않다.
또 하나 오늘 우리 시대에 경성해야 할 지침을 저자는 여고시절 국어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 일화를 통해 진하게 전해 준다.
숙명여고 2학년 시절 국어시간에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물으셨다.
 "포도주를 만들 때 너희들 무엇이 필요한지 아니?"
포도, 설탕, 소주, 항아리요 이렇게 대답을 하면 선생님께서는 '또?'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포도주는 포도를 땅에 버린 것이 땅에 고여 시간이 지나 발효하여 술이 된 것임을 발견한 것이라고 하시면서 포도가 포도주가 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p.67.)
나는 이 글을 접하면서 아멘 했다. 가장 중요한 본질을 보지 못하면서 비 본질이 답이라고 우기는 나를 비롯한 많은 다스 만(DAS MANN)들이 귀 기울일 청아한 교훈으로 들었기 때문이다.
저자의 감성이 부러운 글을 읽었다.
“포대기 끝으로 나온 아기 발바닥의 열 발가락이 ‘세상에 예쁜 것’ 이라는 탄성이 나올 만큼, 아니 뭐라고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예뻤다.” (p.83.)
아름다운 것을 보거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거나 표현하지 못하는 시대는 암울하다.
비극적이다.
울고 싶다.
그래서 나는 저자의 책 제목이 귀하다.
뉴욕 방문 시 만난 의사 남편을 둔 K 부인과의 일화도 깊은 가르침을 준다.
뉴욕 생활을 하면서 남편의 경제력 덕분에 부유한 생활을 했지만 모국어에 대한 그리움으로 우울함이 더해가던 K부인이 살아났다.
근처에 한인이 경영하는 책방이 생겼기 때문이다.
한국어로 된 책을 구입하여 살 수 있는 기쁨이 그녀에게 몰려왔다.
그것은 엄청난 기쁨임을 부인이 전언했음을 밝힌다.
저자가 그 부인에게 물었다.
“미국에서 책을 구입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을 텐데요?”
그러자 부인이 말한다.
“그렇지만 조금도 안 아까워요. 그 돈을 서점에 안 갖다가 주었으면 틀림없이 정신 병원에 갖다가 줬을 테니까요.” (p.93.)
근처 지근거리에 나가면 얼마든지 책을 구입할 수 있는 우리들,
경제적인 능력이 안 되면 얼마든지 도서관에서 빌려 볼 수 있는 우리들,
그런데도 우리는 책과는 담을 쌓고 산다.
절망스럽다.
수 년 전, 일본에 방문했을 때 일부러 일본의 신칸센 열차를 타보았다.
그들의 자존심을 확인해 보고 싶어서.
음매, 기죽었다.
출근하는 시간, 소책자와 신문을 들고 있는 거의 모든 승객들을 보면서.
책을 읽는 나라, 책 갈증으로 인해 몸살을 앓는 나라가 조국이었으면 좋겠다.
저자는 조상들이 가졌던 지혜도 소중히 여기라는 가르침을 준다.
“내 어릴 적 식탁 예절이 아무 것도 아닌 게 되어 버린 지금도 내가 참을 수 없어 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건 먹던 음식을 뚜껑도 없이 안 덮고 놔두었다가 그 다음 사람이 먹게 하는 것이다. 나도 그런 밥상에 앉기 싫지만 내 손자가 그런 밥을 먹는 것은 더군다나 참을 수가 없다. 그건 아마 어릴 적 우리 할머니로부터 수시로 들은 잔소리 때문일 것이다.”(p.107.)
‘아이들에게 김빠진 음식을 먹이면 골이 빈다.’
할머니에게는 이 정신이 신앙이었다.
이제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나 또한 보수적인 이런 면에서는 골통 보수의 기질이 꿈틀거리니 말이다.
늙으면 입맛이 U-TERN 한다는 소리가 있다고 하는데 나 또한 그래서 그런지 아내가 해 주는 삼시 세 떼를 군소리 말고 먹어야 하는데 가끔은 3번 나오는 반찬에는 투정이 나온다.
이러다가 밥도 못 얻어먹을까 두렵다.
저자는 이렇게 이 단락을 마무리 짓는다.
“연말이라 오라는 데는 많은 데 집 밥 먹으로 오라는 데는 없는 게 섭섭하다.” (p.109.)
여성성의 중대함을 주장하는 것은 작가가 여성이기에 마땅하다고 본다.
“오래 전에 읽었던 책에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다. 왕들의 지혜가 한계에 이르렀을 때 세상을 지탱하는 유일한 것은 여성들의 현명함임을 알아야 한다.” (p.132) 
공감한다.
앞서 서평자는 승려 법정을 잠시 언급했다.
저자도 그를 무대로 올린다.
“법정은 무소유를 주장한 실천적인 불교 성직자였다. 그의 관 위에 덮은 천위에 比丘 法頂 이라는 네 글자만 있었다. 평생을 두고 설한 무소유의 완성, 절정을 보았다. ‘저서를 절판시키라.’ 이승에서 진 말의 빚이란 말씀 속에 마지막 길을 철저하게 자유롭게 가고자 하는 법정의 결곡한 성품이 느껴진다.” (p.206.)
글을 읽다가 많이 부끄러웠다.
우상을 숭배했다고 다그치는 우리들이 그럴 자격이 있는가?  때문이었다.
전도 대상자가 서평자의 전도를 받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책을 한 권 선물했다.
승려 법륜이 쓴 ‘인생수업’이다.
나는 그를 섬기고 있다.
그의 영혼을 위해.
그런 그가 나에게 이 책을 선물했다.
참담하다.
법륜의 책이 나쁘거나 폄훼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 시대의 세인들의 멘토들은 왜 전부 스님들인가?
자존심이 구겨진다.
자압자득이다.
또 하나, 저자는 가톨릭 신자이다.
나름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평가를 받는다.
도대체 제 정신인가?
가톨릭 신자에게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개신교 목사가 붙이다니.
혹 그런 분이 있으면 이 글을 읽는 것에서 나가주기를 간곡히 부탁한다.
저자는 김수환 추기경을 추모하는 글에서 그를 존경했고 사랑했던 절절함으로 이렇게 마지막 필설하고 있다.
“추기경님이 가시고 나서 죽음이 훨씬 덜 무서워졌으니까요?”(p.221)
더 이상 어떤 글로 이 보다 더 존경의 표현을 할 수 있을까 싶어지니 못내 부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작가의 딸은 엄마가 변호사가 된 손자에게 진심어린 사랑의 마음을 담아 충고하는 말로 편집이 마쳐진다.
“앞으로 결혼을 해서 식구와 살림을 늘리며 살게 될 생활인으로서의 너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아무리 합법적이고, 경제적으로 이익이 돌아올 것 같은 일이라도 공도의 선에 어긋나는 일이라면 절대로 하지 말라는 것이다. 할머니가” (p.273.)
손자가 잘못될 리 없다.
나는 책을 읽고 남는 여운을 사족으로 이렇게 남겼다.
아름다운 사람의 끝은 어떨까? 매번 하는 질문이지만 답은 이렇다. 정답: 아름답다.
우연히 박완서 선생님의 산문 유고집 출간 광고를 신문에서 보았다. 주저하지 않고 구입하여 단숨에 읽었다. 내 주변의 좋은 멘토들이 떠나갔다. 그러나 힘들지 않다. 그들이 남겨놓은 이런 주옥같은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으니. 그들처럼 나도 언젠가는 떠나겠지. 떠나기 전, 남아 있는 자들에게 좋은 흔적을 남기기 위해 오늘을 정말로 잘 살아야겠다. 박완서 선생님처럼.  2014년 6월 9일 오후 8시 23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