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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최고의 설교2024-06-10 15:08
작성자 Level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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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지은이 존 맥아더
ㆍ출판사 국제제자훈련원
ㆍ작성일 2014-02-22 12:06:10

 


존 맥아더의 ‘최고의 설교’ 를 읽고

 

"Hard to believe" 이라는 제목을 ‘값비싼 기독교’라고 번역해서 마음이 끌렸다. 2009년 그레이스 커뮤니티 처치의 담임목사인 존 맥아더가 지은 책이다. 마치 시장 통에서 ‘골라, 골라’를 외치는 아주 값싼 복음으로 전락된 기독교 복음의 가치를 다시 한 번 깊이 성찰하게 한 그의 글이 잔잔하게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게 나를 후벼 팠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는 책에서 이렇게 갈파한다.

“오늘날 세상에 만연한 사탄의 거짓말 가운데 하나는 그리스도인 되기 쉽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인이 되기란 전혀 쉽지 않다. 그것은 당신이 죄악성에 대해 괴로워하며 용서를 갈망하면서 찾아 헤매고 홀로 통과해야 하는 매우 좁은 문이다.(값비싼 기독교 p.128)”

나는 존 맥아더의 글들을 통해 그가 확연하게 선포하고자 하는 그의 고집적인 신학을 접할 수 있었다. ‘진리 전쟁’(2007년)에서 포스트모던 시대의 유연성과 다양성이라는 흐름에 파 묻힌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사수하기 위해 피 흘리기 까지 복음으로 무장해야 함을 배웠고, ‘무질서한 은사주의’(2008년)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질서를 위해 영적인 혼돈을 부추기는 무분별한 은사주의에 대하여 강하게 성토하고 있는 그에게서 성경의 권위와 순수성을 배웠으며 ‘가장 고상한 지식 예수 그리스도’(2010년)에서는 세속적 가치에 함몰된 이 시대에 가장 위대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해야 함을 익히는 기회와 은혜를 얻었다.

존 맥아더에 대한 평가는 진보적인 성향의 학자들과 목회자 그리고 보수적인 성향의 학자들과 목회자들에 의해서 양분 된다. 전자는 비판적인 입장이요 후자는 지지적 입장이다. 어느 영역이든 이런 견제는 실체를 건강하게 만드는 긍정의 요소들이다.

최근 존 맥아더의 12편의 엄선된 설교 책, 판매하기 위한 홍보용 표현으로 ‘잊을 수 없는 설교 12편’이라는 부제가 붙은 ‘최고의 설교’(국제제자훈련원)를 접했다. 그의 설교 노트를 읽으면서 설교가로 산 40년의 그의 인생을 그리고 그의 목회적인 신학을 정리해 보는 좋은 시간을 가졌다. 본 서평자는 존 맥아더의 성향을 전술한 것처럼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는 소위 말하는 복음주의 입장에 서 있는 설교가요 실천 신학자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설교는 상당수는 원칙적인 교리를 고지식할 정도로 견지한다. 이런 그의 입장을 대변하는 12편 설교에 지천으로 깔려 있는 그의 글을 살펴보자.

그는 마태복음 7:21-23절을 근거로 ‘교회의 소명’을 설교하면서 이렇게 선포한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에게는 교회 좌석이 가장 불편한 자리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교회가 세상의 환심을 사고 있다면 그 교회는 사데 교회처럼 죽은 교회입니다.”(p.18)

"기독교는 형식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와 맺은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입니다. 그 그리스도를 여러분은 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사랑의 관계를 맺지 못한 사람들에게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를 모른다.’라고 말씀하십니다.” (pp34-35)

오늘의 상당수의 조국교회가 말하고 있는 강단 메시지와 비교할 볼 때 눈여겨 볼 대목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한다.

‘단순한 복음’이란 제목의 설교에서는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자기 스스로 죽어가고 있는 요소를 네 가지로 정의하며 신자들을 각성시킨다.

① 자기의: 구원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확신하는 것. ② 세속성: 하나님의 진리를 반대하는 이 세상에서 스스로 의를 얻을 수 있다고 믿게 하는 것. ③ 불신앙: 복음을 믿지 않는 것. ④ 의도적인 무지: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마음에 새기지 않는 것.

이 터널에서 빠져 나올 것을 권면하고 있다.

그는 ‘천국으로 가는 길(마 7;13-14)’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선택은 좁은 길과 넓은 길, 두 가지뿐임을 분명히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존 스토트가 말한 것처럼 ‘예수님은 인간의 안이한 혼합주의를 강력히 반대하신다.’는 것을 맥아더 역시 지지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강조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절대 명령이다.”

이 절대 명령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면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두 가지의 이유를 제시한다. 하나는 좁은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찾는 사람이 많아도 그 길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대가가 따르기 때문이라고.(p.81) 이런 차원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이 되기 쉽다는 사탄의 전략은 거짓 중의 거짓임을 그는 강력하게 역설한다. 대가를 지불하고 찾는 이가 많지 않은 좁은 길이지만 왜 그 길을 가야 하는가? 그 길 끝에 승리가 있기 때문이며 그 길을 가는 도중에 그리스도께서 직접 그 힘든 발을 부담해 주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마땅히 좁은 길을 찾아 가야한다. 이 텍스트에서 그의 말 중에 뼈 속 깊이 남는 말이 있다.

“영생은 양이 아니라 질이다.”(p.92.)

그의 설교 중 네 번째 chapter 인 ‘한 눈에 보는 요한계시록’은 이 글을 읽으면서 요한 계시록을 단 번에 회중들에 이해시키려고 하는 무리수를 둔 맥아더의 실수를 느꼈다. 긴 설교 원고이기도 하지만 존 칼빈도 주석을 쓰지 못했던 요한계시록을 너무 주입시키려는 의도가 있었기에 도리어 요한 계시록을 통한 종말론적인 소망을 갖게 하려는 저자의 시도는 대부분이 평신도 그룹인 회중들에게 적지 않은 피로감을 주었던 것은 아닌가하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었다.

‘영생을 얻는 법’(마 19:16-22)에서 저자는 한 문장으로 이 설교 테마의 답에 접근한다.

“구원은 모든 것을 포기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p.138)"

이 선포에 대하여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이유가 있다. 그레이스 커뮤니티는 캘리포니아 선 밸리에 있는 교회이다. 결코 빈자들이나 궁핍한 자들이 모이는 교회가 아니다. 바로 이런 소위 말하는 미국의 중산층 교회에서 회중들을 향하여 이 메시지를 선포할 수 있다는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고 옥한흠 목사께서 살아계실 때 통곡했던 기도의 내용 중에 ‘우리 교회에 가난한 자들이 들어오지 못하는 것’이었다는 메시지를 그의 세미나에 참석하여 들었던 적이 있었다. 교회가 기상도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한데 저자의 이 메시지, 구원은 모든 것을 포기한 자들이 차지할 수 있는 것이라는 설교를 했던 그는 얼마나 행복한 설교자였는지를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다. 이 텍스트가 구원의 관한 메시지이기 특히 기억에 남는 대목을 소개한다. 저자는 사영리의 제 일 원리를 파괴한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위한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시지 않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영원한 고통을 놀라운 계획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pp. 152-153)

그는 이 대목에서 뒤로 물러서지 않고 거침없이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자들을 위해 끔찍한 계획을 세우십니다.”

깊이 생각하면 그의 메시지가 들린다.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그의 말대로 사영리의 제 1원리는 이렇게 바뀌어야 할 지 모른다는 점을 본 서평자도 지지한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고 당신을 위한 끔찍한 계획을 갖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구도자 예배(seeker service)라는 것은 시작부터가 잘못된 사악한 것임을 저자는 역설한다. 사람의 비유에 맞추는 값싼 복음 대여가 자기 부인을 끝까지 하지 못하게 하는 최고의 동기임을. 읽다가 누가복음 5장에서 예수께서 베드로를 부르실 때의 기사가 오버랩 되었다. 밤새도록 물고기를 잡으려고 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해 공치고 돌아온 베드로에게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명령하셨고 결국은 순종한 베드로에게 그물이 찢어지는 복을 허락하신 주님에게 가서 나를 떠나달라고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던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 하셨던 그 장면 말이다. 주님의 첫 번째 미션을 받은 베드로의 반응을 누가는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 누가복음 5:11절은 감동이다.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누가는 이 문장에서 굳이 ‘모든 것을 버려두고’ 라는 삽입구를 쓰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데 그는 문장 안에 삽입구를 집어넣었다.

“모든 것을 버려두고”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의 삶이 그러한 삶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저자는 바로 이 점을 부각한 것이다. 계산하며 주판알을 튕기는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도전이 너무 크고 감동적이다. 이어지는 저자의 설교는 시련에 대한 설교이다. 그의 메시지는 토머스 머튼의 이야기로 대변된다.

“우리 인생이 만에 하나 아무 문제가 없이 평안하기만 하다면 우리는 신앙이 아니라 직감으로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임하는 고난은 그래서 축복이며 영적인 근력을 키우는 은혜라는 저자의 말이 달다. 본 서평자는 지금 섬기는 교회에서 존 맥아더의 7번째 설교의 아웃 라인을 우리 교회에 맞게 패러디하여 10주 동안 주일 오후 예배에 선포하고 있다. 그 만큼 이 설교에 개인적으로 은혜를 받았다. 저자는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날마다 10가지의 질문을 던지며 살아야 함을 역설한다.

① 영적으로 유익한가?

② 나를 영적을 세워주는 덕이 있는 일을 하고 있는가?

③ 속도를 늦추는 일인가?

④ 나를 속박하지 않는가?

⑤ 내 죄를 교묘히 가리고 있지는 않은가?

⑥ 내 삶에서 주님이 주되심을 내가 방해하고 있지는 않은가?

⑦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본보기가 되는가?

⑧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고 있는가?

⑨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있는가?

⑩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가?

이 질문의 삶을 나누고자 한다. 적어도 날마다 이 질문을 던지며 사는 자들은 실패하지 않는 인생을 살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존 맥아더는 주님의 가상칠언도 현대적인 언어로 대치하며 선포했다. ‘구원의 역설’(고후 5:21)이라는 설교에서는 이렇게 영적인 진단을 아끼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치명적인 바이러스는 에이자 바이러스가 아니라 죄 바이러스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에이즈 바이러스는 치료제가 없어도 죄 바이러스는 치료제가 있다. 하나님은 죄인들이 완벽하게 나아서 하나님과 화해하고 그 분의 임재 가운데 영원히 교제할 수 있는 길을 열어두셨다. 이 치료제가 곧 복음이다.”(p.232)

인간이 성취하는 종교는 거짓 종교이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구원을 성취하는 복음의 종교이다. 그러기에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선포한 선언은 정답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또 하나 존 맥아더의 설교 중에 비판해야 대목이 있다. 2001년 9.11테러 직후 선포한 중동지역을 바라보는 성경적 관점이라는 긴 설교이다. 그는 이 설교에서 미국을 공격한 무슬림에 대하여 에둘러 표현하기는 했지만 상당히 공격적이었다. 무슬림 신자에 대한 반사회적인 집단으로의 정의, 동시에 그것은 성경적이라는 확신에 찬 어조들이 그렇다. 물론 공격을 받는 나라의 목회자로서 더군다나 복음주의적인 결벽성향까지 갖고 있는 저자로서 그런 류의 설교를 행한 것은 나름 이해되는 대목이다. 그러나 무슬림을 향하여 안티 그리스도적인 집단으로 이끌려는 경향은 매우 조심스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애굽과 시리아와 유다의 구원을 보편적인 차원에서 선포하였던 것을 무시한 이유 때문이리라. 하나님의 구원의 보편성은 민족주의적이지 않다. 도리어 코스모폴리타니즘적이다. 이것은 타종교를 향한 배려의 차원으로 해석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방과 이스라엘의 경계를 허무는 것임을 전제한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작금에도 전혀 변화 없이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에 높은 담을 쌓고 더 높은 담을 쌓고 있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과 반대로 가고 있는 것임이 분명하다.

이 책을 통하여 마지막으로 나누고 싶은 것은 반대로 존 맥아더를 적극 지지하는 설교의 테마이다. 저자는 복음의 능력을 변질시킨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 대하여 엄히 경고한다. 제자도의 제 1원칙‘ 이라는 설교에서 오늘의 변질된 복음을 서슬이 시퍼렇게 지적한다. 하나님의 신학이 아닌 인간 중심의 신학으로 변질시킨 로버트 슐러를 비롯한 그의 추종자들을 향하여 극언을 퍼붓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나는 그런 자들과는 상종도 하고 싶지 않다." (p.310)

저자는 이렇게 선언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여러분이 목숨을 잃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 중심의 신학이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드릴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p.314)

본 서평자는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오늘 조국교회에서 존 맥아더의 설교를 강단에서 담대히 할 수 있는 목사가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듣고 싶다. 그리고 하고 싶다. 존 맥아더의 사자후를. 서평을 마치며 그의 마지막 부분의 외침을 설교자인 나의 외침으로 1인칭화 하여 각인해 본다.

“사람들의 반응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결정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여러분의 책임은 순수한 복음을 제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그의 외침이 나에게는 뜨겁게, 뜨겁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