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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내겐 여전히 불편한 하나님2024-06-10 15:07
작성자 Level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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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지은이 데이빗 램
ㆍ출판사 IVP
ㆍ작성일 2014-01-29 16:03:57

 



우리 교회 교우 중 젊은 지체 한 명이 성경 공부를 하는 시간에 이렇게 도전적인(본인의 입장에서) 질문을 했다.

“목사님, 하나님은 가나안 정복을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에게 명령을 하실 때 어린 아이들을 포함하여 전멸시키라고 하셨는데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요?”

이 질문은 비단 저에게만 질문된 내용이 아니라 목회자라면 누구든지 한 번 즈음은 받아 보았을 만한 질문일 것이다.

이 질문을 받은 저를 비롯한 상당수의 목회자들은 그 답을 제시할 때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겠지만 듣는 이로 하여금 2%가 부족한 답을 제시할 때가 있었음을 아마도 내심 느끼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펜실베이니아 주의 하트필드에 소재한 비블리컬 신학교에서 구약학을 가르치고 있는 데이빗 램은 전술한 이런 질문과 더불어 구약에 기록된 내용 중에 건드리기가 불편한 내용들을 8가지의 CHAPTER 로 가지치기를 하여 구약성경의 내용으로 충실하게 답하기를 내놓았다.

21세기의 C S 루이스라고 불리는 석학 톰 라이트는 그가 쓴 ‘톰 라이트가 묻고 예수가 답하다.’에서 아주 의미 있는 도전을 던진다.

“예수에 대한 연구를 위해서는 다음을 직시하라. 여타 사람들이 복음서의 배후를 캐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비웃지만 반드시 복음서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복음서가 처음부터 우리에게 말해 주었으나 용케도 걸러 낸 예수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필히 복음서 안으로 진입해야 한다.”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바로 이 책 ‘내겐 여전히 불편한 하나님’에서 램이 구약을 공격하는 일련의 질문들에 대하여 시도한 공격적 방어가 바로 구약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는데 서평을 쓰는 저 역시 그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성서를 성서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안전할 수 있다는 말처럼 램은 그렇게 작업을 시도한다.

 

1. 평판이 좋지 않은 하나님

 

램은 이렇게 글을 시작한다.

“구약성경의 사랑의 하나님과 신약 성경의 가혹한 하나님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

도전이지 않은가?

상식적이라면 질문은 반대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저자는 구약 성경의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것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는다.

남녀를 차별하고 진노를 남발하며 인종까지도 무차별적으로 차별하는 것은 물론이고 재앙을 심심치 않게 일으켜 인간에게 고통을 주며 과대 망상적이며 가학 피학적이며 예측할 수 없는 악의적 불한당과 같은 하나님을 마땅히 탄핵하는 것이 가하다는 일반적인 공격에 대하여 램은 구약 성경 안에서 이런 곤혹스러운 부분들을 적절히 대처해 나간다.

책의 전반에서 다루겠지만 저자는 구약 성경은 고대 근동 문헌 중에 거룩한 사랑, 외국인의 수용, 여자를 인정하는 묘사 등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기록임을 내세운다.

더욱 결정적인 것은 예수께서 구약 성경을 사랑하셨다는 점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구약 성경에 기록된 부정적인 하나님 인식에 대하여 검토할 것을 선언한다.

그 진지한 검토를 통하여 구약 성경의 하나님 사랑이 깊어지기를 독자들에게 요청한다.

 

2. 진노의 하나님.

 

진노의 하나님을 고발하는 대표적인 기사를 사무엘상 4-5장에 기록된 법궤 운반 사건으로 들고 있다.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일어난 웃사의 죽음은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대표적인 잔인성을 보여 주는 실례라는 것이다.

법궤가 흔들릴 때 법궤를 붙든 웃사를 그 자리에서 죽게 하신 하나님이 과연 사랑의 하나님이란 말인가? 에 대한 도전을 램은 다음의 세 가지로 반응한다.

① 언약궤를 옮기는 데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부한 웃사와 아효의 죄 즉 언약궤를 옮기거나 이동시킬 때는 반드시 어깨에 메라는 명령을 무시하고 그들은 수레에 운반하였는데 이것은 단순히 운반의 어김을 책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례에 정면으로 도전 한 것임을 교훈하기 위함이었다는 점이다.

② 법궤를 수레에 실은 것은 하나님을 차 트렁크에 태우기를 한 것이다. 이것은 야웨에 대한 치명적인 모욕이었다. 트렁크는 짐칸이다. 조금 더 리얼하게 말한다면 설국열차의 마지막 칸에 하나님을 태운 것이다.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수하물에 실은 치명적인 모욕에 대하여 하나님은 분노하신 것임을 분명히 한다.

③ 이 정도의 영적인 척도는 결국은 언약궤에 대한 하나님의 임재를 가볍게 여겼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는 언약공동체였다. 웃사를 죽인 것은 하나님이 진노를 잘 하시는 하나님이셨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렸기 때문이다.

도리어 램은 이 설명 끝에 하나님은 진노의 하나님이 아니라 헤세드(사랑으로 번역하는 용어)의 하나님이심을 역설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헤세드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오래 참으신 뒤에 다음의 두 가지의 경우에 진노로 발하심을 논한다.

Ⓐ 야웨 하나님은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관계를 깨뜨리는 경우 진노하심을 경우로 들었다.

관계의 깨짐은 곧 부부의 결혼관계가 배타적인 것과 같은 이치임을 논하며 남편과 아내는 공유의 대상이 아니라 독점의 대상인 것처럼 하나님도 그 관계를 요구하신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 야웨는 불의에 대하여 진노한다. 이것은 유대와 이방이 공히 같은 맥락으로 적용된다.

이상의 논증은 구약의 하나님을 진노의 하나님으로만 해석하는 단편을 보기 좋게 거부하며 사랑의 하나님도 되심을 증언한다는 점에서 독자들에게 신선함을 준다.

 

3. 성차별주의자 하나님

 

이 대목은 빈번한 논쟁거리이다.

여성신학의 대가라고 할 수 있는 엘리자베스 쉬슬러 피오렌자 박사를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에서 목회 신학 박사 학위 과정을 할 때 만났다. 그녀는 본인의 책 ‘돌이 아니라 빵에서’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남성의 언어로 화석화되어 여성을 억압하는 도구로 사용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질렀다고 말할 정도로 성경 해석의 편파성에 대하여 지적했다

피오렌자의 이런 지적은 물론 성경 전반에서 걸쳐 기록되어 있는 여성의 권리가 짓밟히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성경적 사고를 기초로 하고 있다.

성차별에 있어서 틀을 뒤집어야 한다고 그녀는 강조했다.

여성신학적인 차원에서 성서를 해석하는 학자의 집요한 공격은 공부하는 자로서 신선한 도전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에 반하여 램은 피오렌자와 맞붙겠지만 구약학자의 성서 해석의 차원에서 성차별을 했다는 주장들에 대하여 도리어 억울함을 호소하는 듯한 본인의 입장을 성경적으로 풀어나간다.

그가 말한 몇 가지만 살펴보자.

창세기 1:26-28절에 기록되어 있는 그 유명한 ‘하나님의 형상’을 예로 든다.

‘형상’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첼렘(tselem)에 대한 글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남자와 여자 공히 창조하신 뒤에 하셨던 말씀이 ‘첼렘’ 이라면 여자에 대하여 하나님은 하나님 같다고 하신 셈이 된다.

이유는 여자가 두 번째로 창조되었기에 남자보다 열등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도리어 성차별을 하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교정본으로 창조된 여자가 처음 창조된 존재보다 열등한 것이 아니라 뭔가 낫다는 개념이다.

그 중에 여자에 대하여만 하셨던 ‘돕는 배필’이라는 히브리어 ‘에제르’는 ‘도움을 베푸는 존재’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이사야서에 등장하는 하나님은 철저하게 ‘에제르’이다.

모세오경에도 ‘에제르’는 하나님이 돕는 분으로 현현하실 때 쓰이는 단어이다.

그렇다.

데이빗 램은 이런 공식을 주장한다.

여자는 돕는 자인 하나님 같다.

저자는 창세기 3장에 나오는 뱀과 남자와 여자에게 내리신 저주의 내용에서도 성차별이 아님을 강조한다.

여자에게 내린 징계의 내용이 무엇인가?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다.”라는 대목에서 방점을 찍으면 성차별의 메시지로 들린다.

그러나 램은 색다른 주장을 한다.

하나님이 내리신 저주의 메시지 중에 주목할 내용이 대명사가 모두 ‘단수’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저주 메시지는 처음 사람에게만 해당된다는 논리이다.

이것을 기초로 하면 이런 주장이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남자가 여자를 다스릴 것이라는 내용의 진의는 남자가 여자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다스릴 것에 대한 의미인데 그것도 싱글 여성에게는 해당되지 않고 결혼을 통해서 이루어진 가족 관계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내용이라고 저자는 말한다.창세기 이야기를 하나 더하자.

소돔 성에 있었던 롯이 갖고 있었던 여성 차별의 난제이다.

소돔 성 안에 있었던 자들이 두 천사를 강간하기 위해 압박할 때 롯이 결혼하지 않은 두 딸을 내놓겠다고 타협안을 제시한다.

이것이 여성 차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세 가지의 관점에서 여성 차별이 아님을 램은 강조한다.

첫째 이 본문에서 하나님은 롯의 제안을 좋게 여기지 않으셨다는 점이다.

둘째 오히려 두 딸들을 보호하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그들의 눈을 멀게 함으로.

셋째 하나님은 강간을 일삼던 소돔을 멸하셨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강간을 미워하신다는 점이다.

암논이 이복 누이동생이었던 다말을 강간했을 때 충격적이었지만 그녀는 신명기의 율례대로 강간한 자와 결혼을 하는 법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하나님은 여성의 권리를 보호하셨다.

무슨 말인가?

하나님은 성차별을 하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성차별과 싸우셨다는 말이다.

 

4. 인종 차별주의자 하나님

 

이 세션에서는 가장 중요한 성경적인 문제제기가 노아의 아들인 함의 저주 사건이다.

일반적인 견해로 제기되는 선지식은 함의 자손들이 아버지의 불효로 인해 저주를 받아 아프리카의 흑인들이 되었고 그들의 저주는 계대를 통해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램은 이 주장을 일거에 날려 보낸다.

① 함이 저주를 받은 것은 그의 자손들에게 이어진 계대의 저주가 아니라 노아의 아들들 한 세대에 지나지 않는다는 근거에서다. 다시 말해 저주가 지속될 가능성은 제로 퍼센트이다.

② 저주를 한 장본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노아였다.

그 당시 노아는 거의 영적으로 영향력을 주지 못하던 삶을 살고 있었다.

물론 그는 그래도 하나님으로부터 저주의 능력을 부여 받아서 저주를 선포한다.

그러나 그의 저주의 대상은 극히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③ 노아가 저주한 대상은 함이나 함의 아들들이 아니라 가나안뿐이었다.

그러므로 함의 저주가 아프리카의 흑인들에게 전수되었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또 다른 이야기를 들추어보자.

가나안 진멸의 명령에 관계된 인종 차별 문제이다.

결론은 과장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하여 열방이 복을 받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이 가나안 점령을 할 때 진멸하라고 하신 이유는 인종차별의 의미가 아니라 가나안에 만연되어 있었던 죄악 때문이었다.

도리어 하나님은 구약 성경의 지천에 나그네를 사랑하라는 명령을 내리셨다.

그들을 위하여 정의를 행하신다.

아람의 군대장관인 나아만을 고치셨다.

예수님의 조모들은 이방인들이었다.

하나님이 열방과 이방 세계를 동등하고 존중하고 사랑했다는 이런 이야기는 지천에 깔려있다.

 

5. 폭력적인 하나님.

 

미수에 그친 유아살해-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죽이려 했던 기사. (창 22장)

이웃 아내에 대한 욕망을 채우기 위한 목적으로 저지른 살인교사 (삼하 11장)

연장자를 놀린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왕하 2:23)

이런 이야기들이 들어 있는 성경을 그리고 그것을 용인하거나 허락한 폭력적인 하나님을 믿으란 말인가?

두 번째 이야기를 예를 들어보자.

엘리사가 벧엘로 가고 있는데 도중에 소년 몇이 와서 엘리사를 대머리라고 놀린다.

엘리사가 야웨의 이름으로 저주를 하자 숲에서 곰 두 마리가 나온다.

곰은 소년들에게 달려들어 아이들을 찢었다.

이런 폭력의 정 중앙에 하나님이 있다는 논리로 하나님이 폭력적이라고 주장한다.

램은 소년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카탄(23절), 엘레드(24절)’ 모두가 청소년 혹은 10대 후반을 상징하는 단어였다고 말한다.

엘리사가 놀림을 받은 것은 미취학 아동에게 놀림을 받은 것이 아니라 10대 후반의 무리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은 것으로 진단해야 한다고 말한다.

엘리사는 싸움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방어한 것이다.

하나님은 엘리사가 엘리야의 영권을 받은 뒤 이스라엘을 위하여 해야 할 사명이 막중한 바 그를 보호하셔야 했다는 점이 과소평가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특별한 위기의 상황을 보호하셔야 했던 하나님은 폭력적인 하나님 아니라 평강과 화목을 선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6. 율법주의자 하나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내리신 명령을 살펴보자.

성경의 첫 명령은 ‘저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첫 명령은 상당히 긍정적이고 복된 것이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 1:28)

또 하나 선악과 금지 기사의 핵심은 선악과를 먹지 말라하신 것이 아니라 에덴동산에 있었던 많은 나무들의 열매를 많이 먹어라가 더 중요한 관점인데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다.

동시에 자녀들을 많이 낳을 수 있도록 섹스에 대한 자유도 허락하셨다는 점을 간과한다.

이 사실은 성과 음식이라는 두 가지 선물을 인간에게 주심으로 하나님은 자신의 관대하심과 선하심과 은혜로우심이 율법의 토대임을 보여준 것이기에 하나님은 결코 율법주의자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임의법과 가혹법 그리고 여러 율법에 대하여 구약은 설명하고 있기에 하나님을 율법주의자라고 결론짓는 경우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사람은 본인 스스로 법에 제약 받기를 싫어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은 그 법에 제약 받는 것을 좋아한다.

아이러니가 아닌가?

무슨 의미일까?

아마도 법이라는 것이 좋다는 의미는 아닐까?

야웨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율법의 내용들을 사람을 구속하기 위한 내용들이 아니라 도리어 사람들을 좋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들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안식의 율례이다.

안식이 야웨께 참 중요했던 것을 알기에 당신의 백성에게도 안식이 중요함을 강조하는 것은 어찌 보면 마땅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전술한 내용처럼 구약에 나타난 율법들은 그 율법의 정신을 살펴보면 사람들을 얽어매기 위한 수단이나 방편이 아니라 사람을 진정으로 자유하게 하는 방편이며 하나님의 은혜로움을 경험하도록 하는 수단임을 저자는 강조한다.

율법은 선한 것이지만 익히 알듯이 율법주의를 경계하신 주님의 뜻을 받들어야 함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의무이기도 하다.

율법은 구원의 방편일 수 없고, 하나님의 은혜를 갚는 수단은 더욱 아니며,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하는 임무나 책임만도 아니다.

율법을 우리에게 야웨께서 주신 이유는 하나님과의 더 깊은 교제로 들어가도록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이다.

 

7. 완고한 하나님.

 

저자가 직시하는 하나님의 이 불편성은 사람들이 하나님은 고집이 세고 완고한 분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고집불통이며 무정하고 냉정한 원칙주의자의 의미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정말로 그런가?

램은 이것에 대하여 이렇게 전개한다.

구약성경의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신 분이다.

그러나 변함이 없다는 말은 변덕스럽지 않다는 말이며 신뢰할만한 분이라는 말이지 아무런 개념이 없는 기계적 신이 아니라는 뜻은 아님을 강조한다.

충격적인 것은 도리어 하나님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회개하고 돌이키는 자에게 마음을 바꾸시기도 하시는 은혜로운 분이심을 기록하고 있다.

리처드 라이스는 하나님의 불변성을 말하는 장면은 성경에서 민수기 23:19, 삼상 15:29절두 군데에서만 언급하고 하나님의 가변성을 말하는 구절이 상당수 존재한다고 주장한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면서 램은 완고하신 하나님을 반대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은 변하지 않으나 하나님의 심판은 변한다고 저자는 강력하게 역설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바꾸지 않고 끝까지 지키신다는 사실도 멋진 소식이지만 하나님이 뉘우치는 자에게 저주가 아니라 긍휼을 더하여 주신다는 사실은 더 멋진 소식임을 직시하고 하나님이 완고하신 분이라는 주장에 대하여 생각을 바꿀 것을 권한다.

 

8. 멀리 있는 하나님.

 

마지막으로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사람들이 보는 불편한 야웨의 개념을 전개한 것은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에 대하여 행하셨던 구약의 행위들을 볼 때 하나님은 비인격적인 무정하고 냉정하여 때론 아주 멀리 계신 분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를 잘 듣지도 않으시고 냉정하게 외면하시는 분이 야웨라는 관점이다.

그럴까?

램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과 멀리 있으려고 했을 때는 그 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이다.

중요한 이유는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거룩하지 못함 때문에 그들이 해를 당할 것을 미연에 방지하신 것이라는 은혜이다.

야웨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지시를 받기를 싫어하는 민족, 죄를 짓기를 좋아하는 성향을 갖고 있는 이스라엘이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는 존재임을 알기를 원하셨다는 것이다.

이런 이스라엘이 당신을 가까이 하는 경우 그들에게 인할 화를 모면해 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멀리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멀리했다고 해서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이 아니다.

도리어 불평하는 자기 백성들을 향하여 이렇게 행동하셨다.

① 그들과 함께 하셨다.

②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③ 그들과 동행하셨다.

④ 그들 가운데 함께 거하셨다.

데이빗 램은 이 책을 다 쓰고 난 뒤 그의 에필로그에서 야웨 하나님에 대한 소회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하나님은 나에게는 참으로 매력적인 분이시고, 나와 함께 관계를 맺기를 소원하시며,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선하신 분이시다.”

이 책은 작년 내가 계획했던 독서량의 마지막 분량으로 섭렵했던 책이라 개인적으로 정감이 가는 책인 것은 물론이거니와 근래에 읽은 구약에 관계된 책 중에서 가장 복음적인 차원에서 성경 텍스트를 벗어나지 않으려고 노력한 것이 보여 개인적으로 교회에서 평신도들에게 불편한 구약성경을 이해시키는 데에 좋은 자료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결코 가볍지 않게 그러나 또 일반 구약신학서들처럼 어렵지 않게 대중적인 접근이 쉬운 도구기 될 것을 기대하면서 독서를 마쳤다.

색깔론이 첨예한 이 시대에 살고 있다.

진보적인 계통에 있는 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은 데이빗 램의 글을 읽으면 별로 와 닿지 않을 가능성이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근본주의적이지 않고 소위 말하는 복음주의적인 틀 안에 있는 자들이 이 책을 접하면 많은 자극과 도전이 될 것이라고 사료된다.

글을 맺으며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해 본다.

조국교회를 위해 수고하고 있는 구약학자들 사이에 발간되는 책들을 접하면서 긍정의 도전도 많이 받는 편이지만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조금은 회중적인 접근성이 수월한 글들을 수고스럽더라도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 말이다.

개인적으로 송병현 교수의 엑스포지멘터리 주석을 통해 설교를 준비하면서 적지 않은 도움을 받는다.

더불어 친구인 차준희 교수가 쓴 구약성경 다시 읽기 시리즈는 더할 나위 없이 질 좋은 자료로 이용하고 있다.

학문적인 질과 회중적인 접근성이 용이한 구약 연구에 대한 귀한 책들이 우리 조국교회에도 더 많이 쏟아져 나오기를 바라며 데이빗 램 교수가 발췌한 구약의 불편한 야웨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위해 구약성경 안에서의 해석을 시도한 ‘여전히 내겐 불편한 하나님’을 목회자는 물론이거니와 평신도 사역자들도 함께 읽으며 공유하기를 추천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