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김미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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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민음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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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4-01-24 13:56: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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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월의 ‘여덟 번째 방’의 읽고 (민음사 간, 2012년) “아픈가?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하라.” 서재에 있는 턴테이블 LP에서 들리는 ‘아드리느를 위한 발라드’가 은은하게 마음을 센티하게 만든다. 거의 3박 4일 동안 말을 하지 못하고 살았다. 감기란 놈이 그렇게 만들었다. 실은 지금도 불편하지만 글은 쓸 수 있어 감사하다. 목감기로 인해 말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했지만 도리어 감사한 것이 새롭게 느껴졌다. 목사처럼 말이 많이 해야 하는 직업이 또 어디에 있으랴! 그런데 질병이라는 물리적인 방법이기는 하지만 심한 목감기로 인해 침묵하고 살던 3박 4일 훨씬 더 영적으로 살이 찐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해서 약을 먹고 몸이 조금 괜찮아지는 시간에는 더 많이 묵상하고 성경과 책들과 기도와 함께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가? 이해인 수녀께서 ‘민들레의 영토’에서 “큰 소리로 말씀치 않으셔도 분명히 들려옵니다.”라고 고백한 영혼의 읊조림이 그대로 다가오는 듯한 주간을 보낸 느낌이다. 년 초에 손에 잡고 읽으면서 잔잔한 울림을 받은 소설가 김미월의 장편 ‘여덟 번째 방’을 만났다. 작가는 몸과 마음 모두의 심한 고통 가운데 글을 다 쓰고 난 뒤, 에필로그에 이런 글을 남겼다. “아프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 아파서 운다는 것은 살고 싶어 한다는 것. 그것을 확인시켜 준 내 몸에 감사한다.”(p.242) 현직 목사로 살면서 때로는 섬기는 공동체 때문에, 때로는 개인 영성의 침체 때문에, 때로는 변화하지 않는 너와 나의 삶 때문에 많이 운다. 그 때마다 언제 울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심한 영적 고통의 터널들을 지나왔다.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터널의 터널을 지나면서 끝이 있을까 자탄하던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끝내 깨달은 것은 그 고민의 연속적인 시간 안에 있다는 것은 곧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의 단적인 증거임을 확인하고 하나님께 부족함을 도리어 감사했던 지난 시간들이 있었음으로 인해 벅찬 감동을 받는다. 그렇다. 터널은 터널이지 굴이 아님에 감사하다. ‘집’이 아닌 ‘방’의 삶
멘토인 이재철 목사께서 추천한 김미월의 ‘여덟 번째 방’은 목양의 여정에 있는 목사인 나에게 두 가지를 깨닫게 해 주었다. 첫째, 나와 함께 이 땅을 살아있는 모든 이들의 영혼이 아름답다는 사실과 둘째, 살아 있는 자들에게는 과정이라는 스승이 있다는 점이었다. 90년대 학번 즈음으로 보이는 주인공 영대는 자신이 무슨 꿈을 갖고 사는지 조차도 모르는 불안한 이 시대의 대명사처럼 보인다. 이런 본인의 꿈 없음을 꿈 있음으로 변화해 보기 위해 독립을 선언한다. 그러나 집을 나선 그 순간부터 맞닥뜨리게 되는 수많은 사회적, 경제적인 문제들은 영대를 옥죄며 다가온다. 경제적인 곤고함으로 인해 얻은 자취집은 집이 아니라 방이었다. 단지 잠만 잘 수 있는 그런 방. 그곳에서는 삶이 없었다. 방은 단지 잠만 자는 공간이었다. 사회생활을 그렇게 시작한 자신의 삶이 한탄스러운 영대는 그 집에서 삶을 시작하던 첫 날 우연히 상자에 담겨 있는 노트들을 발견하게 된다. 찾아가지 않은 이전 방주인의 것이었다. 그 노트 안에는 '여덟 번째 방'이란 제목의 글이 기록되어 있었다. 동시에 또 다른 소설의 주인공인 '지영'이 살아온 삼십년의 시간들이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소설 속의 또 다른 주인공인 ‘지영’의 30년 삶이 기록된 스프링 노트를 영대는 읽으며 지금 기막힌 가난과 궁핍의 현실에 놓여 있는 자신과 지영과의 묘한 교감을 이룬다. 그는 예기치 않은 글을 읽으면서 삶을 포기한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낙인찍힐 수 있었던 본인의 방을 사유함과 성찰함을 발전시켜 나아가는 아주 의미 있는 방으로 공간 변화를 시도한다. 살아 있다면 일어설 수 있다. 책의 두 번째 주인공 ‘지영’은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의 대학생활 동안 경험했던 좌절과 슬픔을 경험한다. 동시에 고향에서 서점을 경영하던 부모님들의 경영 몰락으로 인해 본인에게 다가온 경제적인 궁핍함으로 인해 자꾸만 더, 더 좁은 공간으로 이사해야 하는 과정에서 본인의 무능력을 절감한다. 지영의 이런 현실은 지금 독립하여 나왔지만 꿈도 없고 무엇을 해도 단 한 번 끝까지 해 본 것이 없는 1차적인 주인공 영대와의 심리적 공감과 동변상련의 애잔함을 느끼게 해 준다. 소설은 3인칭으로 서사되어진 영대와 1인칭으로 서술된 지영의 이야기들을 교차시키면서 박진감이 있게 진행되는데 두 사람의 이야기는 공히 삶의 노정이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그들이 살아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해준다. 그렇다. 작가는 그 살아 있음이 곧 행복이라고 강하게 역설하며 정의한다. 나는 이 말에 동의한다. 삶이 곤고하고 지치고 낙심되고 혼자서는 도저히 걸어갈 수 없을 정도의 그로기 상태에 있더라도 살아 있다는 것은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증거 그 자체이다. 왜? 끊임없이 생각하고 사유할 것이며 고민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여타 다른 동물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지 않은 생각하는 은혜를 주셨다. 그러므로 살아 있음은 계속해서 나를 성찰하고 뒤돌아볼 수 있는 증거이기에 살아 있는 영혼은 아름답다는 것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근래에 참 많이 불렀던 노래가 있었다. 복음성가 가수인 동방 현주씨가 부른 ‘다시 일어섭니다.’라는 찬양 가사의 한 대목이 심금을 울린다. “어리석고 미련한 나 믿음 없어 실패한 나 그런 나를 받아주시는 아버지 나 사랑합니다.” 자꾸만 되새기게 되는 가사가 귀하고 또 귀하다. 적어도 서평자인 나에게는. 살아 있다는 것은 다시 일어서게 되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단계로 나아감을 김미월은 역설한다. 그것은 지치더라도, 낙심이 된다고 하더라도, 솟아날 구멍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고통의 터널을 통과할 수 있는 방법은 과정을 중요시 여길 때라는 도전이었다. 중요한 것은 삶의 결론이 아니라 과정이다. 이것이 이 소설과 함께 하면서 얻은 두 번째의 가르침이었다. 각기 다른 공간과 시간의 주인공 영대와 지영의 공통점은 처해 있는 형편이 녹록하지 않다는 점이다. 동시에 보이는 그 어떤 신기루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무모해 보이는 것처럼 보이는 본인들의 삶의 과정을 누차 경험하려고 한다. 회피하거나 피난처를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관계되어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자기 발전의 시간을 삼으려고 한다는 점이었다. 그것이 의도이든 그렇지 않든. 과정의 불편함인가? 편리함의 결론인가? 응답하라. 내가 오늘을 살아가는 현재를 부정하지 않고 또 다른 긍정의 시간으로 만들어 가는 것은 살아 있는 자들의 특권이다. 많은 현대인들이 결론에 집착한다. 그러나 과정은 무시된다. 과정을 행복하게 여기는 사람이 진정한 행복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데도 대체적으로 인간이라는 군상들은 결론에 목숨을 건다. 동시에 그 결론을 내 세대에 보고 싶어 한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조차 이 말도 안 되는 게임에 올인 하려고 하며 오십보백보이다. 주군이신 예수의 삶을 결론으로 평가한다면 얼마나 철저하게 실패한 삶이었는가? 그는 항상 왕따로 살았다. 그는 항상 비주류였다. 그의 주변에는 별로 달갑지 않은 인생의 흔적들을 가진 자들만이 모여들지 않았는가? 어느 한 순간이라도 예수님의 삶이 오늘의 정의로 정의할 때 성공한 사람들의 자화상으로 비추어졌던 적이 있었는가? 그는 철저히 외롭고 힘든 길을 걷지 않았던가? 그리고 결국에는 모든 사람들 심지어는 3년 동안 동고동락했던 자들에게마저도 버림을 받고 비참하게 죽지 않았던가? 누가 감히 예수의 삶이 성공한 삶이었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예수께서 실패했던가? 예수는 성공하지는 않았지만 승리했다. 그 이유를 나는 예수께서 과정의 승리를 거두셨기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불편한 것처럼 보이지만 서평자는 그래서 주군을 따라가고 있다. 신영복은 이렇게 얍삽한 세류의 흐름 속에 있는 작금에 파란을 일으키는 돌을 던진 적이 있다. “현명한 사람은 자기를 세상에 맞추는 사람인 반면, 어리석은 사람은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려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세상은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인하여 조금씩 나은 것으로 변해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직한 어리석음, 그것이 곧 지혜와 현명함의 바탕이고 내용입니다. '편안함' 그것도 경계해야할 대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편안함’은 흐르지 않는 강물이기 때문입니다. '불편함'은 흐르는 강물입니다. 흐르는 강물은 수많은 소리와 풍경을 그 속에 담고 있는 추억의 물이며 어딘가를 희망하는 잠들지 않는 물입니다.” 주군이 간 길이 불편한 길인데도 그를 따르겠다는 팔로워들이 불편함이라는 과정을 무시하고 편안함이라는 결론을 얻기를 원하는 이 기막힌 아이러니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성공이라는 결론에 눈이 어두운 불행한 부류가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과정을 최선을 다해 달려갔음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그것이 주님을 따름으로 인해 야기된 실패라 하더라도 좌고우면하지 않는 멋있는 주인공들이 오늘 한국교회에 정작 필요한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 간절하다. 아홉 번째 방으로 이사해도 똑바른 삶을.
미국 뉴욕의 리디머 교회를 이끌고 있는 팀 켈러(Timothy Keller)는 다음과 같이 갈무리했다. “왜 어떤 사람들이 이 세상을 ‘똑바로 나라’(right-side-up-kingdom)라고 부르고 하나님의 나라를 ‘거꾸로 나라‘((the upside-down-kingdom)라고 부르는지 아는가? 권력과 명예를 강조하는 세상은 똑바르고 자연스럽게 보이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섬김과 희생은 전혀 불가능하고 부자연스럽게 보이기 때문이다.” 적용해보자면 무조건적인 승리주의만을 추구하는 결론만을 중요시 여기는 삶은 ‘똑바로 삶’이라고 정의하고 몰고 가는 이 시대, 반면 어리석게도 과정을 중요시 여기는 삶은 ‘거꾸로 삶’이라고 정의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오늘의 세속의 관점에서 볼 때 미련한 당신과 나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이 시대의 신실한 예수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내 방식의 결론이 아닌 주님의 과정에 주목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는 의지는 포기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자존감의 마지노선이지 않을까 싶다. 적어도 나와 당신이 오늘, 여덟 번째 방에서 살면서 세속적 궁핍함이 있다고 할지라도 또 어떤 경우에 아홉 번째 방으로 옮기는 한이 있더라도 주군이 가신 불편한 길을 사수해야 하는 영적인 자존감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나와 같이 되기를 글을 마무리하면서 베스도 총독과 헤롯 아그립바와 그의 정부였던 베니게와 자신을 고소했던 예루살렘 유대 종교 집단의 리더들 앞에서 수갑을 차고 있었던 그 누가 보더라도 아무런 힘이 없어 보이는 이미 50대에 들어선 바울사도가 그들 앞에서 외쳤던 선포가 크게 공명되어 들린다.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전율하게 만드는 감동의 외침이다. 우연인가? 글을 마치려고 하는데 이번에는 턴테이블에서 아다모의 ‘Tombe La Naige’(눈이 내리네) 가 은은하게 흘러나온다. 살아 있기에 이렇게 애잔한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감동도 준다. 제천 날씨가 눈이 내릴 것 같아서 더 애잔한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