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6.03.13 셀 사역2024-04-22 16:10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성형한 사실이 있으면 하게 된 동기, 혹은 하고 싶은 성형이 있으면 진솔하게 함께 나누어 보기.  

 
경배와 찬양 (WORSHOP)

●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찬송가 143장)
● 주의 보좌로 나아갈 때에 (복음성가)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성형이 아니라 수혈입니다.
● 본문: 베드로전서 1:17-21
1) 베드로는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결코 피하지 못할 대상자들을 누구라고 천명했는가?
● 본문 17절 참고:

● 갈라디아서 2:16절, 2:20-21 참고:  

2) 베드로는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그 심판에서 열외 되는 사람은 누구라고 천명했는가?
● 본문 18-19절 참고:

● 히브리서 9:12절과 22절을 참고:  

3) 행위인가? 은혜인가? 를 오늘 설교를 대입하여 함께 나누어 보자.
● 행위는 성형이고 외모를 보는 것이다.

● 은혜는 수혈이고 마음을 보는 것이다.  

 
사역하기 (WORK)
1) 제 6차 특별새벽기도회 사역 숙지하기
  ① 예배 담당(기도, 특송)
  ② 특새 헌금: 건축헌금으로 드려집니다.
  ③ 셀 별 집중 기도회: 새벽 예배 후
  ④ 아침 식탁 공동체

2) 최정희 집사 치료를 위한 중보기도
  ① 기간: 3월 28일(월)~ 5월 14일(토)까지
  ② 시간: 오전 6시~ 오후 10시까지 (1시간씩 담당)
(오순절 기간 16시간 세인 교우 릴레이 연속 기도회)

3) 부활 주일 온 가족 초청 예배
  : 27일, 오전 11시

4) 중보기도
  ① 담임목사님을 위하여
  ② 제 6차 고난주간 기념 특별새벽기도회와 릴레이 기도회를 위해서
  ③ 환우들을 위하여(최정희 집사 외)
  ④ 셀 원들을 위하여

5) 치유기도
6) 헌금
7) 광고
8) 폐회: 주기도
  

 
설교요약 (SUMMARY)
3월 13일 주일 오후 예배 설교 (베드로전서 열 번째 강해)

본문 : 베드로전서 1:17-21
제목 : 성형이 아니라 수혈입니다. 

오늘 본문 17절에서 베드로는 소아시아의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선포하며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 것을 권고합니다.

하나님은 외모가 아닌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다윗 왕을 선택하실 때 사무엘과 나눈 대화에서도 동일하게 말씀하셨습니다(사무엘상 16:7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사무엘에게 하나님이 행하셨던 단어 ‘외모’는 문자적으로 ‘눈’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사람들이 보는 공통점은 시선입니다. 즉 외모를 본다는 것은 눈으로 보는 시각적인 형태라는 말입니다. 이에 반해 ‘중심’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레바브’는 ‘마음’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바로 사람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마음은 인간이 행동하는 모든 것의 근원지이자 유출 진원지’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6:21절에서 주님은 산상수훈으로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심판의 잣대를 본문 17절에서 ‘각 사람의 행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각 사람의 행위는 각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결과물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근거는 그러므로 외모가 아니라 마음 상태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 땅에 존재하는 것 가운데 가장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렘 17:9).
열왕기하 21장을 보면 북왕국 이스라엘의 제 7대 왕인 아합이 나봇에게 이스르엘 지역에 있었던 포도원을 돈 주고 팔라고 종용을 하자 나봇이 그 포도원은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것이라 그리 할 수 없다고 거절을 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아합이 심히 속상해서 식사를 전폐하고 상심하고 있음을 안 그의 사악한 아내였던 이세벨이 나봇에게 누명을 씌워 그를 살해하는 교사 명령을 내렸고 결국 나봇은 이유도 모른 채 돌에 맞아 죽는 비운을 맞이합니다. 이렇게 나봇을 죽인 이세벨이 자기의 남편에게 그 땅을 차지하게 했던 장면을 역사가는 생생히 기록합니다. 결국 이 기사는 엘리야의 예언대로 이세벨이 죽을 때에 그녀의 시체를 개들이 핥게 되는 악인의 몰락을 보지만 또 다른 사실은 아합의 무너진 마음을 알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아합은 악한 왕으로 우리들에게 인식되어 있으나 사실, 아합의 심령은 마음이 여린 자였습니다. 아합은 마음에 들었던 포도원을 사기 위해 주인인 나봇을 찾아갔고 그에 상응하는 금액을 지불할 테니 포도원을 팔라고 부탁을 합니다(왕상 21:2). “아합이 나봇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포도원이 내 왕궁 곁에 가까이 있으니 내게 주어 채소밭을 삼게 하라 내가 그 대신에 그보다 더 아름다운 포도원을 네게 줄 것이요 만일 네가 좋게 여기면 그 값을 돈으로 네게 주리라” 이 구절에서 아합이 나봇에게 제안한 내용이 ① 포도원을 내게 주는 대신 더 좋은 포도원을 대신 주겠다는 것과 ② 포도원을 받기 싫으면 돈으로 사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열왕기상 역사가는 아합이 이렇게 나봇에게 제안한 이유를 나봇의 포도원을 구입하여 채소밭으로 삼아 그것으로 국가적인 재정에 이익이 되는 어떤 사업을 한다든지 아니면 그것을 통해 다른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채소를 가꾸기 위해서였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나봇이 정중하게 조상의 유산이기에 팔 수 없다고 거절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국의 왕이라면 물리력을 동원해서라도 승부수를 띄웠을 법한데 아합은 그 일로 인해 몸 져 누웠다고 역사가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아합의 마음은 이런 성정의 사람이었습니다. 사정이 어떻든 사악한 아내가 대신 물리력을 동원하여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빼앗아 나봇의 포도원을 남편 아합에게 선사합니다. “아합은 나봇이 죽었다 함을 듣고 곧 일어나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러 그리로 내려갔더라”(열왕기상 21:16절).
이 장면을 보면 여린 마음의 아합의 심성과 식음을 전폐하며 고민했던 아합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나봇이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그 포도원을 접수하려 내려가는 아합에게서 섬뜩함이 느껴집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인간의 상한 마음을 봅니다. 이것은 예외가 없습니다. 차려진 밥상을 싫다할 사람은 이 땅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합이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이며 그 땅을 차지하는 것은 마음의 부패함을 원죄로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성경적 내증을 통해 본문과 연결하여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누고 공유해야 할 은혜는 훗날 하나님이 우리들을 계수하실 때 보시는 것은 바로 이 마음의 상태라는 점입니다. 마음의 상태를 본문에서 베드로는 ‘각 사람의 행위’라고 못 박고 있습니다. 행위에 따라 심판하신다는 이 말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의 행위에 따라 심판하실 때, 하나님으로부터 당신의 마음이 흡족한 삶을 살았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존재는 단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절망입니다. 분명히 마음이 가는 행동을 하며 산 우리들은 하나님의 예리한 심판의 선언에 긍정의 평가를 받을 만 한 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문 18-21절을 보면 베드로는 우리에게 절망을 선포하고 있지 않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본문 18-19절). 베드로가 강력하게 천명하고 있는 것은 우리에게 조상들이 물려준 행실은 헛된 행실들뿐이었으나 그 행실에서 대속함은 받은 것은 금이나 은으로도 메꿀 수 없는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받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지은 죄의 행실을 탕감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어린 양 예수의 피로만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본문 18절에 기록된 ‘대속함을 받은 것’이라는 단어는 ‘엘뤼트로데테’의 번역입니다. 헬라어 ‘뤼트로’는 문자적으로 아주 비싼 값을 주고 산 노예를 주인이 자유를 선언하여 자유인으로 방면시켜줄 때 쓰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베드로는 이 단어를 우리 모두는 헛된 행실을 행하던 죄의 종들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8:34절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우리들은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죄의 종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문에서 베드로가 말한 대로 ‘조상이 물려준 헛된 행실’로 인해 심판대에서 처절하게 심판을 받아야 할 처지인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심판에서 열외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엘뤼트로데테’(대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가 골고다에서 흘려짐으로 인해 심판에서 열외 된 것입니다. 이것을 한량없는 은혜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한량없는 은혜를 창세전부터 계획하셨고 어린 양 예수를 통한 구원의 소망과 믿음을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본문 20-21절에서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린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한 치의 오차가 없이 하나님은 이 놀라운 구원의 계획을 독생 성자 예수를 통하여 성취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은 1) 하나님의 심판을 성형으로는 피하지 못합니다.

성형은 행위이자 율법입니다. 우리들은 가끔 착각하며 내가 무엇을 하였기에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셨다고 믿습니다. 외모의 그럴듯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에서 유예되지 못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2:16절에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정의했으며, 갈라디아서 2:20-21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고 그 은혜를 고백했습니다. 성형으로 겉 사람을 그럴듯한 사람으로 만들려는 노력은 영적으로 백해무익합니다.

2) 심판은 수혈로만 피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피로 수혈을 받은 흔적이 없으면 우리들은 훗날 하나님의 심판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본문 19절). 그러나 만에 하나 예수의 피로 수혈을 받았다면 우리는 대속의 은총으로 인해 영적으로 구원받은 자의 반열에 굳게 설 것입니다.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브리서 9:22절).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의 대속을 히브리서 9:12절로 요약하였습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예수께서 성소에 들어가셔서 단번에 피를 흘려주신 그 은혜가 십자가의 은혜임을 기억합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정답은 예수의 피로 수혈 받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