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내가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했을 때의 기쁨과, 똑같다고 생각했을 때의 자괴감 솔직히 토로해 보기 | 경배와 찬양 (WORSHOP)● 세상 모두 사랑 없어 (찬송가 503장) ● 내가 먼저 손 내밀지 못하고 (복음성가)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 다릅니까? ● 본문 : 베드로전서 1:13-16 1) 베드로가 말한 ‘거룩함’을 레위기서와 연관하여 세 가지의 성결로 말해보자. ● 설교에서 선포된 다섯 가지의 내용을 정리하여 말해 보자.
① 종교적 성결 (레위기 19:3-4절 참고): ② 윤리적 성결 (레위기 19:9-10절 참고): ③ 종교적 성결과 윤리적 성결의 종합 (레위기 19:17-18절 참고): |
2) 세 가지의 성결을 종합하면 거룩함 즉 성결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렇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① 설교의 테마를 중심으로 말해 보자.
② 산다는 것은? |
3) 주실 은혜는 무엇이고, 아들답게 산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눈 뒤에 그렇게 살기 위하여 내가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실천의 내용들을 결단해 보기. ● 담임목사의 설교를 피드백 함으로 조금 구체적으로 말해보자. ① 주실 은혜: ② 아들답게 사는 것: ● 실천의 내용들 결단해 보기 | 사역하기 (WORK)※ 사순절 영성 회복의 스케줄 확인하기 1) 중보기도 ① 담임목사님을 위하여 ② 사순절 릴레이 기도회와 고난주간에 있을 제 5차 특별새벽기도회를 위하여 ③ 셀 원들을 위하여 2) 치유기도 3) 헌금 4) 광고 5) 폐회: 주기도 | 설교요약 (SUMMARY)3월 6일 주일 오후 예배 설교 (베드로전서 아홉 번째 강해)
본문 : 베드로전서 1:13-16 제목 : 다릅니까?
교회가 영적인 전투에서 손을 놓은 채 무감각해졌거나 아예 영적 전투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그 까닭은 바로 교회가 세상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세상과 달라야 하는 이유를 오늘 본문에서 살펴봅시다.
베드로 사도는 소아시아에 있는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영혼의 구원을 받는 것이 궁극적인 믿음의 결론임을 선포하고 위로하면서 여러 가지 시험으로 인해 근심하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도리어 크게 기뻐하라고 권했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형제들을 향하여 그 정도로 머무르지 않고 이 세상이 나그네임을 알고 본향을 향하여 달려가는 동역자들에게 조금 더 신실한 은혜 위에 설 것을 종용합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본문 15-16절). 이 구절은 베드로가 레위기 11:44절 말씀을 차용한 것입니다. 레위기 11장은 율법에서 금하고 있는 부정한 동물과 정결한 짐승을 구별하는 장입니다. 하나님은 배로 기어 다니는 짐승은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짐승들은 가증한 것들이라고 정의하신 뒤에 주신 말씀이 바로 레위기11:44절입니다.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거룩’이라는 단어 ‘카도쉬’는 ‘분리되다. 구별되다.’라는 의미와 흡사한 단어입니다. 구약성경 레위기 17장부터 26장을 소위 ‘성결법전’(Holiness Code)이라고 하는데 이 단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는 거룩함의 공동체가 되어야 할 분명한 이유를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레위기 전역에서 당신의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를 향하여 ‘카도쉬’ 할 것을 종용하셨습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레위기 19:2절에서 이렇게 선언하신 주님은 거룩함의 성결을 다음 세 가지로 구분하여 제정하셨습니다.(‘모세오경 바로 읽기’ 차준희 교수의 성결의 부연 설명) ① 19:3-4절: 종교적인 측면의 성결 (안식일을 구별하여 지키라는 것, 다른 헛된 것(우상)들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않는 것: 개인적인 성결) ② 19:9-10절: 윤리적인 측면의 성결 (곡식을 밭에서 거둘 때 다 거두지 말고 일부를 남기라는 명령에 순종하는 것, 사회적 성결의 실천: 사회적 성결-이웃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삶) ③ 19:17-18절: 종교와 윤리의 혼합적인 성결 (네 이웃을 사랑하라) 레위기에 기록된 ‘거룩’ 이라는 단어의 영적인 의미를 살펴 본 까닭은 본문에서 베드로 사도가 인용한 것이 바로 레위기의 성결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거룩하라’는 개념이 강조하는 것은 적어도 영혼의 구원을 받은 백성들이 걸어야 할 거룩한 삶이 개인적 성결, 윤리적 성결, 그리고 이 두 가지를 한 꺼 번에 종합하고 있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성결의 의미까지 합쳐보면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삶이란 세속적 가치로의 쓸려감이 아닙니다. 거룩한 삶은 다름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심으로 너희도 거룩하라 는 말은 내가 세상에 쓸려가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세상의 조류와 흐름과는 반대되는 편에 서 있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오늘 본문 15절에서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선언할 수 있었던 것은 누가복음 5장에서의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게네사렛 호수에서 밤새도록 고기를 잡기 위해 수고를 했지만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채로 그물을 거두고 있는 베드로에게 주님이 오셔서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명령을 받고 순종한 뒤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잡아 한 배에 다 채울 수가 없어 옆에 있는 동무의 배에까지 채우게 된 이 일로 엄청난 충격을 경험한 베드로가 주님께 나아가 제일 먼저 고백한 말이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누가복음 5:8) 이었습니다. 유진 피터슨은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하였습니다. “이것을 본 시몬 베드로가 예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주님, 저를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인이라서 이 거룩함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저를 내버려 두십시오.” 베드로가 주님과 자신의 사이에는 도저히 좁힐 수 없는 ‘거룩함’의 간극이 있음을 발견했다는 통찰을 얻습니다. 세상과 분리되는 시작은 내가 죄인임을 인식하면서부터입니다. 세상과 같아서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세상과 같은 방향을 향할 때에는 결코 주님이 요구하시는 성결의 은혜를 맛보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세상과 다르게 사는 삶이란 1) 주실 은혜를 견고하게 붙드는 것입니다.
본문 13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는 구절은 문자적으로 무언가를 실천하기 위하여 마음 자세를 가다듬는 것을 의미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실천신학과 교수로 사역한 에드먼드 클라우니 박사는 베드로서 주석에서 “행동개시 할 만반의 준비를 하라.”고 해석했습니다. 적어도 순교의 핍박이 다가오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들에게 주신 은혜를 온전히 바라 볼 것”을 명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13절의 ‘온전히’ 라는 부사 ‘텔레이오스’는 흔들리지 않는 것을 말해주는 상태의 부사입니다. 은혜를 바라보라는 권면에 전제되는 부사가 ‘흔들리지 않는’ 견고함입니다. 오늘의 우리들에게 흔히 밀려오는 영적인 위험은 흔들리게 만드는 세속의 가치들이 정답인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줄타기하며 경계선에 서서 한 쪽으로 치우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러나 이성은 우리를 열광시킬 수 있을지는 모르나 그것이 나를 하나님의 은혜로 견고하게 이끌지는 못한다는 점을 기억합시다. 이성적 믿음이 주는 영향, 감동, 혜안이 분명히 있지만 이성으로 건져 올릴 수 없는 영역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영역입니다. 바로 그 은혜의 공급자이자, 완성자이자, 종결자가 다시 오실 주님임을 흔들리지 말고 가슴에 담아 바울과 같이 고백합시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롬 8:18)
2) 아들답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인침 받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본문 14절, 요한복음 1:12). 그러나 우리들이 처음부터 주님의 자녀였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의 신분은 그 반대였습니다(에베소서 2:1-3절).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영접하고 난 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분명한 복이지만 또 그만한 부담이 주어졌습니다. 바로 자녀답게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4절에서 베드로는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라고 말했습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 때와 같이 개인적인 사욕을 추구하던 그런 삶을 버리고 순종하는 자녀로서의 삶을 살라고 권한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과 다른 것은 우리는 세상의 자식들의 자화상이요 명제인 진노의 자녀가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김기석 목사의 ‘오래 된 새 길’에서 작가 고은 선생이 가르쳐 준 글을 하나 소개합니다. “나는 저 멀리 벵갈 바다 짙푸른 바다를 다 안단다. 어느 곳에서는 바다의 짠물을 뚫고 민물이 솟아나온다고 한다. 뱃사람들은 먼 바닷길에서 물이 떨어지면 그곳으로 가서 물을 마시게 된단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곳의 이름을 도솔천이라고 부른다. 생명의 물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짠물로 인하여 갈증을 이기지 못할 때 우리들은 바다 한 복판에 있는 솟아나는 민물 즉 샘물이 되어 그들의 갈증을 풀어주는 하나님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세상과 같지 말고 같다면 달라져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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