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6.02.28 셀 사역2024-04-22 16:09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신앙생활을 하면서 기억에 남는 경건 훈련의 흔적들을 나누어 보십시다. (예: 금식, 작정기도, 피정, 일천번제)  

 
경배와 찬양 (WORSHOP)
● 옳은 길 따르라 의의 길을 (찬송가 516장)
● 나의 등 뒤에서 (복음성가)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 공부해야 합니다.
● 본문 : 베드로전서 1:10-12
1) 본문에서 베드로가 말했던 선지자들이 부지런히 연구하고 살핀 결과 얻어낸 결과물이 무엇입니까?
● 설교에서 선포된 다섯 가지의 내용을 정리하여 말해 보자.




  

2) 성도가 부지런히 연구하고 살필 영적인 공부는 무엇인가? 테마를 중심으로 말해보고 자세히 부연해 보자.


  

3) 사순절 기간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영적 공부를 선포하고 실천하도록 함께 기도하자.
● 영적 공부 나누기:
● 실천할 수 있도록 합심하여 기도하기:  

 
사역하기 (WORK)

※ 사순절 영성 회복의 스케줄 확인하기

1) 중보기도
① 담임목사님을 위하여
② 사순절 기간을 경건하게 보내기 위하여
③ 셀 원들을 위하여
2) 치유기도
3) 헌금
4) 광고
5) 폐회: 주기도
  

 
설교요약 (SUMMARY)
2월 28일 주일 낮 예배 설교 (베드로전서 여덟 번째 강해)

제목: 공부해야 합니다.
본문: 베드로전서 1:10-12

베드로의 세속적인 지식은 일천했습니다. 그가 알고 있었던 것은 고기 잡는 지식이 전부였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학문적으로 견고한 자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다만 성령의 인도함에 따라 성령께서 주시는 영적 혜안으로 사역을 했을 뿐입니다. 베드로는 학문적 기초에 있어서는 약한 자였습니다. 그러니 그가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는 한발자국도 지성적인 면에서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수 있는 성향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성령의 은혜를 받고 난 뒤에 겸손한 영이 임한 자였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오늘 본문 10절에서 믿음의 결국이 영혼의 구원이라는 이 놀라운 은혜가 자기의 독창적인 보고물이 아니라 선지자들이 결과물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참 주목할 만한 아주 중요한 수식어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재 강조하지만 믿음의 결국이 영혼의 구원임을 알아낸 자들은 선지자들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 선지자들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 영적 성장은 탄생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교훈입니다.
이 테제의 배경은 제자훈련에서 따 왔습니다. 제자훈련 기초반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이 무엇입니까? 제자는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일맥상통합니다. 영적 성장은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피나는 훈련과 연습을 통해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영적 성장이라는 단어와 구원 받음이라는 은혜의 분명한 구분입니다. 구원받음의 은혜는 훈련으로 얻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에베소교회에 주시는 말씀 그대로 하나님의 전적인 선물입니다. 에베소서 2:8절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분명한 하나님의 진리요 말씀입니다. 그러나 반면, 영적 성장은 하나님의 전적인 선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개인의 영적 성장은 개인의 훈련과 연습으로 주어집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디모데전서 4:6-7절을 주목하십시다.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보이십니까? 영적 성장은 훈련과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이. 본문 10절로 돌아갑니다. 선지자들이 행했던 것이 무엇이라고 베드로가 서신으로 전합니까?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라고 말합니다. ‘연구하다’로 번역된 ‘에크제테산’과 ‘부지런히 살펴서’라고 번역된 ‘엑셀류나산’은 공히 같은 뜻이 있는 동사입니다.  뭔가를 열심히 찾는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무언가를 열심히 찾는 것은 그 무언가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기에 찾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은 영혼의 구원이 무엇인지 밝히기 위해 최선을 다해 그 뜻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선지자들의 몫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대언하는 것이 사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소그룹 성경 공부를 통해 ‘선지자’라는 히브리어가 ‘나비’임을 여러 차례 밝혔습니다. 구약 성경에 포진되어 있는 예언자 즉 ‘나비’ 선지자는 자신이 독창적으로 주문을 외우거나 뭔가 종교적인 행위를 해서 앞의 일을 미리 내다보는 무당과도 같은 豫言을 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일어날 일을 위탁하셔서 그 말을 대신 전하는 대언자 성격의 預言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 세인 교우들이 가슴에 뜨겁게 새겨야 할 은혜를 발견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미리 알려준 예언의 메시지를 가리켜 ‘신탁’ 이라는 신학적 용어를 씁니다. 신탁은 하나님의 언어입니다.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언어가 인간인 예언자, 선지자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얼마나 떨리고 두려운 일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언어를 인간의 언어로 전한다는 것이 말입니다. 이런 어마어마한 일을 위탁받은 선지자들은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지속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훈련을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연결고리를 놓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에서 이탈되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러려면 선지자들이 중단하지 않고 계속해서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영적 성장이었습니다. 경건의 훈련이었습니다. 자기를 쳐서 복종하는 일이었습니다. 즉 열심히 공부한 것입니다. 그것만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를 수 있는 인간의 행위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선지자들이 이와 같이 연습하고 훈련하여 얻은 결과물이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11-12절은 우리에게 그 답을 제시해 줍니다.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놀라운 보고가 아닙니까? 조금 선명하게 정리해 보십시다. 선지자들이 훈련과 연습 즉 열심히 공부함으로 얻게 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었다는 말입니까?
① 예수께서 고난을 당한 뒤의 일을 알게 하셨다. ② 그 고난 뒤에는 영광이 예비 되어 있다. ③ 이 영광은 오늘 예수로 인하여 고난을 받는 자들에게도 임할 것임을 미리 계시로 알려준다. ④ 이제는 성령이 너희 고난 받는 자들을 돕는다. ⑤ 천사들도 살피며 고난 받는 자들을 응원한다. 이것을 선지자들이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지금 저는 선지자들이 부지런히 찾고 연구하여 얻게 된 하나님의 뜻 5가지를 열거했습니다. 열거한 5가지의 내용은 믿음의 결국인 영혼의 구원을 받은 자들에게 주어진 그리고 또 주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지속적인 은혜라는 결과물입니다. 우리들이 이 험악한 세상을 살면서도 왜 쓰러지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구원 받은 저와 여러분들에게 이 5가지의 은혜를 오늘도 주시기 때문이 아닙니까? 동서남북을 바라보면 신앙의 도움이 되거나 긍정적인 기여를 해주는 일들은 보이지 않고 믿는 자들을 쓰러뜨리려는 일들이 횡행하고 있음을 여지없이 목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이 든든히 서가는 이유는 결코 나의 믿음이 든든하기 때문이 아니라 앞에서 열거한 하나님의 일하심이 현재진행형으로 우리들을 독려해 주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본문에 기록된 말씀 그대로 선지자들처럼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영적 성장을 위해 공부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세인 지체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피는 구체적인 대안을 설교의 마지막 부분에서 제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간단하게 교우들에게 두 가지만 제시하고자 합니다.
1) 말씀이 나를 읽도록 말씀을 읽기를 원합니다.
오늘 우리 교우들에게 제시하는 첫 번째 대안을 가볍게 여기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할 수 있는 참 귀한 일은 말씀 읽기입니다. 그러나 오늘 담임목사가 제시하는 말씀 읽기는 그냥 말씀 읽기를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동안 컴퓨터에 있는 프로그램 중에 성경 필사하는 프로그램이 인기를 얻었던 적이 있습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이 프로그램을 동참하여 릴레이로 성경 쓰기에 참여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하지 않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추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친필로 필사를 하는 것도 아니요 컴퓨터 자판으로 성경을 쓰기 위한 씀을 제가 별로 바람직하지 않게 생각하는 것을 일정량의 글을 쓰기 위한 씀은 영적인 감동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할당량을 채우는 것 이상의 별 도움이 없다는 말입니다. 말씀이 나를 읽는 읽기는 컴퓨터 자판에 성경을 쓰는 것으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말씀이 나를 읽는 것은 삶의 언저리에 밑줄을 긋고 그렇게 살아가는 읽음입니다. 내 사랑하는 한국교회의 절망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이라고 지칭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내 삶의 밑 줄 긋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성경을 읽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을 읽고 난 뒤의 성령께서 나를 뒤흔들고 삶으로 치열하게 변화된 삶을 살게 하실 것이라는 기대감이 없이 성경을 읽는다는 불행입니다. 말씀을 읽으면 부담이 백배가 되더라도 그렇게 사는 것까지 행할 때 말씀이 나를 읽는 것임을 명심하고 세인은 그렇게 살기를 소망합니다.
2) 듣기 위해 듣지 말고 살기 위해 듣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로마서 10:17절을 소개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렇습니다. 새 신자들과 상담을 하면서 제일 많이 제가 인용하는 성경 말씀입니다. 분명한 것은 믿음의 출발은 들음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듣느냐? 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이 들음은 참 중요한 권면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17절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레마토스 크리스투’ 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문자적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신약성경에서 ‘로고스’라는 단어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이기는 하지만 로고스의 말씀이 내 안에서 살아서 움직이는 말씀으로 적용될 때 사용되는 문자는 ‘레마’입니다. 로마서 10:17절에 기록되어 있는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그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말한 말씀이 바로 레마토스 즉 레마 라는 단어로 기록되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몇 번을 강조하거니와 나의 영적인 성장을 북돋아 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러나 듣기 위한 들음이 될 때 그 말씀은 로고스에 머물게 됩니다. 그러므로 살기 위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살기 위해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은 레마가 되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공부에 소홀하지 마십시다. 영적인 성장은 결코 그냥 주어지지 않습니다. 말씀이 나를 읽을 수 있는 말씀 읽기를 통해 삶에 밑줄을 치시고 그렇게 사는 훈련과 공부가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로고스로 듣기 위한 들음에 멈춰 있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레마로 듣는 영적 성장을 위해 부단히 공부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하나님의 방향성을 깨달아 알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