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여러분이 살면서 경험한 영혼이 참 깨끗했던 사람을 한 번 소개해 보자. | 경배와 찬양 (WORSHOP)● 내 평생에 가는 길 (찬송가 413장) ● 내 영혼이 은총 입어(찬송가 438장)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본문: 베드로전서 1:6-9 ● 제목: 믿음의 결국 1)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균형에 대하여 영적인 시각으로 정리해 보십시다. ● 이미 온 하나님의 나라: ●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 ● 건강하고 균형 잡힌 하나님 나라: (마태복음 25장 참고) |
2) 1번의 해석과 맞물려 잘못하면 소홀이 여길 수 있는 성경적인 교리를 올바르게 정리해 보자. ● 영혼에 대한 구원의 관점 1) 무시하고 소홀히 여기는 경우를 말해보자 2) 가장 소중한 가치 |
3) 나는 마태복음 10:28절의 말씀을 적용할 때 지금 영의 상태가 어떤지를 진단하고 나누어보자.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1) 전자인가? 후자인가? 2) 전자가 신앙의 행태라면 후자가 나의 신앙의 패러다임이 될 수 있도록 결단하고 기도하자. | 사역하기 (WORK)1) 중보기도 ① 담임목사님을 위하여 ② 사순절 영성 회복의 스케줄 정하기 ③ 새신자들의 정착을 위하여 ④ 사순절 기간을 경건하게 보내기 위하여 ⑤ 셀 원들의 중보기도를 위하여 2) 치유기도 3) 헌금 4) 광고 5) 폐회: 주기도 | 설교요약 (SUMMARY)2월 14일 주일 오후 예배 설교 (베드로전서 일곱 번째 강해)
본문 : 베드로전서 1:6-9 제목 : 믿음의 결국
요한복음 3장에서 표적의 근원을 찾는 니고데모와 이에 대하여 영적인 답변으로 거듭남을 말씀하신 주님의 대화에서 주님은 우리들이 영적인 존재이기에 영혼의 만족함이 없는 한 결코 진정한 만족을 경험할 수 없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들이라면 예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궁극적으로 원하고 계시는지를 냉정하게 파악하고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가 우리에게 아주 적확하게 알려줍니다.
베드로 사도는 곧 순교를 당할지도 모르는 핍박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위기의 상황 속에서도 도리어 기뻐하는 영성을 가져야한다고 선포했습니다. 그 이유는 정금 같은 믿음이 우리들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며, 동시에 그 핍박을 견디고 나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당신의 아들 예수를 다시 보내실 그 때가 되면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두 가지의 은혜와 더불어 중요한 또 하나의 은혜가 우리들에게 임할 것임을 베드로는 분명히 합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본문 8-9절). 베드로는 예수와 함께 3년이라는 세월동안 동고동락하며 그 분의 일하심을 눈으로 목도했습니다. 예수께서 행하셨던 기적은 물론이고 그 분의 일거수일투족을 옆에서 그리고 가장 지근거리에서 경험했고 느꼈던 자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성령 받기 이전까지는 승리보다는 실패가 더 많았고, 칭찬보다는 책망을 더 받은 자였습니다. 본인도 이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했기에 8절에서 베드로는 소아시아의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과거에 예수를 너희는 보지 못하였지만 그 분을 사랑하는구나. 그리고 지금도 예수를 보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그 분을 믿는 믿음 한 가지로 도리어 기뻐하는구나.” 이 말은 이 편지의 수신자들에 대한 격려와 극찬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본인이 할 수 있는 근거를 하나 제시합니다.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본문 9절). 성도들의 신앙의 여정 중에 어떤 어려운 환경이 닥친다고 하더라도 그 환경이 문제가 되지 않는 이유는 그 환경은 성도들이 이미 영혼의 구원을 받은 존재들이기 때문임을 베드로가 역설하고 있습니다. ‘영혼’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푸쉬케’는 인간의 육체와는 구별되는 본질을 말 할 때 사용되는 영혼이라는 의미의 대표적인 헬라어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아주 빈번히 영적인 호흡을 할 때 사용되곤 합니다. 본문에서 저자는 바로 이 푸쉬케의 구원을 받은 그 결과로 인하여 기뻐할 수 있는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영혼의 구원을 받은 것 때문에 여러 시험이 와도 기뻐하며 불로 연단하여도 기뻐한다고 언급했지만 또 하나 간과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베드로가 가지고 있었던 신학적 성찰을 본문 9절에서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 영혼의 구원이 믿음의 결국이라고 언급한 점입니다.
믿음의 종착역이 영혼의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석하면 진보적인 신학계에서는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을 너무 개인 구원의 측면으로 해석한다고 공격합니다. 한국교회가 그 동안 너무 개인적인 구원에 몰두하다보니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고 타박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구원론에 대한 영역에서만 논쟁거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영역에서도 치열한 논쟁의 내용입니다.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를 주장하는 진보신학계의 관점과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말하는 보수 신학계의 치열한 공방을 비롯하여 예수에 대한 관점 이해도 첨예한 논쟁의 대상입니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천착하는 진보주의 신학과 신앙적 그리스도를 주장하는 보수 진영 간의 대립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절충하여 근래 신학계에서 주장하는 하나님 나라는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와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 나라는 유리되어 있거나 단절된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항상 긴장감 속에서 서로 잇대어 있다고 해석합니다. 이 말은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의 속성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자들은 어떤 의미에서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자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때에 일어날 일들을 설명하는 종말장인 마태복은 24장에서 그 날에 발생할 일들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하신 주님께서 그 날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게 될 자와 그렇지 못한 자들을 분명히 구별하는 메시지를 남기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될 자의 이 땅에서의 삶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 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태복음 25:34-36절). 이렇게 선언하신 주님은 이런 삶을 산 의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약속을 하셨습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태복음 25:40절). 그런데 주님의 이 권고 다음에는 반대의 이야기가 열거됩니다. 이번에는 내 형제를 보살피거나 지극히 작은 자들을 섬기지 않은 자들입니다.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5:45-46절). 이 주님의 말씀에서 받게 되는 교훈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가는 자의 궁극적인 결과는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 나라에서의 승리로 이어지고 있다는 교훈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에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에서 공의와 정의를 이루며 살아가는 자는 곧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사는 것과 동일하다는 교훈입니다.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을 하나의 예로 들면서 보수적인 생각과 진보적인 생각을 아우르고 있는 작금의 논쟁을 살펴 본 것처럼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분명히 이런 긴장감이 있고 균형 잡힌 신학적인 교회의 교리들에 대하여 열린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 아주 예민하게 경계하는 것이 있습니다. 후기 산업주의를 살고 있는 오늘의 상황이 종교를 문화로 인정하는 수준이라고 해도 다분히 성경이 주장하고 있는 양보할 수 없는 본질까지도 뒤흔들려고 하는 사탄적인 행태를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이러한 행태는 참으로 다양하고 교묘하게 교회에 침투하여 성도들을 뒤흔들고 있습니다.
※ 영혼에 대한 무시함입니다.
오늘, 사탄은 우리들이 믿어야 할 것은 보암직한 것, 먹음직한 것,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 보이는 것이라고 종용하며 부추깁니다. 민감하게 경계할 것이 있습니다. 보암직한 것은 육체적인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먹음직한 것도 육체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것은 아주 매력적으로 육체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함몰되면 정비례하며 따라오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영혼이 철저하게 피폐해진다는 것입니다. 영혼이 느낄 수 있는 가장 존귀한 것들이 망가진다는 것입니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엘리위젤의 걸작 희곡인 ‘샴고 로드의 재판’에서 눈에 보이는 것,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 육감적으로 경험하고 체험할 수 있는 것, 영적인 것이 아니라 육적인 일체의 것들이 사탄에게 속해 있다는 경계를 교훈의 메시지로 받아야 하겠습니다. 이것들이 지금 하나님의 사람들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영적인 것에 민감해 하지 말라고 속삭입니다. 영적인 것보다 더 매력적인 것이 이성주의이라고, 합리주의라고, 과학주의라고, 계몽적 철학이라고 우리들에게 추파를 던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세속적 현대인들은 말 할 것도 없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자들조차 속없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오늘 베드로의 첫 번째 편지에 담긴 본문 마지막 구절은 우리에게 천군만마와 같은 영적 무기로 다가와 우리를 무장시켜 줍니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영혼의 구원이 믿음의 궁극이라는 점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찬송가 413장의 가사를 쓴 호레시오 게이츠 스파포드처럼 우리들의 궁극적인 믿음의 결과는 영혼의 구원임을 믿어야 합니다. 내 영혼의 구원을 포기한 자는 아무리 다른 말로 포장한다 하더라도 가장 소중하고, 가장 귀한 것을 놓치는 것임을 상기해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의 베드로는 믿음의 결국은 곧 영혼의 구원이라고 말했지만 베드로의 주군이셨던 주님은 이렇게 복음서에서 역설하신 것입니다(마태복음 10:28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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