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5.12.20 셀 사역2024-04-22 16:06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내 기억에 남는 가장 감동적이었던 예배 나누기  

 
경배와 찬양 (WORSHOP)
● 찬양하라 내 영혼아 (찬송가 621장)
● 하늘의 문을 여소서 (복음성가)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본문: 누가복음 17:11-19
● 제목: 나는 예배하네
1) 사마리아 출신 나환자가 제사장에게 가지 않고 예수님께로 돌아온 이유를 예배와 관련하여 말해보자.
● 힌트(제사장과 대제사장)  

2) 왜 예배에 무너지는가?
● 설교 테제를 중심으로 말해보자.
● 우선순위의 개념에서 토론해 보자. (주일 설교 전체를 듣고 난 뒤의 감회 나누기)  

3) 예배드리기에 승리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궁극적인 축복은 무엇인가? 더불어 예배드리기는 타협의 대상이나 논제가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인 적용하기.
● 예배드림의 궁극적인 축복:
● 구체적인 실천 방안 모색하기  

 
사역하기 (WORK)
1) 중보기도
*교회의 기도 제목
  ① 담임목사님을 위하여
  ② 성탄 전야 축하의 밤 예배를 위하여
  ③ 명품신앙으로 한 해를 잘 마무리 할 수 있도록
  ④ 2016년 1월 10일에 있을 제 8회 사무총회를      위하여
  ⑤ 환우들을 위하여

2) 치유기도
3) 헌금 기도
4) 광고

5) 폐회: 주기도  

 
설교요약 (SUMMARY)
2015년 12월 20일 주일 낮 예배 (대강절 네 번째 주일)

제목: 나는 예배하네
본문: 누가복음 17:11-19

  지금 한국교회에 임한 위기 중에 하나는 ‘예배하기의 위기’입니다. 가톨릭 신자이자 시인 구상 선생께서 하셨던 말을 한 번 새겨 봅시다. “선생님, 온 세상이 온통 구정물이고 흙탕물인데 이럴 때 크리스천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라는 질문에 “크리스천으로 흘려보낼 수 있는 맑은 물을 계속 흘려야 합니다.”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목사들이 무너졌다고 해서 상식적으로 하나님께 귀하게 붙들려 있는 성도들이 막 살아야한다는 것은 어안이 벙벙해지는 일입니다. 지금은 목사들보다 더 훌륭한 평신도 사역자들이 수두룩하고, 성경을 누구나 알기 쉽게 이해하는 만인제사장적인 현대를 살아가는 시대이기에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것은 수긍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견지해야 할 은혜의 삶을 포기한다면 그것처럼 손해를 보는 일이 없으며 미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에 하나 내가 섬기고 있는 교회의 조직 자체가 혹은 구조 자체가 평신도의 힘으로 일탈한 목사를 어찌할 도리가 없는 상황이라면 조금의 주저함이 없이 교회를 옮겨서라도 신앙의 회복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성도들이 주변적인 상황으로 인해(목사까지 포함하여) 신앙적인 궤도에서 벗어나거나 혹은 그냥 그렇게 상투적인 신앙으로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본인에게 있어서 최고의 비극이며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강절 마지막 주일을 보내며 그리고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주일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철저하게 경계하고 경책해야 할 중요한 테제를 소개합니다.

※ 예배의 무너짐에 대하여 무감각해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리 지역 사이를 통과하실 때 한 마을을 들어가셨습니다. 마침 그 때 아마도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던 나환자 10명이 감히 주님께로 가까이 나아오지는 못하고 멀리 서서 주님에게 자신들의 간절한 소원을 간구합니다.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본문 13절).
  손가락은 물론 모든 장기가 썩어가는 병, 고장 난 몸에서 피고름이 나는데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질병, 말 그대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천형이라고 불리는 저주의 질병이 바로 나병입니다. 이런 이유로 이 환자들은 자기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 예수께서 들어오신다는 것이 일생일대의 최고의 기회였기에 주님께 간구하였고 그들의 간절한 간구를 들으신 주님께서 단 한 마디의 선포로 그들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런데 이 기적의 역사가 이 본문의 끝이 아님을 누가는 분명히 합니다. 10명의 환자 중에 사마리아 출신의 병 고침을 받은 사람이 왠지 모르게 주님에게로 돌아왔습니다(본문 15-16절).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이 본문에서 정말로 중요한 대목은 본문 14절입니다.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통상적으로 유대인들의 나병 치유의 선포는 제사장의 몫이었습니다.(레위기 14:2절 이하 참고) 주님도 이것을 인정하셔서 그들에게 치유된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허락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10명의 나환자들이 주님이 말씀을 선포하실 때는 아무런 일이 그들에게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들의 몸에 이상 징후가 보인 것은 제사장에게 가는 길에 나타난 것입니다. 제사장에게 가는 노정에 일어난 기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공식적으로 아직 나병에서 고침 받았다는 유대 공동체의 선언이 일어나기 전에 고침을 받았다는 말이 됩니다. 이 엄청난 일이 자기에게 일어난 것을 알았던 자 중에 단 한 명, 그것도 이방인이라는 설움을 받고 있었던 한 명이 제사장에게 가던 길을 멈추고 발걸음을 돌이켰습니다.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는 것이 중요하고 급한 것이 아니라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 자신의 자아를 보이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것이며 본질적인 것임을 그는 인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제사장이라는 세속적인 가치의 승전보를 유보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가치라는 주 예수께로 발걸음을 돌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방인이었던 그는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나환자가 깨끗해진 자신의 육체를 보고 예수께로 돌아온 것은 그의 첫 번째 예배였다.”
  본문 16절에서 ‘엎드리어(헤페센)’라는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가장 높은 자리에서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신앙인들의 이 행위가 바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예배한다는 의미는 내가 하나님 앞에서는 정말로 무익한 존재임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것이라는 0.1%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은 나의 의지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임을 인정하고 항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납작 엎드리는 것이 바로 예배인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가서 두 손을 번쩍 들고 항복할 때 주님으로부터 또 다른 은혜요, 선물을 받게 됩니다.

 ※ 온전한 구원이라는 축복입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본문 19절). 이제는 단순히 나병이라는 육체의 질병에서만 구원을 받은 수준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기록한 ‘구원하였느니라’ 는 단어 ‘쏘조’는 인간의 영혼 구원을 말할 때만 쓰이는 독특한 헬라어 단어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과 해석이 나에게 이렇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예배의 예배됨에 어떤 다른 가치를 붙여 변질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예배는 나를 꺾어 내 영혼을 되살리는 은혜의 수단입니다. 예배를 예배로 인정한다는 것은 교회의 부정적인 일련의 일들에 함몰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겠다는 결단의 선포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장 낮은 자가 되겠다는 신앙의 고백이 예배이므로 나의 곁가지는 중요한 화두가 되지 않습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겠다는 경배함이 예배입니다. 예배를 온전히 사모하지 못함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얍삽함에서 벗어나십시다. 내가 하나님께 온전히 예배하지 못하는 것은 누구의 탓이 아니라 내 영혼이 심각하게 병들어 있음을 명심하고 성령님께 치유함을 간구합시다.
  아이든 토저 목사는 ‘진짜 예배자’에서 영국이 낳은 위대한 설교자인 찰스 스펄전 목사의 이야기를 인용하였는데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가슴은 ‘침묵 속에 계신 하나님’ 이든 ‘폭풍 속에 계신 하나님’이든 어느 곳에서든지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채워진 사람, 하나님을 정말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은 생활의 침묵 속에든, 생활의 폭풍 속에서든 그 분을 예배하는 즐거움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이 말의 뜻은 예배드림에 투정부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헤롯 성전 미문에서 40년 동안 거지로 빌어먹고 살던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올라가다가 그를 불쌍히 여겨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으켜 세워준 기적이 기록된 사도행전 3:8절을 보면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40년 만에 일어난 그 사람, 하고 싶은 것이 굉장히 많았을 텐데 그가 하고 싶었던 제일 우선순위를 누가는 놓치지 않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그토록 들어가서 예배를 드리고 싶었던 그 은혜가 그에게 삶으로 실천되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에게 있어서 예배가 무엇인지 자문해 봅시다. 아이든 토저의 말대로 자기만족과 카타르시스를 위한 쇼인가? 아니면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과 만나는 감동의 현장인가?
  세인교회에서 신앙인이라는 이름으로 예배하는 성도들이여! 예배를 잃어버리지 마십시다. 예배드림을 다른 것에 비추어 계산하지 마십시다. 예배는 우리의 영혼을 날마다 새롭게 하고 살리는 유일한 하나님의 복주심의 현장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림을 기뻐하고 성탄의 계절, 아기 예수께 경배한 동방박사들의 심령이 우리들이 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