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여러분이 속해 있는 공동체 중에서 마음껏 자랑하고 싶은 단체나 공동체 소개하고 이유 나누기. | 경배와 찬양 (WORSHOP) ● 여기에 모인 우리 (찬송가 620장) ● 하나님 한 번도 나를 (복음성가)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본문 : 데살로니가후서 2:16-17 ● 제목 : 우리 1)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형제들에게 고백한 주군이신 하나님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2) 바울이 1번 항목에서 주군을 그렇게 고백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설교를 참고하자) ● 벧전 2:9절 참고: ● 5가지의 주군께서 주시는 은혜: |
3) ‘우리’는 1인칭 복수 대명사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우리 아버지라는 신실한 고백을 위해 주군이 주신 5가지의 종합 선물세트를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합심하여 뜨겁게 기도해 보자. • 통성으로 뜨겁게 기도하고 그렇게 믿기로 결단하는 은혜의 시간을 만들어 보자. | 사역하기 (WORK)*가을열린 모임 사역 3주차 사역 심도 있게 논의하고 기도하기.
1) 중보기도 ① 담임목사님을 위하여 ② 가을 열린 모임 3차 사역을 위하여 ③ 추계 셀 대 심방을 위하여(정은희 셀_23일) ④ 대입 준비를 위한 수능생들을 위하여(11/12) (곽보람, 서혜린, 섭현우, 이주원, 정승민) ⑤ 중보가 필요한 지체들을 위하여
2) 치유기도
3) 헌금 기도
4) 광고
5) 폐회: 주기도 | 설교요약 (SUMMARY)2015년 10월 18일 주일 오후 예배 설교 제목: 데살로니가후서 2:16-17 본문: 우리
‘우리’ 라는 단어는 상당히 많은 뜻을 함축하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사전적인 의미가 자기와 상대가 함께 포함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우리’ 라는 대명사의 공통분모는 공동체성이며 연대성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에게 ‘우리’ 라는 이 단어를 하나님 앞에 사용하고 있는데 그것을 주목해서 보아야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6-17절). 바울은 두 절수에 불과한 본문에서 무려 세 번에 걸쳐서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할 때 우리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우리(하나님과 예수의 자녀 된 자들) 들을 사랑하시고 위로와 소망을 주시고 또한 견고하게 서게 해 주신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데살로니가 교회의 형제들에게 거리낌 없이 선포할 수 있었던 이유가 오늘 설교의 주제이자 교훈입니다.
1) 바울은 주님께 속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일체의 모든 선포에 동의하는 것을 전제한다는 사고로 무장되어 있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든, 예수께서 무슨 명령을 내리시든 나는 그 주군들의 일체의 행위에 대하여 받아들이고 수용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이 나는 그 분의 것이며 그 분의 노예임을 인정하며 그 분께 속해 있으므로 나의 주권이 철저하게 주님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말입니다. 나는 그 분의 소유라는 신앙의 선언을 바울이 하고 있는데 세속의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왜 내가 그의 것이냐고 대드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그래서 불교의 성직자들이 공공연하게 “그 누구에게도 내 인생의 결정권을 주지 마십시오. 내가 내 삶의 주인입니다. 부처님도, 예수님도, 그 어떤 성스러운 스승이라도 나 자신이 있었기에 그 분들의 성스러움도 존재한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십시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젊은 불교인들을 열광시키고 있는 혜민 스님의 말을 곰곰이 들여다보면 의미가 있습니다. ‘나 자신이 있었기에 그 분들의 성스러움도 존재한 것’이라는 그의 발언에 많은 사람들이 열광합니다. 그의 발언을 전체적으로 포함하여 해석한다면 나는 참 괜찮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나는 내 삶의 주인공이며 결정권자라는 것입니다. 그런 내가 있었기에 나를 통해 성자들의 삶이 조명될 수 있었고 그들을 성자로 인정할 수 있는 지적인 혜안도 바로 나 때문이라고 들리는 부분입니다. 이 해석을 전제한다면 같은 것 같지만 결코 같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죗성입니다. 나의 죗성 때문에 주님의 거룩성이 느껴지고, 나의 인생을 예수께 걸 수밖에 없는 이유도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 죄와의 결별 때문입니다. 도저히 나 혼자서는 극복할 수 없는 나의 죄의 진창 때문에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나’는 ‘나’라는 삶의 자아의 주인일 수 없습니다. 도무지 그렇게 해보려고 노력했는데 100전 100패였습니다. 앞으로도 분명하고 선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나의 인생의 주인으로 살아갈 때 또 100전 100패 할 것이라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주님이 내 인생의 여정과 내 삶의 주인 돼 주옵소서.” 지금 인도 다람살라에서 망명 정부를 세워 티벳의 정신적인, 정치적인 실질적인 지도자인 달라이라마가 세계를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설법의 내용이 ‘그대의 외부에는 어떤 창조주도 존재하지 않으며 만에 하나 창조주가 있다면 그것은 그대의 내적인 마음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선언에도 우리가 꿈적하지 않는 이유는 내 마음의 창조주가 썩어질 대로 썩어지고 후패할 대로 후패해 더 이상 나빠질 것이 없는 막다른 골목에 도착해 있는 내 내적인 마음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우리 하나님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이 믿음의 고백을 하려면 반드시 인정하고 수용해야 하는 선행 조건이 바로 내가 주님의 것이라는 분명한 소속감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데살로니가 교우들에게만 이런 신앙적 선포를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 편지에서 이런 신앙의 고백을 적나라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21),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롬 1:6),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 15:10) 베드로 역시 로마에서 순교를 당하면서 남긴 그의 첫 번째 편지에서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고 고백했습니다. 2) 신실하신 하나님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사랑하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에게 자신이 믿고 의지하는 주군에 대하여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① 우리들을 사랑하신다. ② 영원한 위로를 주신다. ③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다. ④ 마음을 위로해 주신다. ⑤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는 신뢰를 주시는 분이다. 이 다섯 가지의 선물을 종합하면 “신실하신 주군이신 하나님과 예수께서 바로 우리들의 하나님이시오, 예수 그리스도시다” 라는 확신의 종합선물세트가 됩니다. 다니엘 2장을 보면 어떠한 결정도 내리기 어려운 상황에 처한 다니엘의 운명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느부갓네살이 난해한 꿈을 꾸고 그 꿈도 알려 주지 않은 채 온 나라에 있는 마술사들을 다 불러 자기가 꾼 꿈을 알아내고 그 내용까지 해석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왕이여 왕이 한 큰 신상을 보셨나이다 그 신상이 왕의 앞에 섰는데 크고 광채가 매우 찬란하며 그 모양이 심히 두려우니 그 우상의 머리는 순금이요 가슴과 두 팔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그 종아리는 쇠요 그 발은 얼마는 쇠요 얼마는 진흙이었나이다 또 왕이 보신즉 손대지 아니한 돌이 나와서 신상의 쇠와 진흙의 발을 쳐서 부서뜨리매 그 때에 쇠와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서져 여름 타작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나이다”(다니엘 2:31-35절). 느부갓네살이 꾼 꿈은 바벨론 이후 역사적인 사건들이 어떻게 펼쳐질 것인가? 에 대한 구체적인 정황들이었습니다. 황금 통치 시대인 바벨론 이후 은의 나라 시대인 메데와 바사가 그 다음 나라를 이룰 것이요, 그 다음에는 동의 나라인 헬라가, 헬라 뒤에는 이후에 진흙의 나라인 로마가 정권을 잡겠지만 이 세상 나라들은 결국에는 바람에 날아가는 겨같이 사라지게 될 것임을 예언한 꿈이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왕의 권력을 갖고 내린 명령인 것은 분명하지만 명령이라기보다는 억지요 트집이었습니다. 만에 하나 알아내지 못하면 다 죽는다는 살해 위협을 받기까지 합니다. 바벨론에 살고 있는 술사들은 이 명령에 부합하지 못해서 떼죽음을 당하고 이 위기는 다니엘과 친구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에게 느부갓네살에게 꿈에서 행하셨던 일을 고지해 주셔서 은 그 꿈을 해석하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당시 자칭 살아 있는 신에게 당신의 나라가 끝나게 될 것이라는 마치 반역과도 같은 선포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다니엘은 바벨론의 멸망까지 포함하여 있는 그대로를 선포합니다(다니엘 2:36-45절). “손대지 아니한 돌이 산에서 나와서 쇠와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서뜨린 것을 왕께서 보신 것은 크신 하나님이 장래 일을 왕께 알게 하신 것이라 이 꿈은 참되고 이 해석은 확실하니이다 하니”(다니엘 2:45절). 45절의 메시지는 “느부갓네살 왕이여! 당신의 나라는 반드시 멸망할 것입니다.”라는 말입니다. 다니엘이 이렇게 담대하게 전할 수 있었던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이 이 꿈을 느부갓네살에게 조명하셨다면 이 일을 시작하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이 일의 매듭을 지으실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을 다니엘이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21세기의 신앙의 위기는 바로 이 하나님의 신실함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 한 번도 당신을 변개하신 적이 없으신 데 우리들이 그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다니엘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보상하신 신실함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다니엘 2:46-49절).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의 형제들에게 선포한 ‘우리’ 하나님과 ‘우리’ 예수님을 믿음으로 신뢰합시다. 그 주군께 우리 모두 속하여 주군 되신 하나님과 예수님과 연대하는 것이 가장 행복한 선택임을 잊지 맙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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