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 추석 연휴 기간 동안 경험한 감동 혹은 아쉬움 나누기 | 경배와 찬양 (WORSHOP) ● 주 안에 있는 나에게 (찬송가 370장) ● 주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고 (ccm)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본문 : 누가복음 2:41-50 ● 제목 : 이것만큼은 1) 오늘날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잃고 사는 첫 번째의 이유를 무엇이라고 본문은 진단하고 있는가? 2) 두 번째의 이유는 무엇인가? 3) 잃어버린 예수님을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 설교에서 강조한 내용을 곱씹고 적용해 보자.(46절 참고) ● 구체적인 적용하기 | 사역하기 (WORK)1) 중보기도 ① 담임목사님을 위하여 ② 추계 셀 대 심방을 위하여(송은호 셀) ③ 가을 열린 모임 사역을 위하여 (10월 4일~7주) ④ 대입 준비를 위한 수능생들을 위하여 (곽보람, 서혜린, 섭현우, 이주원, 정승민) ⑤ 중보가 필요한 지체들을 위하여 2) 치유기도 3) 헌금 기도 4) 광고 5) 폐회: 주기도문 | 설교요약 (SUMMARY)2015년 9월 27일 주일 낮 예배 설교 본문: 누가복음 2:41-50 제목: 이것만큼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예수님의 정신은 요한복음 13:34절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혹은 사랑에 인색하거나 사랑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우리들이 주군으로 모시고 있는 예수 그 분을 본질적으로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소년 시절의 이야기로 예수님이 12살이 되던 해에 부모님과 함께 유대의 절기인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나사렛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1세기 역사가인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유대인들은 그들의 3대 절기 중에 유월절을 가장 큰 절기로 지켰기에 전국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여든 백성들이 약 200 백만 명에 육박하여 예루살렘이 상당히 혼잡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유월절의 절기를 마치고 다시 나사렛으로 돌아가던 중에 요셉과 마리아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동행하고 있던 아들 예수가 없어진 줄을 하루가 지난 뒤에야 알고 근심하는 마음으로 동분서주하며 하루 종일 아는 사람과 친척의 집을 찾아 아들 예수를 찾기 위해 헤맸지만 헛수고였음을 본문이 말해 줍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수고를 했지만 아들을 찾지 못하고 혹시나 모를 예루살렘으로 다시 들어갔는데 바로 그 예루살렘 성전에서 그렇게도 찾던 아들이 율법 선생들과 함께 앉아 말을 듣기도 하고 질문도 하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아들을 찾은 요셉과 마리아는 찾은 기쁨은 잠시 인간적인 노가 일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가 아들을 향하여 속에 있는 분을 터뜨리며 이렇게 예수를 나무랍니다(본문 48절 하반절).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그러자 듣고 있던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그 말에 엉뚱한 대답으로 말씀을 하십니다(49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본문의 기사를 통하여 ‘예수를 잃어버린 우리들’인 현대인들의 모습을 봅니다. 더 큰 문제는 이렇게 답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이어지는 부모들의 영적 상태였습니다(50절).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을 깨닫지도 못하고 심지어 예수님을 잃어버리기까지 한 이유를 오늘의 시대에 적용한다면, 1. 영적 상투성이 영적 긴박성보다 앞설 때 예수님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일반적으로 팔레스타인 지방에서의 여행길은 여성들을 남성들보다 앞서 보내는 풍습이 있는데 그 이유는 사막의 기후가 워낙 안 좋기 때문에 속도의 차이에서 나는 완급을 조절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추측해 볼 때 마리아는 어린 아들 예수가 아버지인 요셉과 함께 동행 하는 줄로 믿고 나사렛으로 돌아가는 여정 중이었던 것 같습니다(본문 44절 전반절 “동행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하루 동안 아들이 있는지 없는지를 몰랐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착각이었습니다. 아들은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마리아가 아들 예수를 잃어버리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 상투성 때문이었습니다. 통상적으로 그렇게 해왔으니까 아버지와 함께 예수가 있을 것이라는 상투성입니다. 상투성은 신앙의 암적 요소입니다. 영적으로 긴장하지 않게 하고 영적으로 성도들을 무디게 합니다. 무기력한 영적 상태를 만들어 영적 긴장감을 무력화시킵니다. 그 또 하나의 예가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발견하고 음욕이 들어서 그를 범하는 범죄사가 기록되어 있는 사무엘하 11장과 12장을 보면 완벽하고 총명했던 다윗이 어떻게 이런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가를 엿볼 수 있는 귀한 단서를 사무엘하 11:2절에서 발견합니다. “저녁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그 때는 전시로 암몬과의 치열한 전투가 있는 시기였는데 다윗이 그렇게 치열한 전투 때에 초저녁부터 자고 있다가 저녁때가 되어서 일어났습니다. 할 일 없이 지붕 위로 올라가서 산책을 하다가 보니 범죄의 싹이 튼 것입니다. 성도는 항상 긴장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엘리 비젤의 자전적인 소설 ‘팔티엘의 비망록’ 서문에서, 『한 의인이 소돔에 갔다. 소돔 사람들을 죄와 벌에서 구원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밤낮으로 거리와 시장을 돌아다니며 탐욕과 도둑질, 거짓과 무관심을 버리라고 설교하였다.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고 빈정거리며 웃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그의 말을 더 이상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이미 소돔 사람들에게 흥미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살인자들은 계속 살인했고 현자들은 계속 침묵했다. 어느 날, 의인을 아이가 다가와 아무 소용도 없는 외침을 왜 계속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의인은 자기가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만 소리를 치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엘리 비젤이 말한 그대로 ‘내가 소리를 치는 이유는 그래야 사람들이 나를 변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이지.’ 의 영적인 긴장감을 상실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시대는 영적인 소리, 하나님의 목소리에 열광하지 않은 시대가 된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목사도 저런 데 뭐, 장로도 전혀 나와 다르지 않은 데 뭐,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나 세상 사람들이나 전혀 다르지 않은데 뭐, 내가 유별 날 이유가 있는가?”하며 상대적인 상투성에 빠져 조금도 영적으로 긴장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잃는 자들은 예수를 잃어버리게 되는 궁극적인 비극의 주인공으로 전락된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2. 하나님의 식이 아니라 사람의 식을 의지하면 주님을 잃어버립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44절 하반절)았으나 “만나지 못하”(45절 전반절)였습니다. 웃시야 왕은 16세의 약관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 초창기에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에 청종하며 남 왕국 유다를 나름대로 선정했던 남 유다 제 10대 왕입니다. 왕위에 등극하여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들을 골라 사역했던 웃시야는 나라를 강대하게 만들었고 하나님도 그를 축복하셔서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동안 그에게 마음껏 축복하셨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웃시야는 그 축복을 끝까지 갖고 가지 못하고 그의 재위 후반기에 하나님께 교만해졌습니다(역대하 26:16).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 무소불휘의 권력을 휘두르는 강력한 군주가 된 그는 이제 하나님의 영역을 자기 마음대로 조정하려는 교만한 마음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제사장들의 몫을 취하여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의 성역을 침범했고 그것을 제지하는 제사장들을 공권력으로 제어하고 핍박하는 죄악을 자행하기에 이릅니다. 더 이상은 웃시야의 교만함을 묵과하실 수 없었던 하나님은 그가 자기 힘으로 제사를 드리려고 할 때 그에게 문둥병을 발하게 함으로서 하나님의 권위를 보여 주게 됩니다(역대하 26:19절). “웃시야가 손으로 향로를 잡고 분향하려 하다가 화를 내니 그가 제사장에게 화를 낼 때에 여호와의 전 안 향단 곁 제사장들 앞에서 그의 이마에 나병이 생긴지라” 그러나 웃시야에게 임한 하나님 징계의 가장 두렵고 떨리는 일은 육체적인 질병이 생긴 것보다 하나님이 그를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이사야 6장입니다. 통상적으로 이사야 6장은 이사야가 성전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남 유다를 위해 예언자로 서게 되는 정도로 이해하는 본문이지만 존 비비어는 이사야 6장에서 아주 중요한 영적인 교훈을 제시합니다(이사야 6: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웃시야가 죽자 하나님은 이사야를 성전으로 부르셔서 그에게 소명을 주시며 남 유다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마스터 플랜을 시작하셨습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대단히 중요한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웃시야가 살아 있는 동안 성전에서 활동하시지 않았습니다. 사람에 의해 더럽혀진 성전을 하나님이 찾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사람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던 성전이 하나님의 관심사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 의해서 휘둘리지 않으시는 자존자이십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 웃시야가 죽자, 이제는 하나님의 사람을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조정되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자를 기대하지 않으십니다. 도리어 이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사야를 들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우리들이 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지할 때 하나님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의 식을 버리고 사람의 식을 고집할 때입니다. 예수님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식을 의지하면 됩니다.
※ 잃어버린 예수님을 찾으려면 본질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렇게도 찾지 못했던 예수니을 하나님의 성전에서 찾았습니다(46절).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 즉”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주님이 원하시는 뜻인 본질로 돌아와야 합니다. 신앙의 본질을 사수하는 것이야 말로 바로 예수님을 만나는 길이고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길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님이 되심을 믿는다면 주님이 원하시는 주파수에 내 영적인 메모리를 맞추어 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습관화된 나의 상투적인 신앙을 버리고 영적 긴장감으로 주님 안에 거합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