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나를 변화시켰던 촌철살인 나누기(이유도 함께) | 경배와 찬양 (WORSHOP)● 하나님의 나팔소리 (찬송가 180장) ●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복음성가)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본문 : 데살로니가후서 2:1-4 ● 제목 :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1) 바울이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주님이 재림하시기 이전에 임할 내용들을 설교를 기억하며 나누어 보자. ● 3절에서 말한 징조: ● 4절에서 말한 징조: |
2) 바울이 이렇게 역설하게 된 긴박한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 데살로니가 교회에 팽배했던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들(본문 2절을 참고하자.) ● 거짓 가르침을 전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던 세 가지는 무엇들인가? (설교를 참고하자.) |
3) 오늘을 사는 내 삶의 현장에서 주님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보여 지는 예를 설교를 중심으로 말해보자. ● 오늘의 배교: ● 성전의 하나님 자리를 꿰차고 있는 일들: ● 이런 오늘의 긴박성을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인가?(설교 제목과 관련하여 부연해 보자.) | 사역하기 (WORK)1) 중보기도 ① 담임목사님을 위하여 ② 추계 셀 대심방을 위하여(강지숙셀) ③ 대입 준비를 위한 수능생들을 위하여 (곽보람, 서혜린, 섭현우, 이주원, 정승민) ④ 중보가 필요한 지체들을 위하여
2) 치유기도 3) 헌금 기도 4) 광고 5) 폐회: 주기도문 | 설교요약 (SUMMARY)9월 6일 주일 오후 예배 설교 (데살로니가후서 6번째 강해) 본문: 데살로니가후서 2:1-4 제목: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바울은 오늘 본문 1절에서,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라고 말하면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을 향하여 계속해서 ‘형제들아’ 라고 호칭하면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품고 중보하며 사랑하고 있음을 인식시키고 있습니다. 바울은 사랑의 연대를 확신시키고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을 향하여 이제는 중보기도가 아닌 권면의 내용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1장은 중보의 내용이었지만 2장은 권함의 내용입니다. 중보라는 것은 듣던 안 듣던 일방적인 사랑의 메시지를 기도에 담았다는 성격이 강합니다. 그러나 1절에 사용된 ‘구하다.’라는 단어 ‘에로타오’ 는 대체적으로 ‘질문을 하다.’ 의 의미로 쓰이는 것이 통상적인 용법이지만 때로는 ‘심문을 하다.’ 의 의미로도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에게 2장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은 조금은 무겁고 신중하다는 것을 알게 해 주는 대목입니다. 본문 1절 하반절과 데살로니가전서 4장 17절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에게 예수님의 재림 즉 강림하심에 대한 해석과 또 그것에 관심을 갖고 있는 자들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바울은 예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주 안에서 먼저 죽은 자들이 일어난 뒤, 주님에게로 이끌림을 받게 될 것을 설명하고 그 이후 우리 살아 있는 자들도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져 주를 영접하게 될 것임을 천명하였습니다. 당시 데살로니가 공동체에서 아주 민감하게 회자되었던 주님 재림의 시기에 일어날 일 중에 소위 말하는 휴거의 의미에 대하여 데살로니가 교회 지체들에게 그렇게 교통 정리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주님으로부터 들림을 받을 공동체를 ‘모임’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 모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 공동체의 지체들을 향하여 바울은 본문 2절로 권하고 있습니다.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 바울이 편지를 할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 공동체에 재림에 관한 거짓 가르침을 주고 있었던 자들의 일련의 영적 공격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주의 날이 이르렀다.’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주님이 이 땅에 재림했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재림했다는 가르침은 대체적으로 세 가지의 형태로 나타났습니다.① 영으로 가르쳐졌습니다. ② 말로 가르쳐졌습니다. ③ 편지로 전해졌습니다. 이 형태는 설명이 필요합니다. 영국 멘체스터 대학교 신약학 교수인 FF 브루스 박사는 다음과 같이 이 세 가지의 형태를 주석합니다. “‘영으로나’ 의 여기에서의 영은 하나님의 영이나 혹은 다른 영의 능력으로 전해진 예언자적인 말씀을 가르친다. 그러므로 이 예언은 거짓 예언일 수도 있고 잘못된 예언일 수도 있다. ‘말로나’의 말은 사도적 권위를 가질 수 있는 말일 수 있고 영적 지혜를 의미하는 말일 수도 있으나 반대로 모든 지혜와 권위가 결여된 말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듣는 사람의 분별력이 요구되는 말이다. ‘편지로나’ 의 편지는 서신 형태의 메시지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세 가지에 대하여 데살로니가후서의 저자는 어떤 형태이든 간에 이 땅에 재림의 주님이 이미 오셨다는 메시지는 가짜임으로 그것들을 무시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을 현혹하고 유혹하던 재림 예수 이미 오심이라는 가르침은 말과 문서와 영적인 진단으로 이루어지고 있었기에 그것들을 거부하거나 판단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을 지금 브루스 박사는 개진하고 있는 것입니다. 브루스 박사는 이런 재림의 주가 이미 오셨다는 말에 대하여는 사람의 분별력이 필요하다는 관점을 제기한 것입니다. 바울은 거짓으로 지금 교회를 유린하고 있는 재림의 주가 이 땅에 이미 오셨다는 현혹에 대하여 넘어가지 말 것을 강력하게 권고한 이유는 이어지는 본문 3-4절의 근거 때문입니다.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주님이 이 땅에 재림하시기 전에 먼저 일어날 일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 배교하는 일들이 일어난다. Ⓑ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난다. 그런데 이 불법의 사람이 나타나면 그는 분명한 특징을 갖고 있음을 바울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 그 불법의 사람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 그는 신이라고 불리는 일체의 모든 것을 숭배하게 한다. ⒞ 자기를 높이는 일을 한다. ⒟ 하나님의 성전에 자기가 앉아 자기를 하나님으로 부른다.
바울의 시대에 바울이 진단하고 있는 분명한 것은 이 불법의 사람이 등장하지 않았고 배교의 넘실거림도 아직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교훈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어린 신자들이었던 데살로니가 교회의 형제들을 향하여 이렇게 타이르듯 혹은 강한 의지를 담아 본문 2절 하반절과 3절 전반절에서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적어도 이 편지가 데살로니가 교회의 형제들을 위해 기록된 주후 50년경의 영적인 기상도는 바울의 신학 속에서는 이렇게 확고부동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런 편지를 다급히 데살로니가 교회의 형제들에게 보내게 된 그 막후에는 범상치 않은 심각성이 엿보였기 때문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할례를 주장하는 유대 율법주의자들로 인해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던 것처럼, 골로새 교회와 히에라볼리 지역에 있었던 마케도냐 교회들이 영지주의 이단에 의해 심각하게 유린되고 있었던 것과 같이 데살로니가 교회는 주의 재림이 이미 이 땅에 이루어졌다고 가르치는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으로 인해 교회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는 위기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의 위기를 곧추 세우고 바로잡기 위해 때때마다 서신들을 작성하여 든든한 하나님의 교회로 만들어갔다는 점에서 우리는 바울의 공로를 폄훼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의 시대적 상황을 통하여 본 이미 온 예수님의 재림 사건은 긴장이 안 된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해프닝으로 막을 내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오늘의 영적 기상도는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을 유혹하고 미혹하던 예수 재림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가르치던 그들과 아주 흡사하게 오늘날 안상홍이라는 예수가 이미 재림을 했기에 그를 영접하지 않으면 모두가 심판을 당한다는 메시지를 사회봉사라는 미끼와 더불어 강하게 밀어 붙이고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는 이단이 존재하고 있는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의 영적 기상도를 살펴야 합니다. 작금의 현실을 바라보면 이러한 일의 판단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모로 자료를 찾아보아도 모두 다 이구동성으로 배교자들의 나타남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바울은 주 예수께서 분명히 오실 것을 믿지만 배교자의 부상, 자칭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의 출현 등등에 있어서 그렇지 않음을 역설함으로 미혹되지 말 것을 권고하고 있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작금은 바울의 시대와 매일반인 것인지 아직 주님의 재림은 요원한 것인지... 배교란 원어적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리에서 믿지 않는 자리로 이동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배교한다는 의미는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로드십을 포기한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바울에게 죄라고 말한 일체의 것들에게서 돌아설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디모데후서 3:1-5) 배교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고 있지만 이런 저런 이유와 상황으로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말라는 압박에 굴복하는 것이 배교입니다. 이미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수많은 배교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꿰찬 사람이 아직은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안도할 것이 아니라 사도행전 4:19-21절의 기록처럼 교회는 안전한 곳이 아니라 가장 위험한 곳입니다. 사람의 안락을 위하여 존재한 곳이 교회가 아니라 사람의 영혼을 위해 부단히 싸워야 하는 곳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만에 하나 교회에서 자신의 이기적인 안락함을 위해 살아가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꿰찬 하나님의 대적자들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주님이 아직 오시지 않았다는 점에서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에게 편지할 당시와 별 다른 점이 없습니다. 그러나 전혀 다른 하나가 있다면 지금은 바울이 지적한 주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일어날 일들의 그림자와 예표들이 너무나 선명하게 보인다는 점입니다. 긴장해야 할 이유입니다. 그러나 “비록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하여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스피노자의 말처럼 ※내 삶의 현장에서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읍시다. 아마도 그의 말은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하더라도 상황 핑계되지 말고 나에게 주어진 일들을 최선을 다해 감당하는 자가 오늘도 승리하는 자가 될 수 있다는 현자의 가르침일 것입니다.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과나무를 심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위대한 사과나무를 심을 수 있는 영적 텃밭은 성경이라는 텃밭입니다. 그 텃밭에 사과나무를 심는 것은 상황에 구애 받지 않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 것은 말씀대로 사는 것이며 그 삶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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