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경배와 찬양 (WORSHOP)말씀읽기와 적용 (WORD)사역하기 (WORK)설교요약 (SUMMARY)8월 16일 주일 오후 예배 설교 (데살로니가후서 4번째 강해) 본문: 데살로니가후서 1:11-12 제목: 중보자이십니까? (1)
바울은 공평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주의 재림의 시기 전까지 환난과 억울함과 고난이 있어도 잘 견디며 이기라는 권면을 먼저 하였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면 반드시 공평하게 갚아주실 것임도 말하였습니다. 바울의 동역자들은 하나님의 이 지지해 주시는 은혜가 있음을 확신했고 그 확신을 데살로니가의 어린 교우들도 그대로 믿어주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이 하나님의 지지하심과 갚아주시는 은혜를 근거로 이렇게 재 강조합니다. ‘이런 이유가 있느니’ (이러므로) 승리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 중보의 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단기 사역을 한 목회자였습니다(11절 a). 그리고 그는 지금 4일이나 소요해야 갈 수 있는 그리스 남부 도시인 고린도에 있습니다. 그런 그가 자기들의 영혼을 위해 영적인 끈을 놓지 않고 있을뿐더러 중도에 믿을 만한 디모데를 파송하여 자기들의 교회를 세밀하게 살펴 주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데살로니가 교회에 엄습해 있는 여러 가지의 영적인 위험 요소들을 미연에 제거하고 방어하도록 편지까지 써 보내주었습니다. 칭찬할 것은 칭찬하고 격려할 것은 격려하고 책망할 것은 엄히 경계하도록 하여 빈틈이 없도록 교회를 돌보아 주었습니다. 이 정도했으면 되었다 싶은데 바울은 두 번째의 편지를 써서 주님이 재림하시면 지금 당하고 있는 여러 모의 억울함과 슬픔들과 고통들을 갚아줄 것이라는 위로의 메시지를 통해 힘을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멀리 떨어져 있지만 분명히 한 가지를 약속한다는 말을 11절에서 말합니다.
① 이름값 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게 해 달라는 중보였습니다.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겨달라는 말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을 성도답게 해 주십시오.”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름에 걸 맞는 신앙인이 되게 해달라는 요청이었을 것입니다. 창세기 32:27-28절은 야곱의 옛 이름을 청산하고 새 이름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는 장면입니다. 야곱의 이름의 뜻은 ‘발꿈치를 잡은 자’(야코프) 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발꿈치를 잡았다는 말은 ‘속이는 자’ 혹은 ‘사기꾼’ 이라는 말로도 대치되는 단어입니다. 야곱은 형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난 이래로 그의 인생은 이름값을 하는 인생이었습니다. 아버지를 속여 장자의 권리를 빼앗고,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거하던 시절에도 그는 단 한 번도 정상적인 삶을 살았던 경험이 없었던 자였습니다. 그랬던 그가 ‘이스라엘’ 로 이름이 바뀌자 처음으로 경험한 것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체험했다고 고백한 브니엘의 아침을 시작으로 그의 인생 여정은 역전되는 은혜를 맛봅니다. 형인 에서와의 극적인 화해를 비롯하여 세겜에서 딸 디나가 강간을 당하여 또 다른 인생의 위기가 오지만 그러나 하나님께 약속했던 벧엘로 올라감으로 인해서 그는 이스라엘의 3대 족장으로서 자식들이 12지파의 분복을 받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는 장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의 이런 인생 역전은 분명한 분깃점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 즉 ‘하나님이 그를 다스려 준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이름으로 바뀌면서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야곱의 인생을 책임져 주셨기 때문임을 창세기의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에 의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그리스도인’ 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행 11:26). 수리아 안디옥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이렇게 불렸습니다. 성경은 분명한 어조로 표현하고 있지는 않지만 어렴풋하게 하나님의 축복을 부여 받음으로 이스라엘이 된 야곱이 그냥 옛 이름대로 살려는 분위기를 언뜻 비쳐주는 교훈이 하나 있습니다. 창세기 28장을 보면 야곱이 에서를 속여 브엘세바에서 살지 못하고 외삼촌 라반이 있는 하란으로 피신해 가는 어간에 어떤 한 장소에서 노숙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날 야곱은 꿈에서 하나님의 사자들이 하늘에 닿아 있는 사닥다리를 오르락내리락 하는 환상을 봅니다. 그 사닥다리 가장 위에 보니 여호와께서 계셨는데 그 하나님께서 야곱을 축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열조의 조상들처럼 네 족속과 후손을 통해 복을 허락하실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잠에서 깬 야곱은 그 하나님 여호와께 그곳에서 단을 쌓고 예배를 드린 뒤에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고 짓고 하나님께 서원을 합니다(창 28:20-22). 하나님께 서원을 하고 야곱은 하란에서 20년 세월을 보냈습니다. 외삼촌 라반과의 관계가 틀어지고 야밤에 도주하다시피 한 야곱은 얍복 강에서 하나님과 씨름을 하게 되었고 그는 하나님이 져 주시는 은혜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로 바뀐 뒤에 에서와 극적으로 화합을 이루고 새로운 인생 여정을 살게 된 이스라엘은 마땅히 아버지가 있는 것이었던 브엘세바로 돌아가는 여정 중에 벧엘로 올라가야 했습니다. 허나 야곱은 까마득하게 20년 전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잊어버리고 가나안에 있는 땅 세겜에서 장막을 치고 그곳에 머물게 됩니다. 그 세겜에서 야곱은 사랑하는 딸 디나의 비극을 맛보게 됩니다. 히위 족속 중에 하몰의 아들인 세겜이 디나를 욕보이는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동생이 이방의 남자에게 강간을 당했다는 사실이 치를 떤 오빠들이 모의하여 여동생을 욕보인 하몰의 아들 세겜에게 찾아가 할례를 받으면 여동생을 아내로 주겠다고 속인 뒤, 세겜을 비롯한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은 것을 기회로 기동력이 약화된 그들 족속을 시므온과 레위가 급습하여 그들을 도륙하여 피를 보는 일대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 사건을 기화로 하나님께서 세겜에 머물고 있는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약속한 벧엘로 올라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고 다시 명령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이 경고성 메시지를 듣고 나서야 야곱은 다시 이스라엘의 모습으로 돌아가 정신을 차립니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제단을 쌓으며 자신의 이전 약속들을 재확인하고 그곳의 이름을 엘 벧엘이라고 불렀음을 창세기 기자는 보고해 줍니다. 야곱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늦게나마 실천하자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오셔서 그를 축복하는 장면이 창세기 35:9-1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꾸시고 다시는 옛날 이름으로 부르지 않겠다고 천명하신 분이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바로 나에게 붙여주셨다는 은혜입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내주하시는 은혜는 나 때문이 아니라 나를 그렇게 만들어 주시는 성령님의 전적인 일하심 때문입니다. 또한 성령님의 전적인 일하심이라는 은혜와 더불어 나는 위태롭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품어 나를 위해 중보해 주는 중보자의 중보기도 때문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의 어린 신자들을 위해 ‘저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였기에 어린 교회의 신자들임에도 불구하고 마케도니아는 물론 아가야에 이르기까지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인내하는 소망으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지체들의 승리의 비결은 성령님의 일하심과 중보자의 중보가 이루어낸 합작품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은 마땅히 이름값을 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함은 너무나 마땅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인 교회 공동체를 위해 일하시는 성령님의 일하심과 담임목사가 새벽마다 그리고 시간마다 엎드리며 중보 하는 기도에 힘입어 우리 세인 교회 지체들은 삶의 현장에서 반드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값을 하는 성도들이 되십시다. ② 중보는 역사하는 힘이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11절 하반 절에서 바울 팀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 앞에 엄습한 여러 가지의 고난과 역경에 대하여 두려워하거나 떨지 말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중보 하는 우리들의 믿음의 기도 때문에 그들에게 임한 모든 환란과 시험을 능히 승리할 것이라고 바울의 동역자들은 편지로 격려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지체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놓고 볼 때 참 약하고 넘어지기 쉬운 존재들이었습니다. 믿음의 뿌리가 견고하지도 않고 교리적인 체계도 자리를 잡은 상태도 아니었습니다. 어느 것 하나 온전한 것으로 있는 것이 없어서 외풍이 있으면 언제든지 흔들릴 수 있는 상태가 데살로니가 교회의 형편이었습니다. 이런 기초가 튼실하지 못한 교회의 지체들을 향하여 바울은 이렇게 격려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너희들의 지금의 상태가 우리들이 드리는 믿음의 중보기도를 통해 반드시 승리하기를 기도한다.” 금송아지를 만들고 하나님께 범죄 한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를 위하여 중보사역을 하고 있는 모세의 기사가 출애굽기 3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범죄 한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를 향한 실망감 때문에 그들을 진멸할 계획까지 세우셨습니다. 그러자 모세가 목숨을 건 중보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며 담판을 짓습니다(출 32:11-13). 그러자 하나님께서 모세의 이 중보에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14절). 야고보 기자 역시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5:15-16절). 이것을 알았습니다. 바울도 양아들 디모데에게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이렇게 권했습니다(딤전 2:1절). 중보기도를 드리지 않는 것도 죄입니다. 기도를 쉬는 것은 죄이지만 중보기도를 쉬는 것은 영적인 가중 처벌을 받아야 할 중죄입니다. 중보사역을 통하여 나와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값을 하는 자가 되기를 바라며 동시에 나와 당신의 범사 속에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넉넉히 경험하는 주인공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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