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5.07.26 셀 사역2024-04-22 15:32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셀 원들의 족보 중에 기억에 남을 만한 조상들이 있는지 말해보기. 없으면 이름에 얽힌 에피소드 나누기.  

 
경배와 찬양 (WORSHOP)

● 주 안에 있는 나에게 (찬송가 370장)
● 나의 영혼이 잠잠히 (복음성가)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본문 : 데살로니가후서 1:1-2
● 제목 : 뿌리가 어디에 심겨져 있습니까?
1) 데살로니가후서의 인사말에서 볼 수 있는 발신자와 수신자의 공통분모는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그 공통분모에 따른 영적인 시너지는 무엇이었는가?
● 발신자:
● 수신자:
● 영적인 시너지:   

2) 1번 항목의 정답을 근거로 오늘의 내 삶에 영적으로 적용한다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나?
● 설교의 테마 2번을 참고하자.
● 디베랴에서 거라사로 이동하는 배 안에서 겪은 제자들의 난상을 통해 주어진 교훈 참고하기  

3) 현 시점에서 내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 내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을 솔직히 고백하기
• 설교에서 말한 영적인 뿌리내림을 위해 내가 해야 하는 삶의 내용들을 나누고 기도하자.  

 
사역하기 (WORK)
1) 중보기도
  ① 여름 수련회 사역을 위하여
(학생부: 27-월~28-화, 청년부: 8월 13-목~ 15-토)

  ② 연약한 지체들을 위하여
  ③ 대입 준비를 위한 수능생들을 위하여
    (곽보람, 서혜린, 섭현우, 이주원, 정승민)
  ④ 셀원들을 위하여
  ⑤ 담임목사님을 위하여
2) 치유기도
3) 헌금 기도
4) 광고
5) 폐회: 주기도문  

 
설교요약 (SUMMARY)
2015년 7월 26일 주일 오후 예배 설교 (데살로니가후서 강해 1)
본문: 데살로니가후서 1:1-2
제목: 뿌리가 어디에 심겨져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12:3절의 말씀처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우리의 영적인 뿌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심어져 있을 때 흔들리지 않습니다. 주님의 산상수훈 중에 마태복음 7:16-20절의 말씀은 우리가 뿌리를 예수 이외의 어떤 것에게도 내려서는 안 됨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데살로니가후서의 인사말을 통해 예수 믿는 자들이 뿌리를 내려할 그 자리가 어디인지 알 수 있습니다.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1-2절은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지체들에게 두 번째로 보내는 편지의 인사말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는 전서와 연결하여 바울의 서신으로 데살로니가 교회 지체들의 영적인 상태가 악화되었기에 바울이 후서를 쓰게 된 것입니다. 전서에서 살폈던 이방신들을 섬기던 이교 신앙인들의 창궐함이나 로마 황제를 숭배하던 자들의 득세나, 혹은 카비루스 신비주의자들의 득세나 아니면 교회 안에서 있었던 게으른 자들(재림이 임박해 있기에 놀고먹던 자들)로 인해 교회 영적 상태가 훨씬 더 악화되었다는 상황 판단과 전이해입니다. 이러한 상황 악화에 따른 긴장감으로 인해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두 번째의 편지를 쓰지 않을 수 없었고 그래서 이 편지에는 특별히 올바른 주의 재림에 관한 신학적인 기초와 해설 그리고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시기에 훗날 심판을 하실 때 반드시 가장 공의로운 심판을 행하실 것이라는 강력한 외침들이 이 편지 안에 담보되어 있습니다.
  이런 긴장감을 갖고 기록된 편지의 시작에 바울의 일행은 단호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1-2)
  두 구절에서 연이어 선포하는 반복 표현이 주목해야할 내용입니다. 첫 번째 구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두 번째 구절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라고 말합니다. 이 두 구절을 종합하면 바울의 동역자들은 본인들의 소속이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그 분들로부터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축원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바울의 동역자들이 이렇게 은혜와 평강을 전할 수 있는 이유는 데살로니가 교회 공동체의 지체들 역시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통분모는 수신자와 발신자 모두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는 점입니다. 곧 데살로니가후서라는 편지는 수신자와 발신자 모두 그 뿌리가 같다는 점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의 첫 번째 강해의 영적인 도전과 가르침은,

1)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께 그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에게 있어서 흔들리지 말아야 하는 명제이자 기초입니다. 다른 것으로 대치되거나 타협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성도라면 반드시 명심해야 하는 대전제입니다. 호주의 블루 마운틴에 심겨져 있는 메타쉐콰이어 나무는 말 그대로 장관입니다. 이 숲의 뿌리가 지하 몇 미
터에 자리 잡고 있는지 학자들이 정확하게 발표하지 못할 정도로 계산 불가능한 숲입니다. 그 이유는 나무를 그 뿌리를 깊이 내렸기 때문입니다. 
  시편 1:3-4절을 보면,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라는 말은 의인이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다는 시인의 말 표현이 단지 시냇가에 심었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그 의미 이상을 넘어서는 표현입니다. 그것은 뿌리에 대한 의미입니다. 시냇가에 심어진 뿌리는 당연한 견고할 것입니다.
성도의 영적인 삶이 견고한 이유는 뿌리가 든든할 때입니다. 성도의 견고한 뿌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도의 견고한 뿌리는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이것을 일찍이 알았던 다윗은 시편 63:1-2절에서 이렇게 노래하며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이 시는 다윗이 사울의 살해 위협을 피해 유대 광야에서 외롭고 힘든 도피 시절에 쓴 시입니다. 유대 광야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윗이 유대 광야에 홀로 있을 때의 가장 귀한 축복은 ‘사람들은 광야에 있는데 무슨 축복이냐’고 설레발을 칠 수 있지만 분명히 다윗이 유대 광야에 있을 때에 그에게는 복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자신의 기저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영적인 기초가 하나님 아버지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던 은혜가 가장 그에게 민감했다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심령의 깊은 울림으로 다음과 같이 진솔하게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다윗의 이 고백에서 짜릿하게 다가오는 감동은 영혼이 주를 갈망한다는 말은 영적인 궤적이 주님께 집중되어 있는 자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고백 중에 놀라운 고백은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입니다. 육체적인 것이 영적인 태도로 승화된다는 것은 정말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웬만큼 훈련된 자들은 영적인 면에서 무너지지 않습니다.
대부분 육체에서 무너지는 것이 상례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본인의 육체마저도 주를 앙모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의 고백은 그가 아무도 없는 광야에서 다윗이 자기의 영육의 뿌리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바로 직전 시인 62편 1-6절에서는 이렇게 고백하기까지 한 것입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이 사람을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공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그들이 그를 그의 높은 자리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 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성도는 믿음의 기초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 뿌리내린 존재임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본문 강해의 두 번째이자 또 다른 교훈은, ‘뿌리내림’ 이라는 말이 구체적으로 오늘 우리 성도들의 삶에서 어떻게 적용시켜야 하는 것일까?입니다.

2) 그 분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예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 안에 있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소속감 때문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주님은 나의 최고봉’에서 “우리는 영적인 삶을 개발하거나 영적인 휴가를 즐기기 위해서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질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구현하기 위해 여기에 있을 뿐입니다.” 라고 갈파했습니다. 철저한 예수 멤버십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젊은 날의 영성은 놀라움 그 자체입니다. 그가 말하고자 했던 주된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 즉 예수 그리스도인의 멤버십이었습니다.
  마태복음 8장에서 주님이 바다와 파도를 잔잔하게 하신 기사는 풍랑, 바람, 폭풍, 지진, 시험, 실패, 좌절, 낙심, 육체적인 질병, 헤쳐 나갈 수 없을 정도의 캄캄함 등등 이 땅에서 경험할 수 있는 일체의 어려움이 임해도 한 가지만 전제하면 괜찮다는 것입니다. 바로 내가 예수 안에 있으면 됩니다. 주님이 내 인생의 배 안에서 같이 계시면 된다는 교훈입니다. 주님 안에 있으면 그것은 주님이 담당해 주실 나의 무거운 짐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이 정도의 믿음이 있는 자가 부를 수 있는 진정성이 있는 찬양이 바로 이 찬양입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성도는 뿌리를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께 내린 사람들입니다. 그 뿌리내림은 그 분들께 붙어 있어 그 분들 안에 있는 것이라고 적용도 했습니다. 그런데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그리스도 없이는 하나님과 우리는 아무런 관계나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 역시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2) 라고 말했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우리들, 바로 그들이 올바른 신앙의 뿌리를 내린 자들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가 하나님 안에 있는 자고 하나님 안에 있으려면 예수 안에 있어야 함을 부인하지 마십시다.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는 예수 안에 있음으로 그들에게 공급되는 은혜와 평강을 예수 안에 있기에 받을 수 있었던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에게 선포하며 축복하며 공급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기를 원합니다.